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가는 관객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진다
칠성 풀이는 창고倉庫의 신인 칠성신이 인간에서 신으로 되기까지의 내력을 풀어내는 신화다. 가정을 지켜주는 성주신과 같이 칠성신에게는 가정의 부와 화목을 염원하기 위해 하던 굿에서 불려지던 무가다. 굿 의뢰자는 칠성신에게 남편의 장사나 일이 잘 되어 창고에 가득한 곡식이 쌓이기를 기원한다. 또한 남편이 외도의 마음이 들지 않기를 바라며 집안에 액운을 몰아내 가족의 무병장수를 기원한다. 칠성 풀이는 많은 요구가 있던 굿이어서 무속인들은 필수적으로 알아야 했다.
천하국의 칠성님과 지하국의 청실 부인(옥녀 부인, 용녀 부인, 매화 부인, 질대 부인)이 15세와 17세가 되어 결혼을 하게 됐다. 칠성님은 벼슬하고 승진하여 집을 떠나게 된다. 청실 부인은 아들 일곱 쌍둥이를 낳으며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있었다. (혹은 늦게 아들이 없자 칠성당에 기도해 태몽으로 일곱 별이 떨어지고 아들 일곱을 낳는다). 하지만 청실 부인이 병에 걸려 죽자 일곱 아이들은 아버지를 찾아가게 된다. (혹은 칠성님이 돌아와 아이들과 청실 부인을 내쫓는다. 아이들과 함께 어렵게 살다가 부인은 자살하게 되고, 아이들은 다시 아버지에게 가게 된다) 그래서 칠성님은 최씨 부인(옥녀 부인, 후실 부인, 매화 부인)과 재혼을 하게 된다. 최씨 부인은 딸 셋을 낳는다.
최씨 부인 나이 사십이 넘어가자 자신은 아들을 더 이상 낳지 못하고 딸 셋만을 낳았을 뿐인지라 모든 권리는 전실 부인의 아들 일곱에게 돌아가고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 같았다. (남편이 아들 일곱의 교육에 열중해 시기하는 마음이 들어서) 그래서 딸 셋을 불러 일곱 형제를 죽일 계략을 논의하게 됩니다.
최씨 부인은 아들 일곱을 죽이기 위해 병이 걸렸다며 꾀병을 부린다. 칠성님에게 딸 셋이 찾아와 최씨 부인의 병색이 나빠져 위험할 것 같다는 말에 칠성님이 최씨 부인을 찾아 의사를 부르게 하려니 최씨 부인은 약을 먹어서 낫는 병이 아니니, 문복자(문점자, 점쟁이, 무당)에게 점이나 치게 해 달라고 한다. 최씨 부인에게 매수된 문복자에게 점을 치게 하니, 아들 일곱의 간을 먹어야 나을 수 있는 병이라고 말해 준다.
최씨 부인의 모함으로 멀리 쫓아낸 아들들을 찾아가려던 중에 금 사슴이 나타나 자신의 간을 가져다주고 최씨 부인의 음모를 살피라 한다. (혹은 길에서 만난 한 처사가 일러준 대로 멧돼지의 간 일곱 개를 얻어) 간을 얻은 칠성님은 부인에게 돌아가 아들들의 간이라며 준다. 최씨 부인은 먹는 시늉만 하고는 집안 이곳저곳에 널어놓고는 짐승과 벌레들이 먹게 하고는 병이 나았다 거짓말을 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아들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일곱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문안 인사를 한 뒤에, 새엄마인 최씨 부인을 찾습니다. 그리고 결국 찾아낸 일곱 형제들은 그동안 최씨 부인에게 당한 괴롭힘을 도저히 용서를 할 수 없다며 활을 쏘아 최씨 부인을 죽인다. 그러자 최씨 부인은 큰 멧돼지로 변했다. 딸 셋은 그 광경을 목격하고 죽어 접동새가 되어 날아갔다. 아들 일곱은 지하국으로 내려가 어머니의 뼈에 꽃 세 개를 올려 다시 살아나게 해 함께 천하국으로 가 칠성님을 찾아간다. 칠성님은 견우성(별)이 되고 매화 부인은 직녀성이 되고, 일곱 아들들은 칠성이 되었다.
