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세상
예나 지금이나 서로 다른 환경의 사람들의 관계 맺기는 결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지금처럼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하거나 부모의 승낙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지만, 옛 결혼은 남녀의 결합 이상의 의미다. 서로 다른 두 집안과 씨족을 연결시킨다. 결혼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남녀의 신분이나 부富, 미모와 품행 등이 교환가치가 있어야 했다. 결혼이라는 말보다는 교환이라는 말이 더 적합한 표현인 것 같은 예전의 결혼 방식은 대체로 여성에게는 희생이 필요했다.
결혼을 약속한 두 집안이 있었다. 양반 신분(귀족)이나 가세가 기울어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집의 딸과 양민의 집이나 많은 재산의 아들이 결혼하기로 했다. 혼사 며칠 전, 부잣집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가난한 집에서는 쉽게 파혼한다는 전갈을 보낼 수가 없었다. 결혼을 하게 되면 딸과 교환될 어느 정도의 재산이 건네 오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형편을 잘 아는 딸은 혼례식을 올리겠다고 한다. 딸은 결혼식을 하기 위해 시댁에 간다. 그리고 그녀는 한 나무 인형을 가져가서는 신랑의 옷을 입히고 초야를 보낸다. 그렇게 해서 그 집안에서 남편 없이 살다 갔다는 열녀의 이야기이자 효녀의 이야기다.
자신의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포기하고 친정의 가난을 벗어나게 했다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효녀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재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열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부종사(一夫從事)라는 것이 미덕이었던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지금도 교환가치가 있으면 정략적으로 결혼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결혼생활을 포기하고 이혼을 할 결정권을 결혼 당사자들이 가지고 있다는 점이 옛 시절과는 다르기는 하다.
교환이 끝나고 양 가족은 수평적 관계 맺기가 되지만,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되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수직인 관계가 된다. 남성우월주의의 시대가 반영된 설화에서는 여성이 남성에게 귀속되는 수직적 관계가 대부분이다. 부부의 주도권 다툼에서 여성의 패배로 끝나는 설화가 많은 것은 주로 남성들에 의해서 구전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가부장적 가치관 때문이었다.
성격이 사나운 탓에 혼기를 놓친 여자가 있었다. 아무도 그 여자의 성격을 어쩌지 못하겠다 해서 누구도 청혼을 하지 않았는데 어떤 총각이 찾아와서 자기가 그 여자와 결혼하겠다 하니 부모는 흔쾌히 수락한다.
첫날밤에 신부가 곤히 잠들자 신랑은 신부의 옷에 똥을 싼 후에(메주를 바른 후에) 신부를 깨웠다. 자신이 큰 실수를 하였다고 여기게 된 신부는 그 이후로 신랑의 말을 잘 따랐다. 아들 딸 낳고 어느덧 손주 손녀까지 생기고 화목하게 잘 살아왔는데, 어느 날 손자들과 놀아주던 할아버지는 그 일을 손자들에게 말해 주었다. 마루에서 손주에게 하는 말을 듣던 할머니가 방안에서 나오더니 남편의 뺨을 때리고는 “아이고 평생 속아 살아왔구나!” 하면서 원통해했다고 한다.
어느 정승이 며느리를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길을 가다가 갈증을 느껴 우물에서 물을 긷던 소녀에게 물을 청했다. 그러자 소녀는 물에 버들잎을 띄워 줬다. 버들잎 때문에 물 마시기 불편했던 정승이 소녀에게 왜 잎을 띄웠는지 물었다. 급하게 물을 마시면 체하기 쉽기 때문에 천천히 마시게 하려고 넣었다는 말을 듣고 지혜와 마음씨에 감복한 정승은 소녀를 며느리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소녀는 첫날밤 신랑 앞에서 방귀를 뀌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소박을 맞는다. 하지만 첫날밤에 임신을 하게 된 처녀는 아들을 낳았다. 소년이 된 아들은 친아버지의 집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지내다 정승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그러자 소년은 할아버지인 정승에게 저녁에 심어서 다음날 아침에 먹는 오이씨가 자기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정승은 소년에게 오이씨를 받아 심었지만 다음날 아침에 확인해 본 오이씨는 그대로였다. 정승은 소년을 불러 크게 혼내려 하자 소년은 방귀를 뀌지 않는 사람이 심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정승은 어처구니없어서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냐며 따진다. 그러자 소년은 자신의 어머니가 방귀를 뀌었다는 이유로 왜 쫓겨나게 됐냐고 묻는다. 그제야 정승은 다시 며느리와 손자를 집으로 불러들여 살게 됐다.
방귀 때문에 소박맞은 며느리는 두 개의 이야기가 결합된 이야기다. 앞부분의 품행과 심성 때문에 높은 지위의 남자에게 소녀의 결혼 이야기와 부도덕한 신부의 소박맞은 이야기가 더해져서 이야기가 완성된다.
