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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태양 아래

설화를 통해 영화 만들기

by 꼭그래

서사무가에 앞서


토착신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앞서 굿에 관해서 간략하게 알아봤다. 좀 더 자세하게 정리한 글이 있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현재 한국의 무속은 사이비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상한 굿과 과도한 복채들이 문제가 되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 무속의 외형을 가져다 사기행각을 일삼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릉 단오제 보존회의 무녀와 악사들처럼 우리 토착신앙의 원형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세습무들도 있다. 또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도 그 역할을 하시는 분들, 대관령 산신제와 성황제를 올리던 강신무들과 같이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음지에서 무속을 보존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 서사무가 신화의 세계에 들어가고자 한다. 토착신앙이었던 무속의 특징을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무속에는 다양한 세계관이 반영되고 있다. 도교, 불교, 유교, 그리고 전통적 세계관까지 포괄적이다. 어느 세계관이 이 땅에 들어오면 기존의 세계관이 폐기되지 않고 다른 세계관을 수용하는 방식이다. 우주관은 도교적이며, 사후 세계관은 불교적이며, 산천이라는 삶의 공간은 무속적이며, 만물의 작용과 인간관계는 유교적이다. 지금은 무속과 극하게 대립하고 있는 기독교의 세계관도 무속은 수용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기독교 세계관에 갇혀 지내던 유럽인들은 르네상스 시절에 다시 그리스 로마 시대의 세계관을 다시 찾게 됐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과 음악, 건축들은 그리스 로마시대를 새롭게 재 창조했다. 특히 소설과도 그렇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작가들은 옛이야기 방식을 가져와 르네상스를 빛냈다. 이 글은 서양인들이 그리스 로마의 신화를 찾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 신화와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쓰고 있다. 현재도 유럽인들은 그들 신화를 소설과 영화를 통해서 끊임없이 재 창조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0여년 후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1927년 소설 사탄의 태양아래가 쓰여졌다. 르네상스시대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재 해석했다면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성경의 신화를 인간의 선악을 다룬다. 영화는 2차 세계대전과 91년 냉전의 종식 직전 인간에 관해 기독교적 관점에서 묻는다. 인간에 의해 믿어졌던 것들이 무너졌던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가를 영화는 묻는다.


사탄의 태양 아래(Under the Sun of Satan),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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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사탄의 태양 아래>는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동명소설을 모리스 피알라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이다. 그래서 감독과 원작자들의 세계관이 어떠했는지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조르주 베르나노스(1888 – 1948)

1888년 프랑스 파리 태생의 작가다. 대체적으로 그의 작품은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와 그가 죽기 직전에 쓴 <카르멜 수녀들의 대화>는 기독교 문학가로 알려져 있다. <사탄의 태양 아래>도 어느 사제의 일화를 통해서 종교에 관한 이야기다.


모리스 피알라 (1925 – 2003)

모리스 피알라도 1925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했다. 화가이자 배우인 그는 어린 시절부터 카메라로 다큐멘터리를 찍기는 했지만 젊은 시절에는 화가로서 성공하고자 했다. 하지만 1955년부터 연극 조감독과 배우로 활동했다. 1960년 <사랑은>이라는 단편 다큐멘터리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수상하고서 장편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대개 인간의 존재와 사회에 관한 영화다.