매화 부인을 살려내는데 꽃 세 개가 사용되고 있다. 안락국전에서도 이와 같이 꽃 세 개로 모친을 살려낸다. 서사무가에서 사람을 살려내는 방법을 보면 뼈와 살과, 영혼으로 인간이 구성된 것으로 생각했던 설화와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칠성 풀이는 계모의 학대를 받고 자란 전실 소생들이 성공해 돌아와 징벌하게 되는 전형적인 계모 설화와 비슷하다. 설화에서는 계모의 악행과 그 징벌이 강조되었다면, 서사무가는 설화와 다르게 굿 의뢰자인 여성의 입장에서 해석해야 한다. 또 의뢰자의 상황을 파악한 무당은 의뢰자의 절실히 원하는 부분은 강조하거나 서사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칠성 풀이는 가부장제 사회였던 옛 시대에 남편의 일탈과 무능으로 가정의 화목이 깨지는 이야기다. 그래서 굿의 의뢰자가 주로 여성이었다. 당시에는 칠거지악이라 해서 남편에게 직접적인 불만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여성이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것을 어기면 이혼을 당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말이 많다는 이유로 부인과의 이혼이 가능했기에 자신의 입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입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굿의 서사를 통해서 마음속에 담아 뒀던 말을 무당의 무가를 통해서 전달하기도 했다. 무당과 의뢰자의 환경에 따라 이야기가 변형되기도 하지만, 칠성 풀이의 이야기를 통해서 가장의 무능과 부도덕성, 애정의 결핍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도 남편에게 전달하려던 것이다.
칠거지악 중에서 가장 큰 잘못은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이다. 일곱 아들을 낳은 매화 부인과 아들을 점지해 준 칠성신을 통해 사내아이의 출산과 다산을 기원했다. 칠성님의 후처인 최씨 부인 혹은 옥녀 부인은 딸만 셋 낳은 이유로 전실 소생들을 죽이려 했다는 점에서 부계 중심사회에서 당시 여성이 처한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매화 부인은 아들을 일곱이나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박을 맞는다. 삼불거(三不去)라 해서 아내와의 이혼이 불가능한 세 가지가 있다. 부모님의 삼년상을 같이 한 경우이며, 혼인 당시에 가난하고 천한 위치에 있었으나 나중에 부귀를 얻은 경우, 그리고 이혼을 할 경우에 돌아갈 친정이 없을 경우에는 이혼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매화 부인은 아이들과 함께 쫓겨난다. 무가가 아닌 실제였다면, 별거의 형태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부분은 남편의 부당함을 강조한 것이다.
칠성 풀이의 모든 갈등이 해결되는 마지막 부분에서 굿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전략
칠성님이(아들들에게)
북두칠성에 가거라. 남두칠성에 가거라
서두칠성에 가거라. 동두칠성에 가거라.
칠성으로 보내 놓고(칠성신으로 만들어 놓고)
칠성님은 이제는 포원이 지고 한이 젔시니, 견우성이 되였서라. 직녀성이 되였서라.
칠월칠석날이 닥치며는 견우직녀 만나니라고
눈물바람이 일고, 일곱 칠성님으 눈물이라.
칠성님이 자손생겨, 저승왕에 약을 부처
칠성님이 억조 창생 많이 널리, 손수 발복을 시길 때여
명(命) 짧은 자손(子孫)에게는 명(命)을 태와(더해, 보태) 주시고
복(福) 작은 자손(子孫)에게는 복(福)을 많이 태와 주시고
자손(子孫)없어 한이 되여 일구월심(日久月深, 간절히 바램) 가족에게는 자손 태와 주시고
어지신 칠성님네, 온갖 명복(命福) 점지허시고
자손들 모도다 공부(工夫) 잘 하고 일취월장시기여 주시옵소서.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요, 원형이정(元亨利貞, 사물의 근본도리)은 천도지정(天道之定, 하늘이 정하는 도리),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요 유전(有錢, 돈 있으면)이면 가사귀(可使鬼, 귀신도 부림)요, 무물(無物)이면 불식(不食)이요, 인불언(人不言)이면 부지(不知)요(사람이 말하지 않으면 모름), 공든 탭이(탑이) 무너지며 심든 냉기(나무) 자자지며(넘어지며) 미따운(뿌리가 튼튼한) 나무가 끝이 퍼지는 법(法)이니라.