겨우 방귀 때문에 소박을 맞았다는 것은 조금 과장된 이야기로 여성 행실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신부의 신혼 첫날밤과 관련된 설화들은 대개 신부의 옷이나 이불에 대소변을 실수한 것처럼 꾸며 부끄러운 행실로 남편이 주도권을 가져가게 된다. 남편이 눈 감아 주고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남자에게 권한이 넘겨가는 수직적 관계가 설정된다.
가부장제적 사회가 이유이기도 하지만 다른 원인으로는, 조혼(早婚) 때문일 수도 있다. 신랑보다 많은 나이의 신부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순결을 문제 삼기도 했다.
한 부잣집에 성질이 아주 드센 딸이 있다는 소문이 나 시집을 못 가고 있었다. 동네에 개똥 영감이라고 개똥을 주워 생활하는 사람이 있었다. 개똥 영감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영민하고 잘 생겼다. 개똥 영감의 아들은 부잣집 딸과 결혼하고 싶다고 개똥 영감에게 말 하지만 개똥 영감은 두 집안의 재산 큰 차이가 있어 중매를 설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아들은 혹시나 모르니 몇 번을 거절당하더라도 아버지가 직접 가 보라고 한다. 여러 번 그렇게 하다 보면 인연인가 싶어 허락해 줄지 모른다고 부추겼다. 개똥 영감은 하는 수 없이 아들 말에 따라 그대로 했다. 그런데 그게 통했는지 결국 결혼이 성사된다.
개똥 영감의 아들과 성질 사나운 딸이 결혼을 하게 된 첫날밤에 신랑은 자다 일어나 아내에게 지필묵을 달라고 하더니 “모심내활(毛深內闊) 필과타인(必過他人) : 털이 길고 속이 깊은 것을 보니 필시 다른 놈이 지나갔도다.”라는 글을 지어 신부에게 절개를 지키지 못한 여자라 비난하는 글을 쓰고는 신부에게 주고서 첫날밤에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러자 신부는 신랑에게 “후원황률불봉탁(後園黃栗不蜂坼), 계변양류불우장(溪邊楊柳不雨長) : 후원의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터지고 시냇가의 버드나무는 비가 오지 않아도 길게 자란다.”라는 글을 지어 자신의 정절은 확실하니 돌아오라는 편지를 신랑에게 보냈다. 신부의 편지를 본 신랑은 신부에게 돌아가 부부로서 잘 살았다고 한다.
성질이 사나운 부잣집 처녀와 결혼한 남편이 아내의 순결을 문제 삼아 주도권을 잡았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김삿갓의 설화와도 비슷하다.
김삿갓이 떠돌다 산속에 인가가 있어 찾아가 보니 두 모녀가 살고 있었다. 아비는 지체 높은 양반이나 어미가 천한 신분 때문이기도 해서 이렇게 깊은 산속에 혼사를 청해 오는 양반집이 없었다. 양갓집 규수로서 잘 배워서인지 배우지 못한 사내에 만족하지 못해서 지금껏 혼자라고 어미가 김삿갓에게 말한다. 이런저런 말을 해보니 김삿갓의 언사로 보아 신분이 낮지 않은 것 같아서 자기 딸과 혼인을 해달라 부탁한다.
김삿갓이 혼인을 허락했다는 전해 들은 딸은 학문적 깊이가 만족할 만한 배우자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김삿갓과의 대화하기를 원해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라 했다. 그렇게 김삿갓과 딸은 밤늦은 줄 모르고 대화를 한다. 딸도 김삿갓을 인정해 자신의 배우자로서 인정하고 혼사를 치르기로 했다. 그런데 김삿갓은 관계를 하던 중에 집필묵을 꺼내더니 이렇게 적어 딸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모심 내활(毛深內闊) 필과타인(必過他人)털이 깊고 안니 넓으니 이는 필시 누가 먼저 지나갔다.” 라며 처녀의 부도덕을 꾸짖는다. 그 글을 본 처녀는 객에게 하룻밤도 모자라 자신도 허락한 어머니와 자신을 모욕한 것을 원통해하며 답 글을 적으니 “후원황률불봉탁(後園黃栗不蜂坼) 계변양류불우장(溪邊楊柳不雨長) 후원의 익은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지고 물가의 수양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잘 자란다”라 했다 전해진다.
이 이야기도 신분은 양반이나 처지가 별 볼일 없는 김삿갓이 여자의 순결을 문제 삼았지만 실상 여자의 순결이 도덕과 부도덕을 가르지는 못한다는 이야기다. 당시 여성은 성적인 제약을 받아 왔음을 알 수 있다.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적 관계로 된다는 설화가 다수다. 또한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성의 능력은 칭송받는 것이 아니라 비난의 대상까지는 아니더라도 결혼생활에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능력 있는 여자에게 주도권을 잡을 방법은 정절이 중요한 도덕규범인 사회에서 부도덕함을 주장해 주도권을 얻으려 했다.