줄거리


신학대학 동급생 중에서 성적이 좋지 않은 졸업생 도니산(제라르 드파르디외)은 사제 므누 스그레(감독 모리스 피알라)의 요청으로 부제로 선택된다. 므누 사제를 찾아간 도니산은 자신이 받아들이기에는 부족하다며 수도원에 돌아갈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므누 사제는 가장 열등한 학생을 요청했고 그 열등함은 다른 신성함으로 채워진 것이며 그것을 증명할 기회를 주기를 간청한다. 도니산은 부제직을 수락한다. 므누 사제의 요청으로 은퇴한 사제를 만나보러 길을 떠난다. 먼 길을 걸어가다 탈진한 도니산에게 악마가 나타나 인간 내면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주고 사라진다. 그리고 그가 찾아간 곳에는 은퇴한 신부가 아니라 한 소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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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소녀는 한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고 있던 소녀는 총으로 그를 쏘아 죽였다. 그리고 검시관 의사와 다시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도니산은 소녀의 내면의 진실을 본다. 그리고 그녀의 참혹한 앞날을 예견한다. 소녀는 집으로 돌아와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을 한다. 도니산은 소녀를 성당으로 데려가 상처에 키스하며 신께 살려달라 기도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은 마을의 신부로 부임한 그에게 자신의 아들이 뇌염으로 죽어간다며 어떤 남자가 찾아온다. 아들의 죽어가는 모습을 보던 아이의 엄마가 도니산을 찾아갈 것을 원했다 한다. 하지만 아이는 이미 죽었다. 아이의 엄마가 도니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하지만 도니산은 아이의 방에 끝내 들어가지 않는다. 밖에 나와 다른 신부에게 자신의 능력은 사탄이 준 능력이라서 사용할 수 없다고 말을 하지만 아이의 엄마를 생각해 보라는 어느 신부의 말에 따라 아이의 방에 들어간다. 아이의 고통을 대신 받겠다며 신에게 요청한다. 아이는 깨어나고 도니산은 성당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성당 고백실에서 므누 신부에 의해 도니산은 죽은 채 발견된다.


영화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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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장면이다. 교회에서는 이 장면을 지금은 십자가를 예수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십자가에는 예수라는 성자의 상징과 죄인이라는 사실이 담겨있다. 기독교에서는 종교적 상징으로서 성자와 관련해 생각한다.


<사탄의 태양 아래>는 관객에게 묻는다. 성자인가 죄인인가, 아니면 그 둘 모두 가진 어떤 존재인가로 볼 수 있느냐의 물음이다. 예수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는 일화를 차용했다. 예수가 사탄의 시험에서 승리했다면 도니산이라는 젊은 사제를 통해서 만약 예수가 사탄의 시험에서 졌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의문을 통해서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이 뒤엉킨 것에 관한 이야기다.


자학과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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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니산의 자학적 신앙의 형태를 보면 상반된 것이 결합되어 있다.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간절함으로 자신을 학대한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적 모습이 동시에 구현되는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도는 또 어떤가? 기도와 고백은 악의 구현을 선의 의지로 사함을 받으려는 악과 선의 결합된 것이 기도라는 의문을 제시한다.

사디즘 : 타인에게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고통을 주고 성적인 만족을 느끼는 병적인 상태

마조히즘 : 타인에게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성적인 만족을 느끼는 병적인 상태


소녀의 부적절한 성관계 대상인 남자를 죽이는 것에서도 상반된 것이 결합되어 있다. 새벽 다섯 시에 남자를 죽인다. 자신이 죽인 남자의 검시관이었던 의사와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간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숫자 5라는 것은 십계명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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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 시(정확히는 4시 55분)는 “5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으로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 아니면 부모를 위해 사랑하는 남자를 죽이는 것이 옳은 것인가. 또 검시관이었던 의사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는데, 의사와 있을 때에는 시곗바늘이 숫자 5와 7에 있는데 앞서의 해석대로라면 “7 간음하지 말라”라는 계명이다. 하지만 이 남자를 죽이지는 않는다. 유부남인 남자를 죽이지 않으며 지속적으로 간음하게 하는 것이 선인가의 물음이다.


은총과 저주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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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이를 살리는 것 또한 사탄에게 받은 능력으로 도니산에게는 저주이자 아이에게는 은총의 능력이다. 사탄에게 받은 능력으로 아이를 살려 내자 도니산을 성자로 추앙한다. 사탄의 능력인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가 고백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신을 모독하는 행위가 된다. 인간의 내면에서 선과 악을 확실히 구분해 낼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으로 영화는 가득하다.


음악조차 없다. 음악이라는 것이 신을 위한 제의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영화음악이 없다는 점에서 영화는 신이 아닌 인간에게 던지는 이야기다.


