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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량당 설화

삶을 위하여

by 꼭그래

마량당 설화


앞서 돌탑과 관련해서 이야기했지만, 토착신앙은 국가에서 다시 민중들에게 넘어가게 된다. 토착신앙의 성지도 먼 곳에서 사람들 가까이에 돌탑이나 당이 세워졌다. 한반도의 수많은 당집 중에서 마량당은 재미난 설화가 전해지고 있어 찾았다.

동백정가는길.jpg 충남 서천군 마량면 동백나무와 동백정

충청남도 서천군 마량면 마량리 해안가에 주위에 동백나무가 심어져 있어 동백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동백정 옆에는 풍어제를 올리는 당집이 있는데, 마량리에 있다고 해서 마량당이라 한다. 마량당이 자리한 곳은 높은 곳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


마량당.jpg 마량당

마량당은 2년 혹은 4년마다 풍어제를 올렸다 하는데, 지금은 마량당의 동백꽃과 바다 쪽의 작은 섬 오력도와 인근의 발전소에서 나오는 따뜻한 물 때문에 물고기가 몰려들어 낚시꾼들의 관광지가 되었다. 당은 마을 제(祭)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구복을 위해 제를 하기도 한다. 마량당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경치를 구경하는 동백정으로 알려졌다.


마량당이 생기게 된 이유는 풍어와 안녕을 위해서다. 그런데, 마량당에서 제(祭)가 지속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중단되었던 시기도 있었다. 제를 올려도 큰 효과가 없어 중단됐지만 다시 제를 올리게 되었는데, 설화 때문이다.


첫 번째 이야기


폭풍우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한 노인이 꿈을 꾸었는데, 어느 백발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마량당 밑을 파보라 했다. 그곳에 불상이 있으니 그 잘 모시면 재해가 사라진다고 말해 줬다. 이 사실을 마을 원님에게 고하니 사령들을 시켜 파보라 했다. 노인의 말처럼 불상 세 개가 나왔다. 그래서 원님은 그곳에 당을 세우고 마을 사람들은 용신제(龍神祭)를 지금껏 지내오고 있다고 전해진다.


두 번째 이야기


중국의 장수가 이곳 마량면에 두 딸을 데리고 도망을 왔다. 청나라 조정과 문제가 있던 장수였다. 먼 이곳까지 왔을 정도로 큰 죄를 지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청나라 병사들이 이곳까지 쫓아와 장수와 두 딸을 죽였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 부녀들을 마량면 어딘가에 묻어주었다.

그 뒤로 바다는 슬피 울듯이 비바람이 그칠 줄 몰랐고, 누군가의 꿈속에 두 딸이 나타나 중국 땅이 보이는 지금의 마량당에 묻어 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두 딸의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마량당 근처에 안장(安葬) 해 줬는데 그 무덤 위로 동백나무가 자라 꽃을 피웠다. 사람들은 근처에 당을 세우고 두 딸을 위한 제를 지내니 바다는 다시 잠잠해졌다.


세 번째 이야기


오래전 이곳 바다에서 큰 폭풍이 불어 많은 어부들이 많이 죽었다. 살아남은 어부들은 바다에 다시 나가기를 무서워했다. 나가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고 나가자니 죽을 것 같아서 사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에서 무언가가 지금의 오력도 쪽으로 떠내려 오는 것이었어요. 사람들은 지난번 폭풍우로 가라앉은 배의 파편으로 생각했지만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배 파편이 아니라 나무로 된 당 각시였다. (당 각시는 당 할아버지와 당 할머니와 같이 모셔지는 목각인형을 말다. 당신(堂神)들은 사찰 안 산신각(山神閣)처럼 세 신이 자리하는 것과도 같다.)


당 할아버지, 당 할머니도 아니고 또 인근에서 당 각시 잃었다는 말도 없어 그냥 땅에 묻으려 했다. 그러자 마을의 한 노인이 꿈을 꾸었는데 어느 노인이 말하기를 지금의 마량당 자리에 당을 세워 그곳에 당 각시를 모시면 앞으로 바다에서 죽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 당을 세우고 제를 올리자 그 이후 바다는 진정되었다. 사람들은 그 이후 지금까지 제를 지내고 있다고 전해진다.


충남 홍성 산당의 당신.jpg 충남 홍성군 산당의 당신, 출처 구글

네 번째 이야기


500년 전의 이야기다. 사람들이 뗏목을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는데 파도에 휩쓸려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바다에 남편과 자식을 잃은 어느 노파가 바다에서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용왕을 잘 위해야 화를 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해안가에 떠밀려오는 선황 다섯과 동백(冬柏) 씨앗이 있을 것이니 잘 모시라는 말을 꿈속 노인의 말에 따라 노파가 바다에 나가보니 선황 다섯 분과 동백꽃씨가 있어 선황은 당을 세워 모시고 동백 씨는 당 주변에 심었다 전해진다.