반대로 남성이 결혼을 하기 위한 경우에는 도덕적 제약을 받지 않았다. 결혼이 부계의 자손 잇기는 방법이라면 비도덕적이라 해도 허용된 것이다.
1.
가난하고 천한 신분의 부부에게 게으른 아들이 있었다. 하루는 어머니에게 쌀을 빌려오게 한 뒤에 쌀을 팔모(八貌, 여덟 면)로 잘라내 색시를 구하러 나갔다. 부잣집을 찾아가 하룻밤 묵을 것을 청하고 팔모로 잘라낸 쌀을 건네주며 이런 쌀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말한다. 집주인은 그런 쌀을 보고는 이런 진귀한 쌀만 먹는 것은 큰 부잣집이 아닐 수 없다며 게으른 아들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아들은 부자 색시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살았다.
2.
가난하고 천한 신분의 노총각이 정승 집 딸을 아내로 삼고 싶어 꾀를 부렸다. 자신의 노모에게 무조건 정승 집으로 가 사돈을 맺을 것을 간청하라고 하였다. 크게 노한 정승은 노모에게 똥 바가지를 퍼부으며 쫓아냈다. 밤중에 아들은 큰 새를 잡아 정승 집 마당의 나무 위에 올라가 신(神) 인척 연기를 했다. 겁에 질린 정승에게 자신의 집과 사돈을 맺으라고 한 뒤에 새를 날려 보냈다. 정승은 하늘을 노하게 할 수 없어 자신의 딸을 총각에게 시집보냈다.
3.
살림이 가난해 장가를 못 간 노총각이 이웃에 사는 부자 과부에게 장가를 가려 아버지와 계획을 세웠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몽둥이를 들고 아들을 쫓아다니며 장가를 가라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에게 쫓기는 척하면서 총각은 부자 과부의 집에 들어가 자신을 숨겨달라고 한다. 과부는 식사를 차려주고 총각을 타이르며 장가를 가라고 말하자 총각은 장가가는 법을 모른다며 그 방법을 알려달라고 한다. 과부가 혼례 예식에 관해 상세히 알려주자 이번에는 첫날밤을 보내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두 사람은 결국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되었고, 총각은 부자 과부를 아내로 얻을 수 있었다.
4.
한 노총각이 어느 부잣집에 우연히 들러 그 집의 남자가 그 고을의 어여쁜 과부를 보쌈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 과부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하룻밤 자게 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고는 여장을 하고 잠을 자게 되었다. 사람 둘이 과부의 방에 들어오더니 여장을 한 총각을 보쌈 해 데려갔다. 부잣집 남자는 보에 든 사람이 과부인 줄 알고 총각에게 다음날 혼사를 치르겠다고 말한다. 날이 밝는 대로 준비를 해야 하니 자기 여동생 방에 들어가 잠을 자게 했다. 총각은 자고 있던 여동생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어 총각은 부잣집 아내를 얻어 잘 살게 되었다 한다.
5.
어느 정승이 자신의 아들에 관해 점을 치게 했다. 그러자 점쟁이는 젊어 요절할 팔자이며 그것을 피할 방법이라며 부적 하나를 주었다. 정승은 그것을 가지고 있다가 아들이 이제 결혼하게 되면 요절은 피하겠거니 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부적을 건네주며 그 부적의 사유를 일러 주었다.