중략
물가에나 산가에나 불가에나
사해 팔방 다녀도 갈데 안갈데 다닐 때야 무병 장수시켜 주시고
우환근심없고 삼재팔난(三災八難)없고, 액미제악(낙미지액落眉之厄, 눈 앞의 재앙)없이 소원성취
물명수(물재난) 불명수, 절망지망(피할수 없는 액)년 몸주(몸을 주관하는 존재) 대살(살(煞)의 일종으로 어느 지역을 침범하면 죽는 곳)연 넘어가도, 일시 소멸시겨 주옵소서.
수헌지 복녹이면
자손없는 가중에는(가정에는), 자손을 태와 주랴?
칠성님이 자손 태와, 안택주으 지남석 쌔이듯이(붙듯이)
이 생 연분 삼생(전생, 현생, 내세)연분 봉학(鳳鶴)으 짝을 지어
태중안으 자손 태워 관옥 같은 귀남자요, 셍인 군자 같은 자손 생겨
영화보고 증산보고, 팔자 좋고 사주 좋아
성세 자랑 자손 자랑, 팔자 자랑 금슬 자랑
손세(세세(世世)) 발복시켜 주소사
서사무가 2. 고려대학교 민족문화 연구원, 칠성풀이 60페이지
생명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인간은 먹어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는 한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가족 모두의 생존이 달린 문제다. 칠성신에 대한 굿을 많이 요구한 까닭은 당시에 빈곤의 문제가 가족해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그런 점에서 남성의 노동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던 여성들로서는 곡식 저장소인 창고를 지켜주는 칠성신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의 시작이 되게 하고 유지하게 하는 중요한 곳으로 생각했다. 다시 그 아들들에게 칠성신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은 가부장제를 반영했다. 가부장제가 농경사회의 특징도 아니다. 칠성굿은 주로 동해안과 제주에서 그 수요가 많았다. 동해안에서는 풍어를 기원하는 심청굿을 선호했다. 심청굿의 풀이가 심청 풀이다.
동해안의 큰 굿 중에서 관중들의 가장 큰 호응을 받는 심청굿은 고소설 심청전과 같다.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기도 하지만, 한국인들이 효를 중요한 사회규범으로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청굿은 강원도와 경상도 해안지역에서 주로 행해지는데, 그 시작은 오래되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에 세습무들에 의해 심청굿이 행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심청굿은 고소설이나 판소리에 영향을 받았다. 무속인들의 심청 풀이의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특정한 시기에 관중들에게 친숙하고 인기 많은 심청이야기를 무가로 창작해 다수의 무속인이 같은 본을 보면서 배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고 고소설이나 판소리의 모든 텍스트를 구송하는 것은 아니고 굿에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기 위해 필요 없는 부분은 생략된다. 이야기의 군더더기를 빼기는 하지만 관중들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부분은 부분은 그대로 사용한다.
다른 굿도 마찬가지이지만 심청굿도 굿을 시작하면서 무당이 아니리 조로(가락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듯 줄거리를 설명하는 부분) 관중들에게 설명하기도 하고 굿 말미에 설명하기도 한다. 먼저 굿 시작에서 아니리 조로 설명하는 부분이다.
※ 무가의 아니리 : 말처럼 하는 사설. 판소리에서는 고수에게 하는 것처럼 하지만 무가에서는 대상이 청중이다. 주인공의 어떤 행위를 “하였다,였다”가 주로 쓰인다.