마량당 설화 이해하기


네 설화의 공통점은 꿈이라는 무의식에서 비롯된다. 네 개의 이야기는 마량당이 세워진 이유와 동백나무가 있는 이유에 관한 것으로 나뉜다. 또 토착신앙적인 것과 외부요인적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불교라는 외래종교의 상징인 불상이 신앙의 대상이 되어 용신제를 지내게 된 것인데, 불교가 공인된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자 토착신앙과 외래 종교인 불교가 더 이상 차별화되지 않고 토착신앙화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원님이 등장하는데, 숭유억불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 원님이 불상을 모시는 당을 세운다는 것이 조금 어색한 것 같지만 조선 중기와 후기에 이르러서는 당제가 관아에서 직접 주관하거나 지원했던 관제였다.


두 번째와 네 번째 이야기를 통해서는 동백나무가 원래 이곳에 없었는데 누군가 가지고 와 심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산나무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동백나무는 비바람이 거센 해안가에서 방풍나무의 역할과 큰 나무들은 바람에 쉽게 부러져 다 자라도 2미터 정도의 동백나무가 제격이었을 것이다.


가장 궁금증을 자아내는 부분은 당 각시 하나만 모셨다는 점이다. 당 할아버지와 당 할머니는 우리의 창조설화라 할 수 있는 마고할미의 이야기다. 당 각시만을 모신다는 것은 해안가 지역에서 유독 많이 전해지는 이야기가 "바리데기"설화와 연결된다. 친부모에게 버림을 받은 바리데기는 친부를 위해 저승의 생명수를 구해 온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당 각시는 바리데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 네 번째 이야기는 시대를 달리하는 이야기다. 가장 나중의 이야기이지만 "500년 전"이라는 말로 시간의 권위를 빌린다. 당제(堂祭)를 지내도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사람들은 어느 순간 당제 지내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한동안 당제를 지내지 않던 시절이 있었는데 한 할머니의 요청으로 다시 당제를 지내게 됐다.


서낭신을 다시 모시고 동백꽃도 심어 마량당에 사람들의 기원이 모여들게 했다는 이야기다. 가족을 모두 잃었지만 다른 누군가의 남편과 아들을 잃지 말기를 바라는 할머니의 정한(情恨)이 느껴진다.


『성황당은 중국의 당제의 형식이다. 큰 성의 진입 첫 관문에 세워 성 안의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한다. 서낭당은 마을 앞에 세워져 마을의 풍요와 무병장수를 염원한다. 마을로 향하는 길에는 액운과 악귀를 물리치는 장승을 세운다.』


오도재 이야기

오도재.gif
변강쇠묘_01.JPG

경남 함양군의 오도재에는 변강쇠전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변강쇠가 땔감을 구하지 못하자 오도재에 세워진 함양을 지키는 장승을 뽑아 태우니 전국의 장승들이 변강쇠에게 병을 줍니다. 변강쇠는 온갖 병을 앓다 죽게 된다는 이야기가 이곳 오도재에서 전해지고 있다. 사실이 아니지만 장승에 대한 옛사람들의 생각을 알 게 해준다.

DSC_5768_01.JPG 경남 함양군, 벽송사의 장승

무덤 설화


홍성 말 무덤 설화


무덤은 마을 안에 있기도 했지만 망자의 시체가 썩어가면서 악취와 병을 일으킨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망자는 삶의 공간인 마을을 떠나 산과 들에 묻히게 된다. 그렇게 마을은 온전히 삶의 공간이 되었다. 짐승도 마찬가지다. 주인을 위해 목숨을 잃은 말 조차도 무덤을 만들어 줬다. 충청남도 홍성군에는 말 무덤인 금마총이 있는데, 그 무덤에도 설화가 전해진다.


금마총.jpg 홍성군, 금마총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철마산과 금마총이 있는데 최영의 애마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최영이 말을 타고 무술을 연마했다 해서 철마산이라 하는데, 철마산에서 백월산의 은행나무로 최영이 화살을 쏘았다. 그리고 말을 달려 백월산에 화살보다 먼저 도착하면 말에게 상을 내리고 늦으면 목을 베려했다. 하지만 백월산에 도착해 화살을 찾으니 보이지 않아 화살이 먼저 도착한 것으로 생각한 최영은 칼을 꺼내 말의 머리를 베었다. 그 순간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최영은 자신의 실수로 말을 죽였다는 생각에 말의 무덤을 크게 만들어 주었다.