아들에게 결혼상대로 적당한 처녀가 있어 결혼을 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 처녀는 정승 때문에 아비가 죽게 된 원수 집안의 딸이었다. 첫날밤 처녀는 신랑을 죽이기 위해 칼을 몰래 가져갔다. 신랑은 오늘이 지나면 요절은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만 뭔가 불안해 부적이 들어있는 봉투를 열어보니 봉투 안에서는 부적에 “여자를 강제로 범해라”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그래서 신혼 방에 들어가자마자 관계를 가졌다. 처녀는 이렇게 하룻밤을 자게 된 것도 인연이라 생각하고 신랑을 죽이지 않고 잘 살았다고 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김진국 대감의 황천 꽃밭에서 생명 꽃을 얻으려던 제주의 자청비 설화를 변형시킨 이야기다. 조선 시대의 성범죄, 특히 청소년 성범죄는 역모와 살인 같은 중죄가 되는 시대였다. 세종실록을 보면 "사노(私奴) 김봉(金奉)이 열한 살의 소녀를 강간하였고, 영광(靈光)의 죄수 유인(劉仁)은 사람을 때려죽였사오니, 율이 모두 교형(絞刑, 지금의 교수형)에 해당합니다."라고 고하며 둘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성희롱에 대한 처벌도 중형에 처해졌었다. 장형 40대에서 80대와 관직에 있는 자는 관직 삭탈과 유배까지 가게 된다. 앞서 설화들은 관아에 알려지게 되면 처벌을 받았다. 그래서 다섯 개의 설화들은 실제 있었던 사건이라기보다는 남성들 사이에서 성적 농담으로 구비전승(口碑傳承)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판단으로는 사기결혼이라 할 만한 설화들이 많다. 남자의 부도덕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대자자인 남성들 사이에서는 억지 관계 맺기가 심정적으로 허용되었을 것이다. 또 가부장제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 부자에게 가난한 친구가 찾아와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느냐고 그 비결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부자 친구는 자신의 집에 가난한 친구를 초대한다. 가난한 친구가 찾아오자 부자 친구는 자신의 아내에게 속옷만 입게 했다. 외간 남자 앞이라 거절할 것 같았으나 아내는 남편의 말을 따라 속 옷차림으로 이리저리 집 안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다음엔 아들에게 소를 지붕 위에 올려놓으라 말한다. 아들도 아버지의 말에 아무런 말 없이 소를 지붕 위에 올리려 했다. 그런 다음 부자 친구는 가난한 친구에게 집에 돌아가 똑같이 해보라 말한다. 가난한 친구는 부자 친구를 초대해 그대로 아내와 아들에게 시켰으나 아내와 아들은 아버지가 미쳤다 하며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부자 친구는 자신의 방식대로 집안을 다스려야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한 집안의 부는 가장의 권위에서 창출된다는 이야기다. 권위와 부가 직접적인 연결이 되지 않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부부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당시의 인식을 알게 해준다. 남성의 노동력에 절대적으로 의지했던 농경시대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남성이 노동력을 상실했다 하더라도 가장은 죽을 때까지 권위를 잃지 않는다. 그래야만 남성에서 남성으로 권위가 계승되는 사회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효행은 그 가족의 규범성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게 된다.
효孝가 윤리적 문제이기는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가부장제를 지속시킬 수단과 같이 강조되었다. 효행은 생성과 소멸의 자연섭리처럼 생각하게 하려 자연이 호응해 준다는 설화도 있다.
1.
어느 마을에 효심이 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떤 약을 써도 낫지 않는 병중인 시어머니 때문에 근심하던 어느 날 한 대사가 이들의 집으로 찾아와서 며느리가 대사에게 방법이 있겠느냐며 물으니 대사는 어린 아들을 삶은 물을 시어머니께 드려야 병이 나을 것이라 했다. 부부는 고민하다 아들을 삶아 드리기로 했다. 부부는 절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아들을 잡아 가마솥에 넣고 삶은 물을 어머니께 드리자 병이 깨끗이 나았다. 부부가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 그런 때에 죽였다고 생각한 아들이 책을 끼고 집으로 들어왔다. 부부는 가마솥을 열어보니 동자삼(童子蔘)이 들어있었다.
2.
홀어머니(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효자가 있었다. 매우 가난하였지만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이가 어머니의 음식을 뺏어 먹는 것을 보고 아내와 상의 끝에 죽일 것을 결심한다. 부부는 밤이 되자 아이를 데리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아이를 묻으려 땅을 파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그저 부모들이 하는 일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부부가 한참을 파 내려가다가 땅 속에서 작은 석종(금은보화, 방울, 징)을 발견한다. 부부는 아이를 죽이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아이와 석종을 가지고 집에 돌아온다. 석종을 울리니 그 소리가 청아하고 아름다워 소문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임금은 부부를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 부부에게 큰 상을 내려 효심이 지극함을 칭찬했다.
3
한 효자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침을 거르고 일하다 보니 배가 고픈데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아내가 새참을 가져오지 않았다. 조금 늦게 아내가 새참을 머리에 이고 와서는 내려놓으니 남편은 왜 이리 늦었냐며 화를 냈다. 그러자 아내는 늙은 시어머니 점심을 차려 드리려니 찾아뵈니 시어머니 하는 말이
"이 고얀 것들 같으니 마당에 그리 통통한 닭을 키우면서 지들만 먹으려고! 그래서 내가 닭을 잡아 솥에 삶는 중이다 이것들아!"
며느리가 부엌에 들어가 솥을 열어보니 이제 갓 낳은 자기 아들이 죽어 있어 며느리는 아들의 시체를 뒷산에 묻고 다시 옆 집(마당)에 가서 닭을 구해와 어머니께 점심을 차려드리고 오다 보니 늦었다고 남편에게 말한다.