그런데 도니산은 최후에 신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긴다. 사탄이 지배하는 태양 아래에서 그는 죽어 신의 곁으로 간다. 이것이 구원인지 저주인지 관객의 판단에 맡기면서.

6.png 성스럽거나 혹은 아니거나

이처럼 기독교 신화인 예수 신화를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성경 속 신화들을 새로운 이야기로 영화화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신화의 처지를 보자면 어린아이들이 읽는 동화에 갇혀있다. 무속적, 사이비적이라는 생각에서다. 이 글은 무속의 신화를 다루지만 외형인 무속을 먼저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래야 내부의 이야기를 옳게 끄집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한국의 굿


굿


초월적 세계의 존재자인 신을 현실세계에 불러와 사람들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제의를 굿이라 한다. 목적에 따라 불러오는 신이 달라 굿의 종류도 나뉜다.


국무(國巫) : 나라굿이라고 하는 국무는 왕가의 주문에 따라 행해지던 굿. 고려의 태조가 무속을 권장해 당시에

가장 많은 무속 제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려 중엽 유교의 유입 이후 국무는 쇠퇴하게 됩니다.


천존굿 : 가뭄이 들어 국가나 지역 공동체가 비를 구하는 굿.


풍농굿 : 보통 땅보다 조금 높게 흙을 쌓아 그곳에서 풍농을 위해 지신에게 하는 굿.


용신굿 : 풍어를 위해 강이나 바다에서 배를 타고 용신을 위해 하는 굿.


도당굿 : 마을 공동체를 위한 굿. 마을의 특정 제단이나 무당의 당집에서 한 해 걸러하는 굿.


성주굿 : 가옥 신인 성수신에게 집안의 화평과 남아 출산 등을 비는 굿.


병굿 : 손님굿, 우환굿이라고 하기도 하며 푸닥거리라고도 합니다. 잡귀를 잘 대접해 물러가게 해 집안의 크고 작은 우환과 질병을 물러가게 하는 굿.


마마 배송 굿 : 천연두, 속칭 마마를 물러가게 하는 굿.


진오기 굿 : 오구굿, 씻김굿이라고 하는 망자를 위한 굿. 빈부와 신분에 따라 규모가 달라집니다.


여탐굿 : 환갑이나 결혼, 출산, 과거급제 등 집안의 기쁜 소식을 조상에게 알리는 굿.


허주 굿 : 신병을 앓는, 무당이 될 조짐이 있는 사람에게 하는 굿


천신굿 : 부유층의 지원으로 계절 과일을 바치며 재수를 기원하는 굿.


무당(무녀와 박수)이 무복(巫服)을 입고, 무악(巫樂)에 따라 무가를 부르고 춤을 추며 신이 무녀의 몸이나 특정 공간에 내려오게 하는 의식을 청배 굿 혹은 청신 굿이라 한다. 청배 굿과 청신 굿으로 강신무는 자신의 몸에 세습무는 굿당으로 신을 불러온다. 그러면 축원자는 무당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해준다.


강신무의 경우에는 축원자와 신이 직접 만나는 방식이다. 세습무의 굿은 축원자의 사정을 무당이 흰 종이에 축원자의 사연을 담아 불에 태워 신에게 대신 전달한다. 무녀에게서 전달된 메시지가 신에게 도달해 실현시킬 것을 약속하면서 끝나는 제의 의식은 끝난다. 단오제와 같이 지역공동체 모두가 참여하는 제의에서 주요 굿 전체를 하는 굿을 큰 굿이라고 한다. 마을이나 가정에서 하나의 굿을 정해하는 굿을 작은 굿이라 한다.


