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가 서쪽으로 온 까닭은?
남인도에서 이름 있는 선승이 중국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승려 혜가가 양무제에게 그를 만나볼 것을 권한다. 혜가의 말에 따라 양무제는 보리달마를 황궁으로 초대한다. 보리달마가 황궁 근처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양무제는 친히 문 앞까지 나가 그를 환대했다. 황궁 안에서 양무제가 달마에게 질문을 던졌다.
"짐이 지금껏 불교 경전을 편찬케 하고 절을 수 없이 지었소. 나의 공덕이 어느 정도 되오?"
"무공無功,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실망한 양무제는 다음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공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오?"
"무유無有, 혹은 무無, 없습니다."
양무제는 선승 달마대사에게 불교와 관련된 화려한 언사를 기대했건만 대답은 너무 간결했다. 그리자 양무제는 짜증이 잔뜩 담긴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짐 앞에 있는 그대는 누구요?"
달마대사의 수준이 높지 않다는 불만과 비난하는 감정을 담아 한 질문이었다. 그러자 달마는
"부지不知, 모릅니다."
양무제는 대단한 설법을 들을 줄 알았지만 겨우 몇 마디로 끝내는 달마에게 실망했다. 환대와는 다르게 배웅은 초라했다. 양무제가 달마를 추천한 혜가를 찾아 기대와는 달랐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혜가는 양무제에게 이렇게 말한다.
"보리달마에 관해 아십니까?" 혜가의 질문에 양무제는
"부지不知 모르오!"
혜가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때서야 양무제가 달마의 대답에 담긴 의미를 깨달았는지 달마를 찾았지만 멀리 떠난 뒤였다.
전등록에 의해 전해지는 달마가 세상에 극적으로 등장한 불교사에 있어서 명장면이다. 그런데 설법을 한 것도 아니고 겨우 없다와 모른다는 말에 없는데 왜 명장면인가. 세 번의 짧은 답변에는 당대와 선종사상을 축약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질문과 답변의 숨은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질문은 통치자로서 양무제가 칭찬받을 만 한가에 관한 질문이다. 수많은 불교 경전과 사찰을 지었으니 훌륭한 군주로서 평가받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달마는 냉정하게 평가절하한다. 동아시아의 불교는 왕조의 지원에 힘입어 성장했다. 승려가 한 일이라고는 불당에 앉아 경전을 암송하며 불자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설법할 뿐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을 스스로 해결하지 않았다. 왕도 백성들이 낸 세금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양무제가 직접 노동에 참여한 것은 아니기에 그가 지은 공덕은 없다는 것이다. 선종의 선사들은 노동을 통해 자신들이 먹고 마실 것을 구했다.
자급자족의 공동체인 선사가 만들어진 것은 당나라 말기인 백장회해(749~814년) 때 일이다. 백장산(百丈山)에 살았기 때문에 백장산회해(百丈山懷海)라 한다. 마조도일에게 사사하고 백장산에 선종의 첫 사찰 백장사를 세웠다. 백장사 이전에는 선사들은 교종의 사찰에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교종의 규율과 수행법을 따라야 했으며 선사들의 수행법인 참선은 따로 시간을 내어야 했다. 회해가 선사를 세워 선종의 터를 잡았다면 마조도일의 가장 뛰어난 제자였던 대혜종고는 간화선(화두를 정해 참선하는 것)과 어록으로 선종의 사상적 틀을 확고히 했다. 보리달마 이후 혜가, 증찬, 도신, 홍인, 신수, 혜능, 그리고, 마조도일의 제자인 9대 회해와 종고에 이르러서야 선종의 틀이 잡혀가기 시작한 것이다. 양무제 질문의 내면에는 자신의 권력에 의지할 것인가를 물은 것이다. 하지만 달마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두 번째 질문에 모른다라는 부지不知가 아닌 무유無有로서 답을 한 이유는 앞서의 질문에 이은 말이기도 하고 선종의 정치사상에 관한 확고한 주장이기도 하다. 국가라는 정치 시스템은 보이지 않는 폭력의 강제력으로 세금을 거둬들인다. 보리달마 자신의 사상에서는 그런 강제력이 없다는 말이다. 선승들은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의 공동체다.
자급자족이 교종의 몰락과 선종의 확장에 결정적이었다. 송대에 이르러 너무 많은 물자들이 사찰들로 몰려가자 국가 재정이 파탄에 이르러서야 왕조국가들은 불교에 주었던 특혜들을 철회한다. 송나라가 개국되고 왕조는 불교에 대한 지원을 끊거나 몰수했다. 왕조에 의존했던 교종 사찰들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왕조에 의존하지 않았던 선종 사찰은 급격하게 늘어났다. 교종 사찰이 국가의 강제력에 의지했던 것만큼 강제력에 의해 무너져 갔다. 양무제의 질문은 강제력이 없으면 단체의 유지가 힘들 텐데 그래도 강제력이 없을 수 있는가에 관한 물음이다. 달마는 이번에도 단호하게 그런 강제력은 없다고 말한 것이다.