남편은 자신의 어머니 잘못을 탓하지 않고 그렇게 해 준 아내에게 고맙다며 절을 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절하자 아내도 따라 절을 했다. 남편이 일어서 보니 아내가 자신에게 절을 하고 있어 다시 남편도 절을 아내에게 절을 하면 다시 아내도 자기에게 절을 하고, 이렇게 절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어느 지나가는 객(어사 박문수)이 보고 그 부부를 찾아가 무슨 일인지 물으니 부부는 사연을 이야기했다. 객이 관아에 알리자 나라에서는 효행이 기특해 큰 상을 내렸다 한다.
세 번째 이야기는 의령의 곽씨 부부에 관한 효행 설화다. 효행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이해되기 어렵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를 따로 떼어서 생각하자면 조금 섬뜩한 이야기이지만 이렇게 순서대로 나열해 보자면 세 번째 이야기가 완성된 형태의 이야기다. 나라에서 인정하는 효자인 의령 곽씨의 효행을 과장한 것이다.
의령에서는 효자 곽씨 부부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기 때문이다. 아내가 늦은 이유가 시어머니가 자식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시부모가 대낮에 사랑을 나누는 것을 보게 된 며느리가 시부모의 금슬을 위해 닭을 잡아 점심을 차려 주었다는 이야기다. 시부모를 위해 닭을 잡아 점심을 차려준 이야기가 더 사실과 가깝게 생각된다. 어느 것이 사실에 가까운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화자와 청자의 둘 사이에서 재미의 극대화를 위해 상황에 맞게 변형했을 것이다.
자손을 이어야 하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생활은 부부관계에서 중요하다. 애정 넘치는 부부들은 자녀가 많이 생겨 아이들을 피해 둘 만의 시간을 내기 쉽지 않다. 아이들을 피해 관계를 가지려는 부부의 성관계에 관한 해학적 설화가 많다.
1
예부터 전해오는 말에 정월 초하룻날 아침의 새 울음소리로 그 해 농사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비둘기가 울면 콩 수확이 많다고 하고 참새가 울면 벼농사가 잘 되고, 까마귀나 까치가 울면 과일이 풍년이라고 생각했다.
부부의 정을 나누고자 아이에게 집 밖에서 무슨 새가 우는지 들어보고 오라고 집 밖으로 내보냈다. 부부의 정을 나눈 뒤에 한참 있다 들어온 아이에게 무슨 새가 울었나 물어보니 아이는 새소리를 듣지 못해 올 해는 농작물이 풍년이 아니라 자식농사가 풍년 이겠다고 말했다.
2
아주 가난한 부부가 아이들을 많이 낳았지만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다. 아이들 때문에 부부의 정을 나눌 기회가 없자 부부는 시간을 만들려 했다. 남편이 아이들이 깊이 잠에 빠져 있을 때 집에 돌아올 테니 돌아온 기척이 있거든 자기가 방벽에 붙어 아내를 찾을 테니 아내도 그때 방 벽에 붙어 아이들을 건드리지 않고 둘이 만나자고 계획했다.
해가지고 남편이 돌아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남편이 돌아온 것을 느낀 아내가 조심스레 방 벽에 붙어 남편을 찾기 위해 살살 기어갔다. 그런데 부부가 같은 방향으로 기어 돌고 있어 좀처럼 만날 수 없었다. 만날 때까지 계속 기어가는 도중에 아내가 그만 아이의 손을 밟게 되었다. 그러자 고통을 참지 못한 아이가 “아이고, 내 손가락 깨지네”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아들이 “둘이 만나려면 하나는 이쪽으로 가고 다른 하나는 저쪽으로 기어야 만나지. 둘이 같은 방향으로 기어 만날 수 있어?”라고 말한다. 그러자 다른 아들이 손가락 밟힌 아들에게 하는 말이 “야 이놈아, 네가 소리만 안 질렀으면 날 샐 때까지 2백 바퀴 돌았을 것인데, 이제 겨우 36바퀴만 기고 말았잖아”라고 말했다.
금슬(琴瑟) 좋은 부부의 이야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에도 사별이나 이혼으로 혼자가 되면 재혼을 하게 된다. 그래서 새어머니와 전실 부인의 자식과 갈등이 발생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계모는 법적, 사회 규범적으로 친 어머니와 다를 바 없이 생각했다.
실록을 보면, 현종 8년에는 병자호란으로 청에 끌려간 아내와 이혼이 허락되고 재혼해서 그 호적에 친모가 아니라 계모의 친가 쪽으로 편입되었으니 생모의 허물이 자식에게 이르지 않는다 기록하고 있다. 또 현종 10년에 계모가 간음을 한 일로, 그 아들이 계모를 결박하여 관아에 고발한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계모는 간음의 죄를 묻고 그 아들 또한 어미를 결박한 패륜의 죄를 물었다. 또 세종 때는 계모를 구타한 자를 참형(斬刑, 목을 베어 죽임)에 처하게 했다.