신석기시대부터 행해져 오던 굿은 제정일치 시대에는 국가가 제의의 주최자였었으나 불교와 유교의 유입으로 점차 민중의 제의로 낮춰졌다. 고려 중엽에는 유교의 유입으로 무속과 제의자인 무인(巫人)들을 천대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불교와 함께 제의 자체를 금지당한다. 혹은 유교의 제례와 결합해져 국가 주도의 제의가 되기도 했다. 앞서 강릉 단오제를 통해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교의 영향으로 각 가정에서 굿이 금기시되기는 했지만 조선시대에서도 여전히 굿은 행해졌다. 일제시대와 근대에 이르러 무속은 미신으로 격하되었다. 지금도 미신으로 대하는 사람이 많기도 하지만, 제의가 예술적 연회로서, 서사무가가 문학으로서, 한국 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무속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문화의 한 부분으로서 인정받아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무속인의 생성과 혈통에 의한 가계 계승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신내림을 받아 무속인이 된 사람을 강신무당이라고 하고, 부모에게 무업巫業을 물려받아 무당이 된 사람을 세습 무당이라 한다. 강신무와 세습무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강신무와 세습무


주로 여성이 무당이기는 하지만 남자 무당이 있는데 “박수”라 한다. 남자는 주로 신병을 앓아 무당이 된다. 신병을 앓아 무당이 된 사람들을 강신무라 한다. 여성도 강신무당이 되기도 하지만 주로 부모로부터 이어받아 세습 무당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강원도와 경기도부터 북쪽 지방에서는 주로 강신무가, 경기도 이남 지역에서는 세습무가 많았다.


강신무는 무병(巫病), 신병(神病)에 걸려, 스승 무당에게 신내림굿을 받고 일정 기간 스승에게 무속의 춤, 무가 등을 배워 무당이 된다. 강신무가 제의를 의뢰받아 이곳저곳 떠돌아다닌다면, 세습무는 무속의 제의와 특정 지역의 제의 권한을 가진 집안에 태어나 가업을 물려받은 단골에서 제의를 한다.


강신무가 자신의 몸에 신을 받아들이지만 세습무는 굿하는 장소인 굿당에 모셔온다. 강신무는 접신할 신에 따라 의복의 색깔이나 형태를 달라진다. 그래서 자신이 접신할 수 있는 신이 많으면, 많게는 이십여 벌의 무복(巫服)이 있기도 한다. 세습무에서는 자신이 접신하지 않으므로 무복이 매우 단순하다. 하얀 치마저고리에 백지(白紙)로 고깔을 만들어 쓰는 정도다. 전라남도의 씻김굿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세습무들이 화려한 무복을 입고 강신무들은 무복이 아닌 평상복 차림으로 굿을 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강신무와 세습무들의 결혼이 많았기 때문이다.


무악에서도 강신무는 신내림을 받아야 하는 무당이 신격(神格)의 진입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격렬한 춤을 춘다. 그렇기에 강신무의 무악은 빠른 템포의 타악기 위주의 악기가 사용된다. 징, 북, 장구, 꽹과리, 제금(바라)을 사용합니다. 세습무는 신격(神格)이 아니라 인격(人格)적인 춤을 춰야 하기에 격렬하지 않았지만 관객에게 흥미를 주기 위해서 강신무처럼 빠른 음악과 격렬한 춤을 추면서 매우 아름답다. 세습무들은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 배워왔기에 섬세하고 우아하며 일정한 형식을 갖춘 예술성이 높은 무용을 한다. 무악도 세습무에서는 가야금이나 해금이 추가되어 완만한 템포의 음악이 연주되기도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신무의 굿과 세습무의 굿은 시대에 따라 서로 보완적인 방식으로 전승되었다 할 수 있다.


강신무가 세습무가 되기도 한다. 남녀 강신무가 특정 지역의 사제권(司祭權)을 가진 세습무 가계와 혼인을 하면 세습무가로 편입된다. 강신무는 다른 강신무와 세습무와의 경쟁을 위해 더 극적인 굿을 해야 했다. 관객들을 신명 나게 해야 영험함이 있다는 말을 듣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신무는 격렬한 무악과 춤이 필요했다.