허 허 사람 많이 모였구나. 송곳 꼰칠(꽂힐) 틈이 없다. 헌데 이건 무엇이냐 하면은 심청굿이렸다. 심청이 넋은 왜사 불러들이느냐, 천하의 보배가 일월인데, 사람의 눈인데 일월과 한가지 같은 사람의 눈, 말인즉슨 안목인데 말이야. 젊었을 적에는 샛별같이 밝지만 나이 육십평생 아니 오십평생 들어서면 거짐(거의) 반봉사가 된단 말이야. 그러나 배타는 사람들은 눈이 밝아야 하지. 하늘에 구름도 잘 보고 안개도 잘 보고 피대도 잘 맞춰야 되느니, 이러기 때문에 심청이가 영영 죽어 세상을 떠난 것 같으면 하지만은 용왕국 들어가 삼 년을 해상하는 뱃사람들에게 주로 유리하다 이 말씀이야.
[민속원, 서사무가 심청전집, 118페이지]
심봉사가 눈을 뜬 것 같이 굿의 의뢰자나 관중인 뱃사람들의 눈도 맑아지기를 기원하기 위해 심청이의 넋을 불러내어 심청굿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가 하면 굿의 제차가 모두 끝나서야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창(唱)으로]
심청이 굿으로 어찌 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이 일철 정기가 눈인데, 어찌야 하다가 보면, 성한 눈도 궃힐 수가 있고, 애삼도 막아주고, 테삼도 걷어주고, 못된 도둑 눈두야 걷어주시고, 이 물가에 사넌(사는) 소철(소치所致, 까닭으로)로, 께삐(고삐) 없던 철리매(千里馬) 타고, 가가부 자여손들이(집집마다 자손들이) 만경창파(너른 바다) 나갈지라도, 첫째는 알기를 잘 보아야 아무 사고나 없임나이다. 눈에는 총기 달라꼬, 이 뜻으로 심봉사를 모시나이다. [민속원, 서사무가 심청전집, 78페이지]
풍어와 어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심청굿을 한다. 그런데 지역과 장소, 관중을 달리하면 또 사설은 달라집니다. 강원도 강릉시 명주 군에서의 심청굿에서는 군대에 간 자손을 위한 굿이 된다.
심청굿으는 우예 하나 하면 사람의 일신의 정기는 안목이라. 일월과 같고 어이드래도 말이지 선박이나 주로 각성받이(각성바지 : 성이 다른 사람) 모두 선장, 기관장, 남방 여러 연자 선원을 거나리고 먼저 보는 기 임자다. 임자 없는 재물 천 냥 벌라고 족박 같은 배를 타고 수륙 만리 다닐지라도 어이드래도 운애질 안개질 속에 다닐지라도 알기도 잘 보고 물고불 도고불 왕바우 떡바우 큰 매치 떡바우 끝으로 넘어 다닐지라도 아무 사고 없도록 점지해 주시고 눈이 밝아야 고기떼를 잘 보고 눈이 밝아야 알기를 잘 본다.
이러니 첫째 선박에는 또 이런 심청굿으로 특별히 해야 되고, 그 뒤 밑에는 육해공군에 갔는 자여손들 나라를 위하여서 육해공군 갔늦 자여손들 어이드래도 참 전방이고 후방이고 동부 중부, 서부고 이래 산고지 마다 밤이나 낮이나 근무할 지라도 눈이 밝아야 적을 잘 볼 수 있고, 삼 년꺼정 고이 군대살이, 시집살이 잘 살고, 고이 고이 귀국시켜 달라고 또 육해공군 적에도 눈이 밝아야 된다. 이래서 또 축원이고 그 뒤 밑에는 장사 상업을 해도 눈이 밝아야 장사 상업으로 말이지 돈을 잘 벌 수가 있고 또 농사를 지어도 눈이 밝아야 씨앗을 고루 열 수가 있고, 그 뒤 밑에는 나 많은 사람들 할매네들 모도 필삼 열삼 개수발이 밤눈 안삼 추남 어이드래도 눈이 총명해야 된다.