태종 때에는 계모의 상을 당하여 분상(奔喪, 상의 소식을 접하고 급히 집으로 돌아감) 하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파직을 당하기도 했으며, 숙종 때는 계모(繼母)를 내쫓아서 윤기(倫紀, 윤리와 기강)의 죄로 높은 벼슬을 얻지 못하게 됐다.
법률적으로 친모와 같기는 하지만 가족 내에서의 인연은 생모와는 다르다. 세종실록을 보면,
『계모가 아비가 없는 틈을 타서 다른 사람과 사통(私通)을 하였으므로, 만진이 그 아비의 통서(通書)를 받아 가지고 그 계모를 포박한 후 옷을 벗기고 머리털을 잘랐습니다. 계모란 의리로 봐서 친어미와 같다 하겠으나, 만약 아비를 배반하고 음행을 하였다면, 그 아비와는 의가 끊어진 것이니 곧 다른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만진이 비록 제 마음대로 포박했다 하여도 그 죄가 죽기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그 아비의 명령으로 잡은 것이니 어버이를 구타한 죄율로는 견줄 수가 없는 것이니, 청하옵건대, 만진을 석방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계모는 결혼 당사자인 아버지와의 관계가 중요했다. 설화에서는 자식 없이 홀로 과부가 된 여인들은 자유롭게 재혼을 할 수 있었지만 자식이 있으면 수절하여 아이들을 잘 성장시켜야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계모 설화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자식이 딸린 계모의 문제였다. 설화에서는 본처 소생보다 계모가 낳은 자식을 편애해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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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아이들을 남겨 놓고 죽자 재혼을 한다. 계모는 전실 자식들이 미워 구박을 했다. 어느 날 계모는 아이들에게 논을 매라고 시킨다. 아이들은 논을 다 매고 집으로 돌아오다 잠깐 쉰다는 것이 나무 아래에서 잠이 들었다. 계모는 이것을 보고 아이들이 시킨 일은 하지 않고 잠만 잔다며 계모라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남편에게 가서 말한다. 그러자 화가 난 남편은 자는 아이들에게 가 아이들을 야단친다는 것이 그만 아이들을 죽이게 된다. 그러자 하늘에서 새 두 마리가 날아가면서 일을 끝내고 잠이 들었는데 자신들을 죽였다며 야속하다고 말하고 하늘로 날아갔다. 그 말을 듣고 논에 가 보니 새의 말대로 일을 마치고 잠이 들었던 것을 알게 되자 아버지는 “본실 자식 있거든, 후처 장가 가지 말라”라고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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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잃은 콩쥐의 아버지가 재혼을 했는데 계모에게는 딸인 팥쥐가 있었다. 팥쥐만 편애할 뿐만 아니라 콩쥐를 구박했다. 하루는 계모가 팥쥐에게는 쇠 호미를 주고 콩쥐에게는 나무 호미를 주면서 밭을 매라 했다. 팥쥐는 대충 밭을 매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혼자서 밭을 매다가 나무 호미가 부러졌다. 어떻게 할지 몰라 울고 있던 콩쥐에게 소가 오더니 콩쥐 대신 밭을 매어 주고 소는 어디에서 따온 과일을 한 아름 주고서 사라졌다. 콩쥐가 집에 돌아와 보니 집 문이 닫혀있었다. 팥쥐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하지만 들은 체도 안 했다. 그래서 콩쥐는 소가 준 과일을 모두 주겠다며 열어달라고 하니 그제야 문을 열어줬다.
마을 한 집에 잔치가 있는데 팥쥐만 데려가면서 콩쥐에게는 베를 짠 뒤에 벼를 찧고 밑 빠진 독에 물을 가득 채운 뒤에 잔칫집에 가게 했다. 많은 일들을 다 할지 생각하니 막막해서 콩쥐가 울고 있자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베를 짜주고 새 떼들(참새)이 날아와 벼의 껍질을 다 벗겨주었다. 깨진 독은 두꺼비가 구멍을 막아 주어 물을 채우게 되자 콩쥐에게 선녀가 옷과 신발을 주어 그것으로 갈아입고 잔칫집에 가게 됐다.
잔칫집에 가는 도중에 콩쥐는 그만 강을 건너다 신발 한 짝을 빠뜨렸는데, 지나가던 원님이 그 신발을 주었다. 신발의 주인을 찾아 원님은 고을 처녀들에게 신겨 보니 콩쥐의 발에 딱 들어맞았다. 콩쥐는 원님과 결혼을 하게 됐다. 이를 시기한 계모와 팥쥐는 콩쥐에게 물놀이를 하자고 꾀어내어 연못에 빠뜨려 죽였다. 팥쥐는 콩쥐 행세를 하며 원님과 살아가게 되었다. 어느 날 원님이 연못에서 꺾어 온 예쁜 연꽃을 팥쥐가 아궁이에 버렸다.