기봉사_01.JPG 충남 홍성군 기봉사, 최영장군 사당

그런데 화살보다 빠른 말에 관한 이야기는 이성계의 설화에서도 전해진다. 함흥의 반룡산에는 치마대(馳馬臺)라는 비석이 있는데, 이성계가 화살보다 느린 말을 죽여 묻었다는 말 무덤이다. 이성계와 최영은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다. 이성계는 나라를 개국하게 되는데 그것을 저지하려던 최영이 비슷한 설화가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또 전라북도 장수에는 치마대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또 이성계가 아니라 최영과 관련된 치마대가 있다. 서로 다른 인물에 같은 설화와 같은 비석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런데, 화살보다 빠른 말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는 신라시대 최치원과 관련된 이야기다. 경남 마산에서도 같은 설화가 전해지는데, 최영과 이성계는 무관(武官)이어서 납득이 가지만 최치원은 문관(文官)이다. 그렇다면 설화는 딱히 말과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아마도 지역 사람들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때를 잘 만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생겨난 설화 같다.


남연군 묘와 상가리 미륵불 설화

남연군묘_01.JPG
상가리불상_01.JPG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에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다.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강하게 펼치게 된다. 이곳 광천리에서 150여 미터 떨어진 상가리에는 미륵불이 서 있다. 남연군의 묘가 들어선 자리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다 한다. 가야사를 없애고 남연군의 묘를 쓰자 이곳 상가리 미륵불이 등을 돌렸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호장공 묘 설화

호장공묘.gif 충남 서천군 한산면, 호장공묘

서천군 한산면에 지금의 한산 이씨 시조가 되는 몽은 이색의 아버지 호장공 이곡인데 이 분이 고려시대 한산(韓山)에서 호장(戶長)으로 지내는데, 그때 원님이 동헌 마루에 있으면서 남산을 쳐다보고서는 “참 좋기는 하다 만은”하더란 말을 듣고는 좋은 명당인가 보다 생각하고 동헌이 있는 자리에다 묘를 쓰겠다고 호장공은 생각했다. 그 뒤 얼마 안 돼 원님은 서울 내직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호장공은 밤에 몰래 동헌 마루 밑에 묘를 썼다. 그리고 아침 일찍 가보니 시신이 밖에 나와 있었다. 그래서 다시 잘 묻고 왔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에 가 보니까 또 시신이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여서 다시 빈소에다 모셔놓고 서울로 올라가 그 원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슬쩍 동헌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원님은 동헌 마루가 명당이기는 하지만 못 쓰는 명당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앞 남산 너머에 뿔 같은 봉우리가 둘이 넘겨다 보고 있는 규봉(窺峯)이 있어서라고 답해 주었다. 규봉이 보이는 곳에 묘를 쓰면 집안에 역적이 나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게 된다고 말해줬다. 그러자 호장공은 그 자리에 묘를 쓰고 싶다고 원님에게 솔직히 털어놓는다. 역적이라도 좀 큰 인물이 나왔으면 해서 그 자리에 묘를 썼더니 자꾸 시신이 밖으로 나온다는 것을 말하자 원님은 그 묘 자리는 정승자리가 되어서 일반인의 묘 자리가 아니니 꼭 그 자리에 묘 자리를 쓰고 싶으면 영정에 정승의 관직을 적고 의복을 정승 관복을 입혀서 안장하면 된다고 말해 준다.


호장공은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와서 원님이 말 한대로 하고서는 시신을 모셨다. 다음 날 가보니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러데 사흘 후에 밤중에 풍우가 심하고 뇌성벽력이 크게 일어나니 하늘이 노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날이 개고 아침이 되자 동헌에 와서 보니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앞 남산 너머에서 내다보이는 규봉 둘이 없어졌다. 조선시대에 호장공의 후손이 다시 동헌 마루에서 어딘가로 이장을 했고 그곳은 처음처럼 잘 수리해 놨다고 한다.


무덤 설화를 장승 설화의 뒤에 이야기한 것은 망자에 대한 의식이 변화했음을 이야기하고자 해서다. 옛사람들은 죽음의 세계와 삶의 세계를 나누지 않았다. 삶과 죽음은 같은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 생각했다. 삶과 죽음으로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 혼은 삶의 공간에 남아 있다고 생각해서다. 점차 무덤이 마을 밖으로 멀어지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저승의 세계는 삶의 공간 밖으로 나가게 된다. 이유에 관해서 다양한 가설들이 있는데, 망자의 시체가 썩으면서 악취가 심했고 마을 사람들이 질병에 걸린다는 인식이 생겼을 것이란 가설과 도교의 영향으로 후손들이 잘 되기 위해서는 명당에 조상의 묘를 써야 한다는 풍수지리설을 제기한다. 왜란과 호란을 거치며 족보라는 것이 가문에 중요하게 되었던 조선 중기 이후 조상의 묘도 함께 중요해져 후대에 풍수지리가 중요해졌을 것이 생각된다. 망자의 시체가 마을 안에서 썩는 문제가 먼저였을 것이다.


이제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 무슨 설화가 전해지는지 들어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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