이러니 주로 이에 말이지 심봉사 넉으를 착실히 불러줘야 되고, 또 공업에 다니는 자여손들 범같은 관문 앞에 구름같이 시련 받드라도 관록을 도와주고 창업을 형성시켜서 관제귀설을 막아주고 간묻어도 외국선이나 원양어선인 또 각 기술자나 각 공장이나 어이드래도 말이지 눈이 밝아야 기계를 잘 볼 수가 있다. 그 뒤 밑에는 또 학생들이다. 국민학생, 중학, 고등, 대학 눈이 밝아야 필기를 잘 볼 수가 있고 필기를 잘 쓸 수가 있다. 이러니 아무쪼록 하시나마 소돌 대동안에 고구려 신라 시절 땜부터 내려오시며 시우 삼년만큼 우별신 오도둠 좌별신 좌도둠, 거리 별신, 내별신, 풍어제를 올릴지라도 첫째 동네가 안과 태평하시고 부국공명 하시고 물로 들은 천 냥이며 들로 들은 곡식이며 어이드래도 심지어 먹은 마음 소원 성취를 이뤄달라고 이 심봉사 넋이를 착실히 불러준다.
굿은 의뢰자뿐만 아니라 마을 굿에서는 구경하러 모여든 관중까지 참여시킨다. 무당은 말로서 대략적인 이야기의 줄거리를 알게 해 주고 창과 춤을 번갈아 하며 관객들의 흥을 일으킨다. 판소리처럼 청중들도 서사와 노래에 참여해 추임새를 넣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무당과 함께 춤을 춘다. 판소리의 창자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장면에서는 무당도 연기를 한다.
판소리 춘향전의 사랑가가 있다면, 심청굿에서도 사랑가가 있다. 춘향전이 남녀 이성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면 심청굿의 사랑가는 어렵게 얻은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노래한다. 그래서 심청굿은 제의적 목적으로서만이 아니라 관중들에게 흥미를 줄 수 있는 것들을 판소리 춘향가의 사랑가를 그대로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둥두두둥 내 딸이야, 얼씨구 좋다 내 딸이야, 얼씨구나 내 딸이야
어화 둥둥 내 딸이야, 어데를 갔다가 인제를 왔나 둥기둥기 내 딸이야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불끈 솟아났다, 둥둥둥 내 딸이야,
아들 겸해 내 딸이야 열 소경에 한 막대 같은 내 딸이야
남전북답 장만한들 이만침도 더 좋을까 둥기둥기 내 딸이야
새벽 바람 찬 바람에 진주같이도 고혼 딸아
돋아오른 반달 같은 둥기둥기 내 딸이야
댕기 끝이 진주씨, 상치밭에 파랑새, 어허 둥둥 내 딸이야
오동나무 거문고 메어도 내 딸 울음같이 반가울소냐
청룡 흑룡이 여의주 물고 넘노나도 내 딸같이 반가울소냐
당상 봉학이 주실을 물고 오동속을 넘노나도 내 딸같이 반가울소냐
둥둥기 내 딸이야
판소리는 창자와 청자를 달리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무가는, 무당의 상태와 굿당이 있는 장소, 청중의 성향에 의해 풀이의 내용이 달라지기거나 생략되기도 한다. 심청굿이지만 춘향전에서의 사랑가를 가져오는 것처럼 언제든 변형이 가능하다. 또 청중들이 알아듣기 쉽게 사설을 바꾼다. 심청굿이 전체적으로 심청전의 대본을 가져왔기는 하지만 한자어는 관중들이 알기 쉬운 일상용어로 바뀌거나 삭제되기도 한다. 이것이 판소리와 다른 점이다. 굿이 현장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결과라 생각된다..
맑은 눈을 통해서 풍어와 자식들의 효심이 깊기를 바라는 심청굿이었다. 그런데 동해안에서 주로 행해지는 심청굿의 원류는 서해 원홍장 설화다. 전남 곡성의 관음사 창건설화이기도 한 원홍장 설화는 다음과 같다.
앞을 보지 못하는 원량이라는 사람이 홍장이라는 딸과 살고 있었다. 그러다 하루는 길을 나섰는데 어떤 스님이 말을 건네며 자신은 홍법사의 주지 성공인데 지난밤 꿈속에 부처가 나타나 내일 길에서 만나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사찰 세우는 것을 도와줄 사람이라고 했다며 원량에게 관음사라는 절을 세우게 도와달라 한다.