이웃의 할머니가 불씨를 얻으려 왔다가 아궁이에서 구슬을 발견해 집으로 가져오니, 구슬은 콩쥐로 변하여 할머니에게 말 하기를 원님을 모셔다가 식사대접을 하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상에 젓가락을 짝이 맞지 않게 올려놓게 한다. 할머니는 콩쥐의 말대로 불씨를 얻게 해 준 보답으로 원님에게 식사 대접을 하겠다며 집에 초대한다. 원님이 젓가락 짝이 맞지 않는다고 할머니에게 말하자 구슬에서 콩쥐가 모습을 드러내며 “젓가락 짝이 맞지 않는 것은 알면서 아내가 바뀐 것은 왜 모르냐!”라고 말한다. 원님은 깜짝 놀라 분명 자신의 아내 콩쥐인 것을 알아차린다. 모든 전말을 알게 된 원님은 팥쥐를 죽여 팥쥐 엄마에게 보낸다. 죽은 팥쥐를 본 팥쥐 엄마는 놀라 죽었다.
결혼이나 재혼으로 새로운 가족이 되는 것은 예부터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계모 설화에서는 갈등의 당사자가 죽는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본실 자식이 있거든 후처 장가들지 마라”라는 남편의 탄식을 통해서 재혼을 쉽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혼에서는 배우자의 조건이 상반되더라도 일단 결혼을 하면 서로 관계의 조정이 되어 갈등이 해소가 된다. 빈부와 신분의 격차도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관계 조정이 된다. 하지만 재혼은 갈등의 해소가 무척 비극적이다.
실록을 통해서는 계모와 전실 아들의 다툼이 많다. 계모의 행실을 문제 삼아 아들이 관가에 포박해 데리고 가거나 간음했다는 거짓 소문을 내기도 한다. 아버지의 재산에 대한 다툼도 많았다. 그런데 설화에서는 유독 계모와 전실 소생의 딸 대결이 많다. 두 번째 이야기인 콩쥐 팥쥐에서처럼, 계모 설화에서는 선과 악의 대비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설화에서 계모는 대부분 악인으로 등장해 관계의 단절로 끝이 난다.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이 아닌 법적, 사회제도적 관계는 언제든지 단절될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계모 설화에서 결여된 부분은 중재자다. 어느 가정이나 갈등이 발생할 수 있지만 갈등 해소를 위해서는 중재자가 필요하다. 형제간의 다툼은 부모가 중재자가 되는데 계모 설화에는 중재자의 역할을 찾아보라면 아버지다. 갈등의 원인 제공자이면서도 중재자 역할을 하지 않는다. 갈등이 최고조에 달해야 알아차리는 정도다. 그렇다고 해결 방식도 썩 좋은 것도 아닙니다. 계모 설화는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가장을 탓하는 설화일 수도 있다. 다른 계모 설화를 좀 더 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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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사별하여 후처를 맞아들였는데, 후처는 자신이 낳은 친자식에게 집안의 재산을 물려주려 전처 아들을 죽이기로 생각했다. 전실 아들이 장가 간 첫날밤에 그를 죽이면 많은 재산을 주겠다며 종에게 전실 아들 죽이게 한다. 첫날밤에 종은 아들을 죽이고 신부가 한 것처럼 꾸민 뒤에 재산을 받아 도망간다. 아들을 죽였다는 누명을 쓰게 된 며느리는 시집의 구박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하여 방랑생활(남장의 장수)을 하던 중에 우연히 그 종을 보게 된다. 어쩌다 한 방에서 자게 되었는데 그 종이 잠을 자면서 신랑을 자기가 죽였다는 잠꼬대를 듣게 된다. 며느리는 이 사실을 시아버지에게 말하여 누명을 벗게 된다. 시아버지는 며느리에게 많은 재산을 주어 개가시킨 뒤에 후처와 후처의 자식들을 방에 가둔 후 집에 불을 지른 후 절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고 합니다. (혹은 며느리가 낳은 손자가 절로 찾아와 시아버지를 모셔와 잘 살았다.)
사명당 유정(1544 -1610)의 출가 유래담으로 알려져 있는 설화다. 훌륭한 종교인이더라도 그만큼 화목한 가정을 이루기가 쉽지 않고, 재혼했을 때에는 가장이 중재자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설화다. 가족의 갈등 문제는 가장이 해결하게 되는데, 계모의 계략에 딸을 내쫓기도 하고 계모의 악행이 발각되면 쫓아내거나 죽이는 것으로 해결하게 됩니다. 그만큼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장의 권위는 막강함에도 중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반영한다.