세 번째 질문에도 부지不知로 답하며 선종 사상의 지향을 확고히 말한다. 왕과 선승이라는 계급에 관한 질문이다. 왕에게 잘 보여야 자신의 앞날에 득이 될 터이기에 누구라도 모르는 것도 아는 체 하며 감언이설을 늘어놓게 된다. 행여 왕을 분노하게 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자리에서라면 달마의 답변은 너무 간결한 것이다. 생각을 쥐어 짜내게 하는 달마의 몸에 지금의 상황인 왕의 앞인 엄중한 자리라는 것을 양무제는 경고하는 것이다. 어쩔 줄 몰라하며 몸이라도 낮추어야 하건만 보리달마는 당당했던 것이다. 몸을 둘 바를 모르는 것, 몸을 낮추어 예禮를 다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양무제의 물음에 달마의 답변은 짧고 간결했다. 부지不知, 알지 못합니다
달마의 답변은 왕 앞에 서 있는 달마 자신의 신체體를 향하지 않고 심心으로 향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달마에게 있어 몸은 이념화 대상이 아니었다. 몸을 이념화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禮로서 한다. 동양에서 유교적인 예다. 임금에 대한 신하의 예, 주인에 대한 손님의 예, 조상에 대한 후손의 예, 어른에 대한 아랫사람의 예, 상급자에 대한 하급자의 예가 모두 몸의 이념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몸을 낮추는 예절은 차이에서 발생하는 강제력을 내면에 세기는 이념화 작업이다.
지금은 아이들이 어른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해서 경찰이 체포하지는 않는다. 관료에게 일반인들이 인사하지 않았다 해서 법에 저촉되지는 않지만 옛사람들은 예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교 정치체제였던 조선시대에는 지금과 사정이 달랐다. 양반이나 관료들을 보면 몸을 낮추어야 했다. 그런 예를 차리는 번거로움을 피해 다녔다는 서울의 피맛골은, 몸의 이념화인 예禮가 조선시대에서는 강제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선종은 강제력을 갖게 하는 것을 체를 이념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절을 올려야 하는 불상이나 탑이 선종의 사찰에는 없었다. 자신의 몸 또한 그러하고 타인, 그게 성인인 부처의 몸이라 해도 이념의 대상이 아니다. 초기 선종 사찰에는 불상을 모신 불당이나 탑이 존재하지 않았다가 교종 사찰의 감소로 신앙인들이 선종사찰을 찾아오자 그들을 위해 불당과 탑을 세우게 됐다. 선승들은 법당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승방에서 참선을 했지 불당이나 탑에서 부처를 경배하지 않았다. 양무제가 혜가를 찾아간 것은 왕이라는 계급을 내려놓고 아래로 향한 것이다. 그곳에서 달마라는 한 존재를 파악했을 때는 달라진 것이다. 인간대 인간으로서 파악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양무제는 한 인간인 달마를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김명국의 달마도를 보면, 눈은 마음으로 향하고 정리하지 않은 덥수룩한 수염은 얼굴의 감정을 치장하지 않음을 표현하고 있다. 온몸을 천으로 감춤으로써 몸을 이념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김명국의 달마도가 동아시아를 통틀어 가장 최고의 명작인 이유는 선종사상의 깊은 이해로 단 몇 획으로 간단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선종사찰과 교종 사찰
선교 통합이 된 지금 선종사찰과 교종 사찰을 구별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선종 사상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은 일종의 보물 찾기와 같아 사찰을 찾아가는 재미를 더해 주기도 한다. 보이는 사찰과 보이지 않는 설화를 찾아가는 여행이기도 해서 사찰에서 선종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도 함께 할 것이다.
성주사는 백제 시대 교종의 사찰로 지어진 곳을 신라 말 낭혜화상이 선종 사찰로 중창해 구산선문의 한 교파인 성주산파의 중심 사찰이었던 곳이다. 한국의 사찰은 대체로 1 탑 1 금당이다. 그곳을 중심으로 다른 건물들이 들어선다. 차이점이 없는 것 같지만 여기서도 선종사찰과 교종 사찰에는 차이가 있다. 좌측의 익산 왕궁사지터와 우측의 성주사지터에서의 광경은 다르다. 교종 사찰은 사천왕문을 지나면 탑이 보인다. 그것도 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래의 기단이 보이지 않거나 탑 꼭대기가 가려져 있다. 사천왕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야 완전하게 탑을 시야에 담을 수 있다. 반면 선종의 사찰은 해탈문을 지나면 답과 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금당뿐만 아니라 선사의 무덤이라 할 수 있는 부도탑까지 보인다.
부도탑 : 교종의 입장에서는 부처의 무덤이 아니기에 승탑으로 부른다. 반면 일본 학자들이 부처의 탑이라 잘못 표기해 부도탑이라 한 것이니 승탑이라 해야 옳다고 하지만, 선사들은 스스로 깨달았다는 부처를 자임하기에 이 글에서는 선사들의 뜻에 따라 부도탑이라 할 것이다.
이 차이가 체를 이념화한 것인지 아닌지가 드러난다. 교종 사찰에서는 본존불이 놓인 대웅전과 탑은 숭배의 대상으로서 사람들 마음을 동요시켜야 한다. 그래서 탑을 지나 대웅전 앞에 섰을 누군가의 몸을 이념화해 낮추려 하게 한다. 그래서 교종의 사찰 건물이 웅장한 입체감을 주려 치밀하게 설계했다면 선종의 사찰은 찾는 이의 마음을 흩트리지 않게 평면적이다.
설화를 따라 사찰을 찾아가려 한다. 사찰의 작은 차이점들을 보물을 대하듯 하는 눈도 함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