안량은 가진 것이라고는 딸 밖에 없으니 그게 부처의 뜻이라면 딸이라도 시주하겠다 한다. 그래서 성공 주지는 안량의 집에 가서는 안홍장을 데리고 지금의 백령도로 가던 길이었다. 어느 포구 근처에서 쉬고 있던 성공과 안 홍장의 곁에 뱃사람들이 다가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바라옵건대, 저희 황후마마 이시옵니다. 저희와 함께 진(晋) 나라 황제에게 가셨으면 합니다."
진나라 사람들이 이 땅에 온 사연은, 진나라 황제가 황후를 잃고 깊은 시름에 잠겨 있던 어느 날 황제의 꿈에 부처가 나타나 다음 황후는 조선에서 태어난 여인이라 말하며 황후의 행색을 자세히 알려 주었고 날이 밝자 황제는 자신들을 조선으로 보내 황후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했다 한다.
그러자 안홍장은 그들이 배에 싣고 온 보물들을 성공에게 주고 안홍장은 그들을 따라 진나라에 가 황후가 되었다. 진나라 황후가 된 안홍장은 세월이 흘러도 고향과 아비를 그리워하며 시름을 잊고자 관세음보살상을 만들게 되는데 그것을 배에 태워 조선의 바다로 띄워 보냈다. 어느 날 성덕이라는 마을 처녀가 낙안포(지금의 전남 벌교)에서 그 배를 발견하고 실려 있던 관세음 보살상을 지금의 보성 관음사에 모셨다 해서 마을의 이름을 성덕마을이라 했으며 관음사가 있는 산의 이름을 성덕산이라 했다. 아버지 원량은 원홍장이 떠난 것이 슬퍼 울다 눈을 뜨게 되었고, 성공이 전해 준 재물들로 95세까지 편안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
관음사의 유물들은 전쟁을 거치며 남아있지 않다. 심청이 성공스님을 따라 백령도로 갔을 것이라 추정되는 길은 지금 효자 거리라 불린다.
굿은 최근까지도 심청 풀이처럼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무가로 받아들였다. 1960년대 이전에는 채록되지 않았던 심청 풀이가 60년대 후반에 채록되기 시작했으니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무가는 지속적으로 다양한 이야기에서 신화를 뽑아내고 있었다.
굿의 풀이는 철저히 현장 중심적이다. 굿을 의뢰한 사람들이 기혼자이기에 결혼과 관련된 이야기를 주제로 풀이한다는 점이다. 판소리의 심청전의 경우에 효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면, 무가의 심청 풀이는 심봉사의 눈뜨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니까 심청이 신이 되기는 하지만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이 주제가 된다.
칠성 풀이와 심청 풀이는 모두 기자 치성 부분이 있다. 청실 부인(옥녀 부인, 용녀 부인, 매화 부인, 질대 부인)이 일곱 아들을 낳은 점과 심청의 효심의 부분은 장군바위 설화의 심리와 매우 유사하다. 아들을 낳게 해 주십사 빌지만, 효심 깊은 평범한 자식을 원한다.
언제든지 이야기의 다른 화소를 통해 청중들에게 풀어내는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심청의 어미가 죽는 장면을 극적으로 강조할 수 있고, 칠성 풀이에서 아들들이 계모에게 응징을 하는 곳이거나 반대로 어머니인 청실 부인을 살려내는 부분에서 무병장수를 기원할 수도 있게 한다. 상황에 따라 주제의식을 바꿀 수 있는 유연함이 무가의 풀이에는 있다.
옛 무속의 장소와 풀이는 기우제적 성격이었다면 지금 전해지는 무가들은 각 가정 문제에 까지 신이 관여하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지금의 무가에서도 기우제적 성격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무속인들은 비와 자신들이 상극相剋이라 한다. 비가 오기를 바라면서도 너무 많은 비가 내리면 무속 공연을 할 수 없기도 하겠지만, 적당한 강수량은 자신들의 입지를 좁힐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점들이 판소리와 무가 풀이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전남 보성의 관음사 창건설화에서 시작된 원홍장의 설화가 심청전과 심청가가 되어 전해지지만 서사무가로서 심청굿은 어업이 중요한 생계수단인 동해지역에서 주로 행해진다. 서해에서는 심청굿이 행해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