그런데 설화가 소설로 쓰이면 흥미를 더하기 위해서 갈등 해결 방식이 달라진다. 콩쥐∙팥쥐는 배우자인 원님이라는 공적(公的)인 방식으로 해결하기도 하는데 장화∙홍련 전이 그렇다. 콩쥐팥쥐와 장화홍련전은 어느 민중 설화보다 완성도 높은 서사구조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야기가 만들어진 이유에 대한 가설은 다음의 세 가지다
1. 실제 사회상을 반영했다
2. 국가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3. 토착신앙인 무속의 서사무가를 토대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첫 번째. 실제 조선은 전쟁을 거치며 이혼이 많이 이뤄졌다. 이혼이 쉽지 않았지만 정절을 지키지 못한 아내와의 이혼을 쉽게 해 달라는 상소문이 올라와 선조는 허락했다.
두 번째, 왜란과 호란을 겪으며 국가의 권위가 낮아지자 이야기의 힘이 커다란 영향을 주던 당시에 다시 국가 권위의 회복이 필요했던 시기에 이야기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많은 여성들이 왜와 청으로 끌려가거나 군인들에게 몹쓸 짓을 당한 여인들에게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혼이 가능하게 됐다. 수많은 가정에서 이혼이 이루어 졌고난難으로 신뢰와 기능을 상실한 국가체제를 재정립하기 위해서 가장의 역할보다는 국가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으려 했을 가능성도 있다.
세 번째, 토착신앙의 서사무가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를 가져온 이야기라 생각되기도 한다. 계모 설화와 소설에 등장하는 가족 구성원을 보면 조부모(할아버지, 할머니)가 등장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핵가족화된 사회가 아니고 대가족을 이루며 살던 시대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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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여수 문촌의 황공(黃功) 이 간신의 모함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내려와 살게 되었다. 부인이 늦게 딸을 낳으니 월선(月仙)이라 이름 지었다. 하지만 부인은 월선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었답니다.
그러자 황공은 근처에 살던 박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였습니다. 박씨는 간악하고 교활하여 월선을 학대했다. 박씨는 아들 월룡(月龍)을 낳았는데 어머니와 달리 마음이 어질고 착했다. 누이인 월선을 위해 어미인 박씨의 학대를 막아주기도 했다.
이러한 때에 황공의 모함이 풀려 왕이 중국 사신으로 보낸다. 황공이 없는 틈을 타 계모 박씨는 월선을 집에서 쫓겨내기 위해 시비 춘섬을 시켜 죽은 강아지 가죽을 월선의 이부자리에 넣고 낙태했다는 모함을 한다. 갖은 학대를 막아주던 월룡은 누이 월선에게 아버지 돌아오실 때까지 피해 있으라 한다.
월선은 집을 나와 어느 노파를 의지하며 살다가 그 노파의 이종동생의 아들과 혼인하게 된다. 황공이 집에 돌아오자 박씨는 월선이 낙태한 것이 들통나 집에서 도망갔다 말하지만 시비 춘섬은 박씨가 모함하려던 것을 폭로하자 황공은 박씨를 내쫓고 딸 월선을 찾아 나선다.
월룡은 월선을 찾아다니다 월선의 남편이 급제하여 여수 군수가 되어 갔음을 알고 누이와 상봉하게 된다. 월룡과 매부, 그리고 월선은 아버지를 찾아가니, 황공은 기뻐하고 월룡의 청을 들어 어머니 박씨를 집에 다시 들이게 되었다.
황월선 전이다. 장화∙홍련 전에서 계모가 쥐의 가죽을 장화의 이부자리에 넣은 것과 모함하는 방법이 비슷하다. 하지만 가족 갈등의 해결은 장화∙홍련 전이 비극적 결말이지만 황월선전은 희극적 결말이다. 장화∙홍련 전에서 장화와 홍련이 죽임을 당하게 되고 결국 계모도 능지처참당한다. 콩쥐팥쥐, 황월선 전을 보면, 콩쥐를 부활시켜주고 황월선 전에서 노파의 도움을 받는다. 이 두 노파의 등장은 이후 서사무가와 동화의 재해석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토착신앙적 재생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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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공적인 형벌을 통해서 계모가 죽게 되면서 행복한 결말이 된다. 가족이 되기 위해서 많은 문제들이 있고 다양한 방법으로 풀어내려 했다는 점에서 가정문제는 예부터 사회적인 문제였다.
새로운 가족 구성원에서도 그렇지만, 기존의 가족 구성원에서도 갈등이 있다. 형제 다툼이다. 외부의 도움으로 해결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형제의 뉘우침을 통해 내적으로 해결된다. 놀부의 처를 제외하고 대체로 설화에서는 여자 동서들이 화해의 역할을 했던 설화들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