강신무가 산천(山川)의 특정한 장소에 기도터나 신당(神堂)을 만들어 신을 모시지만 세습무들은 거주하는 집이 굿당이자 기도터다. 세습무를 호남에서는 당골, 단골이라 하고 영남에서는 무당이라 한다. 세습무들이 지역의 사제권(司祭權)을 가지는데 그것을 단골판이라 한다. 혈연으로 세습이 되는데 영남의 무당들은 호남의 무당들처럼 단골판이 없이 제 각기 떠돌아다니면서 굿을 했다. 단골무당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 경우에는 단골판의 매매가 가능하기도 하고 잠시 떠나 있을 경우에는 전세로 내놓기도 했다. 단골판을 어기면 무당의 무구를 모두 뺏고, 심한 봉변을 당한다. 단골판을 팔고 떠난 세습무도 그 지역의 단골판을 구입해야 무업(巫業)을 할 수 있었다.


무속이 현재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강신무의 지속적인 생성과 세습무로의 편입에 의해서였다. 조선 중∙후기부터 신분제가 약화되고 직업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자 단골판이 없는 강신무와 세습무들은 그들의 기예를 굿판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시장에서 놀이판이나 소리판을 만들어 돈을 벌기도 했다. 특히나 춤과 노래가 화려한 세습무들이 놀이판과 소리판으로 가면서 무업을 이을 후계자가 없는 세습무들은 강신무에게 단골판을 넘겨주게 되었다. 세습무들이 쇠퇴하고 강신무가 무당의 상징처럼 생각되고 있지만 이 땅의 문화로서 보존의 필요성에 따라 세습무 제의에 관해서 국가가 지원해 후학을 길러내고 있다.


노래판에서 판소리가 처음 불려지기 시작했을 당시에는 무당이 부르는 노래인 무가와 같았을 것이다. 판소리는 굿의 무가와 비슷한 가사에 연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 점차 관객들을 더 모을 수 있는 방식을 추가하게 되는데, 미학적인 춤과 노래뿐만 아니라 극적인 전달을 위한 연기가 더해져 현재 전해지는 판소리로 발전했을 것이다. 특정한 제의 의식 때나 들을 수 있었던 서사무가가 놀이판이나 소리판의 공연으로 바뀌어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서사무가


무당이 굿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를 무가라 합니다. 설화나 소설의 이야기를 통해서 신의 일생과 신이 되기까지의 내력을 서사한다 해서 무속신화라고도 하며, 무신(巫神)의 근본 이력을 말과 노래로 설명한다고 해서 “본풀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을 “서사무가”라 합니다. 한국의 무가는 314개종이 있다 합니다. 그리고 각 종류별로 분류하면 10개의 계통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부정계통무가(不淨系統巫歌) : 부정, 부정거리, 부정풀이 등의 굿으로 제례(祭禮) 공간의 정화를 통해 신이 올 수 있는 장소로 만듭니다


청신계무가(請神系巫歌) : 가망굿, 신맞이, 하정 등의 굿으로 정화된 공간에 신이 오기를 청합니다.


조상계통무가(祖上系統巫歌) : 조상굿, 말명 등 조상을 청해 모십니다.


기자계통무가(祈子系統巫歌) : 이제 불러들인 신들에게 자신들의 염원 빕니다. 심신굿, 시준굿, 불도(佛道) 맞이, 수룩 등의 굿으로 자손의 번성을 기원합니다.


수명계통무가(壽命系統巫歌) :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칠성굿, 장자들의 굿


초복계통무가(超福系統巫歌) : 집안에 복이 들어오기를 바라며 성주굿, 대감굿, 제석굿, 황제풀이, 업노적 등의 굿을 합니다.


제액수호계통무가(除厄守護系統巫歌) : 액을 물리치려 군웅굿, 서낭굿, 창부굿, 골매기굿, 산신굿, 장군굿, 액두리, 신장거리 등.


치병계통무가(治病系統巫歌) : 병을 물리쳐 장수를 위해 손님굿, 호구굿, 마누라 본풀이, 푸다시, 비념, 봉사굿, 환자굿 등


명부계통무가(冥府系統巫歌) : 망자의 좋은 사후세계의 안내를 위해, 오구굿(바라공주), 사자굿, 황천해원 등의 굿.


