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어사 창건설화
한국인들의 의식세계에 영향을 준 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고대 신앙, 불교, 유교, 그리고 도교적 세계관이다. 앞서 설화들은 고대 신앙과 불교, 유교의 세계관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던 의식의 결과물인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그 흔적을 되짚어 봤다면 이제는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가려 한다.
한국의 수많은 사찰들에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판타지 소설과 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은 재미난 옛이야기로 흘러 넘길 수 있지만, 이야기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면 또 다른 시각이 필요하다. 특히 선종 계열의 사찰에 뜻 모를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 불교 세계관, 특히 선종 계열의 사찰 설화에 어떤 의미가 담겨 이야기화 되었는지 알아보려 한다.
교종과 선종의 차이
불교의 종파를 굳이 나누자면 교종과 선종이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문자로 기록한 불경을 깨달음의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한 교종과 참선을 중요한 깨닮음의 수단으로 삼고 진리는 문자로 나타낼 수 없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 사상인 선종으로 나뉜다. 사상적 측면에서 교종과 선종은 다르다. 소와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사찰 벽화에는 소가 그려져 있기도 하다. 그림을 통해서 선종과 교종의 사상적 차이를 엿볼 수 있다.
교종의 소와 관련된 이야기
한 동자가 고삐를 들고 소를 찾아 나선다. 찾아낸 소를 고삐에 메어 소가 도망가지 않게 한다. 그리고 일명 소귀에 경읽기를 통해서 소를 불법으로 감화시킨다. 소는 점차 불성을 지닌 존재가 되어 고삐를 풀고 동자는 소 등에 타 피리를 불며 이야기는 완성된다. 교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불경을 통해서 불성을 지닌 존재로 재 탄생한다는 벽화의 이야기다. 동자가 피리를 분다는 선종의 불립문자를 의미한다. 불경이 선종보다 앞서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선종의 소와 관련된 이야기
중국 남쪽 지방의 승려가 북쪽으로 가던 중 한 노인이 소를 몰고 있었다. 승려는 하룻밤 기거하기를 청하기 위해 노인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노인은 승려에게 차를 내어주며 물었습니다.
"남쪽 지방에선 불법을 어떻게 주지住持하고 있습니까?"
"말법시대라 계율 지키는 비구가 적습니다"
"대중은 몇 명이나 됩니까?"
"삼백 명 혹은 오백 명 정도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승려가 노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불법을 어떻게 주지하고 있습니까?"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고, 뱀과 용이 함께 있습니다."
"대중은 몇 명이나 있습니까?"
"전삼삼 후삼삼"
이렇게 간단하게 대화를 마치고 승려가 노인에게 하룻밤 기거할 것을 청했으나 노인은 거절한다.
"당신에게는 집착하는 마음이 있어 기거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집착함이 없습니다."
"당신은 계를 받지 않았습니까?"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면 계를 받을 필요도 없지요"
*계 : 승려가 계율을 지킨다는 서약
노인은 동자에게 승려를 배웅하게 한다. 승려가 노인과 동자가 기거하는 곳을 나서면서 동자에게 묻는다.
"대체 전삼삼, 후삼삼의 크기는 얼마나 되오?"
질문을 하고 동자를 바라보니, 동자와 노인은 오간데 없었다.
선종사찰 벽화에는 동자와 노인 고삐에 메이지 않은 소가 등장한다. 계에 묶이지 않아야 한다는 선종의 사상을 말하고 있다. 소가 상징하는 것은 미련함과 집착이다. 힘이 약한 송아지 때 풀밭에 메어 놓으면 도망가지 못한다. 그런데 약했던 송아지에서 강한 힘을 가진 소가 된 뒤에도 고삐를 스스로 풀지 못한다. 풀 밭에 작은 돌멩이를 묶어 던져 놓아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승려가 계를 받아 불교에 귀의했지만 그 계를 여전히 풀어내지 못한 것을 나무란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선종과 교종의 사상적 방향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선종사찰의 설화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선종의 가르침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선사들의 어록들을 살펴본 뒤에 설화를 해석해야 한다. 선종이 중국에 뿌리내리게 한 것은 장자 사상이다. 선종사찰의 설화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선사들의 어록뿐만 아니라 장자를 참고할 수밖에 없다. 선종 사찰의 설화를 재해석하는 첫 번째 여행지는 밀양의 만어사로 정했다.
밀양을 첫 번째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는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시도한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은 사명대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위해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이라는 책을 지었다. 선가는 선종을 말하며 귀龜는 거북의 등에 글을 세겼던 갑골문자, 교종을 의미한다. 이 두 종파를 결합해야 거울 감鑑, 거울처럼 맑게 진리를 볼 수 있다는 책 제목이다. 선가귀감의 내용은 대체로 교종을 앞서게 하고 선종이 뒤 따르게 했다. 서산대사의 사상은 제자인 사명대사에 이어졌다.
사명대사는 억불정책을 고수한 조선에서 불교가 법맥을 잇기 위해서는 선종과의 통합뿐만 아니라 유교 사상도 불교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가 받아 들인 것은 유교의 충忠과 효孝 사상이다. 왜란과 호란 때에는 승병을 일으켰으며 말년에는 작은 암자에서 부모를 기리며 여생을 마무리했다.
교종을 중심으로 교선 통합이 이루어졌기에 선종 사찰의 흔적이 많이 퇴색된 것이 사실이다. 지금의 사찰들은 대부분 불상과 가람배치와 건물, 벽화들이 교종적이다. 그나마 선종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찰이 있기도 하지만 대체로 설화를 통해서다. 교선 통합의 중심이었던 밀양에서 선종의 흔적을 찾아보려 했다.
만어사 창건설화
만어사(萬魚寺)는 46년(수로왕 5)에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전설 속의 사찰이다. 『삼국유사』 「탑상(塔像)」편의 ‘어산불영(魚山佛影)’ 조에는 만어사의 창건과 관련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만어사 설화
지금의 양산지역 옥지(玉池)라는 연못에 독룡 한 마리와 다섯 나찰(羅刹)이 서로 사귀면서, 농민들이 애써 지은 농사를 망치는 등 온갖 행패를 일삼았다. 이에 수로왕이 주술로 그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여 이들로부터 오계(五戒)를 받게 하였다. 이때 동해의 수많은 고기와 용들이 불법의 감화를 받아 이 산중으로 모여들어 돌이 되었는데, 이들 돌에서는 신비로운 경쇠 소리를 났다.
수로왕은 이를 기리기 위해 절을 창건하였는데, 불법의 감화를 받아 돌이 된 고기떼의 의미를 살려 이름을 만어사(萬魚寺)라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감화로 인해 수많은 물고기가 돌로 변해 법문을 듣는다는 신비로운 전설을 간직한 만어사. 이러한 전설을 뒷받침하듯 법당 앞 널찍한 너덜지대에는 물고기 떼가 변한 어산불영(魚山佛影)이라는 돌더미가 있는데, 지금도 이를 두드리면 맑은 소리가 나기 때문에 종석(鐘石)이라고도 하며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다음 백과 http://place.map.daum.net/14974317 참고
해석
만어사의 창건 설화는 대혜 보각 선사의 어록과 비슷하다.
대혜가 말했다.
"부처님께서 옛날 500분 존자들에게 한 마리 독룡毒龍을 항복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존자들은 각자의 신통력을 발휘하였으나 아무도 독룡을 항복시키지 못하였다. 그때 문득 다른 곳에서 한 존자가 도착하자, 부처님께서 그에게 용을 항복시키라고 명하셨다. 존자는 용의 앞에 서 손가락을 한 번 소리 나게 튕겼는데, 그 용은 바로 항복하였다"
이어서 말하길
"다른 곳에서 온 존자의 신통력이 500 존자의 신통력과 같았는데, 무엇 때문에 용을 항복시킬 수 있었는가? 원앙새를 수놓아 그대에게 마음껏 보여 줄 수는 있으나, 금 바늘을 집어서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보각 선사의 말은 장자의 도축업자 포정과 용을 죽이는 법을 배운 주팽만에 관한 이야기가 혼합된 이야기로 대신 해석할 수 있다. 포정의 칼은 10년 동안 고기를 잘라내도 무뎌지지 않았다. 그 이유에 관해 왕이 물으니 자신의 기술이 어느덧 살과 살의 빈 공간을 찾아 들어가니 날이 닳지 않게 되었다 말한다. 이 기술은 자신이 쌓은 경험에 의해 발전된 것이라서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것이다. 주팽만은 용을 죽이는 법을 가산을 탕진해가며 삼 년 만에 완성했지만 쓸 곳이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이다.
만어사가 창건된 시기가 수로왕(기원 후 46년) 때라 하지만 선종과 창건설화를 연결해 보면 이보다 700여 년이 흐른 선덕왕( 재위, 780년∼785년) 때다. 또한 법흥왕대(재위, 514 ~ 540년)에 불교를 공인했다는 점에서 창건된 시기는 훨씬 후대라 추정할 수 있다. 수로왕과 관련 있거나 사찰을 짓기 위해 수로왕의 권위가 필요했던 고대신앙지일 수도 있고 불교 시를 게송한다는 loka(수로가)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설화 전체의 의미는 어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을 간직한 곳, 그저 돌무더기에 지나지 않지만 사찰과 설화를 통해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되었다는 옛 선사先師들의 생각이 아니었을까.
만어사에는 역시 선교 통합의 흔적을 벽화를 통해 알 수 있기도 하다. 경전을 중요시하는 소에 관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나마 선종의 흔적이 남아 있기는 했다. 선종의 공空사상을 상징하는 원이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