송신계통무가(送神系統巫歌) : 굿판에 와서 도와준 제신들을 다시 돌려보내기 위해, 뒷전풀이, 퇴송굿, 거리굿, 중천매기 등의 굿.


김태곤 전 경희대 교수에 따르면 특성을 중심으로 10계통 분류는 전체적인 굿의 순서와 관련해 굿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체 굿을 모두 다 하는 경우를 큰 굿이라 하고, 필요에 따른 굿만으로 하는 굿을 작은 굿이라고 한다.


현재까지 굿 원형이 잘 남겨진 곳은 제주도다. 제주도의 굿거리를 표준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제주도의 큰 굿거리는 각각의 신에 대한 열두 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초감제 : 세상을 창조한 신들의 업적을 기리고, 모셔지는 모든 시들을 맞이하는 제


불도제 : 인간의 출생과 삶에 관여하는 생불신에게


초공제 : 무조신(巫祖神)인 초공신에 대한 제의


이공제 : 서천꽃밭에서 생명꽃을 관장하는 이공신에게


삼공제 : 인간의 일생에서 운명을 담당하는 삼공신에게


시왕제 : 저승의 시왕과 저승차사 강남신에게


명감제 : 인간의 죽을 액을 막는 법을 마련해 준 장수신(長壽神)인 명감(멩감, 저승차사) 신에게


세경제 : 농경 기원 신인 세경신에게


칠성제 : 풍농신인 칠성신(뱀)에게


성주제 : 집안을 지켜주는 성주신과 문전신, 조왕신, 측간 신에게


본향제 : 마을 수호신에게


일월 조상제 : 마을의 수호신이나 조상신에게


제주의 큰 굿 열두 거리다. 신들을 불러와 그들에게 인간의 길흉화복을 전달하고 다시 그들을 돌려보내는 것으로 굿은 끝난다. 큰 굿은 며칠이 걸리기도 하는데 빠르면 3일 길면 일주일 정도다. 고대 국가 시대에서 신에게 올리는 제례는 한 달 걸리기도 했다.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큰 굿은 주로 마을 공동체나 어촌계에서 돈을 모아 음식재료를 장만하고 음식 만드는 일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다. 불러와야 할 신들이 많은 만큼 그들을 대접해야 할 음식들도 많기 때문이다.


각 가정에서 했던 작은 굿은 악사가 두 세명 함께 하기도 하지만 주로 무당이 혼자나 남편이나 아내가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한다. 제례 의뢰자가 원하는 굿에 필요한 신만을 불러내 굿을 한다. 그래서 굿에 따라 그 신을 불러내 올 수 있는 무가를 할 수 있는 무당을 불러와 신과 만나려 했다. 그래서 강신무는 많은 굿을 하기 위해서 스승에게 다양한 제의와 무가를 습득해야만 했다.


무가(巫歌) : 신을 만나는 노래


무가는 이 땅에 들어온 많은 종교에서 영향을 받았다. 제례의 방식과 순서에서는 유교적 모습을 보인다. 마을 당골제는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유교의 영향으로 무속인이 아니라 마을 대표자가 제례를 주관하고 축원문을 낭독했는데, 그 모습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또 불교의 악기와 불교 경전을 독경하기도 한다. 유교적 규범성과 불교의 내세관도 자연스레 서사무가에 담겼다. 또 도교의 우주관도 담겨 있는데, 북두칠성을 신성시하는 칠성풀이가 불려지고 있다. 옥황상제라는 천계를 다스리는 인물도 등장한다. 도교가 한국의 무속에 영향을 준 시기를 왜란 이후다. 동대문 신설동에는 선조가 세운 전쟁의 신인 관운장을 모시는 동묘 사당이 남아있다. 중국 각지에 도교사원이 흔한 것에 비해 한국은 도교사원이 없다시피 한다. 도교의 영향으로 부적을 무속에서 사용하기는 하지만 종교 자체로서의 흔적이 없는 것은, 도교가 한국 무속에 수용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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