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 설화
김제 금산사는 백제 무왕 대(600년)에 창건되어 통일신라 경덕왕 대(762년)에 진표율사에 의해 시작해 혜공왕(766년) 대에 이르러 중창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무왕대에 창건되었으며 법왕이 즉위하자 살생을 금하는 칙령을 금산사에 내렸다는 것으로 보아 진표율사 이전에도 존재하던 사찰이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진표율사의 중창이 창건과 다를 바 없는 이유는, 작은 사찰이었던 금산사에 장육전등 많은 불전들이 들어 서면 서다.
금산사에는 홍예문, 석성문이라는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석문이 있는데, 금산사를 보호하려던 견훤이 쌓았다 해서 견훤문이라 하기도 한다. 견훤(867-936년)의 보호를 받아 다시 중창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백제 유민들을 달래기 위해 중창된 사찰이라는 말이 전해지는 것은 견훤과 관련지어 전해진 말이 아닌가 싶다. 조선시대 전란으로 소실되었던 금산사는 인조 5년(1627년) 수문대사에 의해 중수되었다. 장육전은 미륵전으로 이름을 달리했을 뿐 안에 [ 모셔진 주불은 진표가 중창했던 당시의 주불과 같은 미륵불이 모셔져 있다. 대략적인 금산사의 변화를 배경으로 이제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린 진표율사의 금산사 중창 설화에 담긴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진표율사라 칭하는 것에서 율종계열의 승려임을 알 수 있는데 선승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진표율사의 금산사 중창 설화를 비중 있게 다룬 것은 정치,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경덕왕의 왕권강화를 위해 왕조의 지원을 통해 중창되었다는 점과 진표의 제자들이 산문의 개조가 되었다는 점이다. 나라를 잃은 백제 유민들과 중앙 정치에서 밀려난 신라 귀족들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법상종의 미륵불 신앙이 필요했지만 시대는 선문의 개산을 요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금산사 설화다.
진표율사와 금산사 설화는 출가 전의 이야기, 출가 후 깨달음을 얻는 과정, 깨달음을 얻은 후 금산사를 중창하여 대중들을 감화시킨다는 세 단락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첫 번째 단락을 보면
첫 번째 단락
신라 성덕왕 32년(733년) 완산주 벽골군 두내산촌 대정리(지금의 김제시 만경읍 대정리)에서 아버지 진내말과 어머니 길보랑 사이에서 태어났다. 진표가 11세 되던 해 봄날 놀러 나갔다가 지천에 널려 울고 있던 개구리를 꿰어 물속에 담가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봄 불현듯 자신이 지난해 꿰어 물에 담가 둔 개구리가 생각나 찾았더니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개구리를 풀어주며 생명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출가를 결심하고 부모님께 말씀드렸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3년 더 집에 머물다 출가할 것을 권한다.
하루는 아버지가 잉어 한 마리 사 왔는데 진표가 보기에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아 자신이 기르겠다고 말하고 출가 전까지 길렀다. 출가를 며칠 앞둔 어느 날 꿈속에서 잉어가 꿈에서 말하길 이승의 인연이 다하였다 말하며 그동안의 감사함을 전하는 선물 하나를 남기고 간다는 것이다. 진표는 잠에서 깨어나 죽은 잉어를 치우려 하니 잉어 밑에서 진주 한 알이 있었다. 그것으로 진표의 부모는 평생 걱정 없이 지내게 되었다. 진표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김제 금산사로 향할 수 있었다.
해설
선사들은 교종의 승려들을 개구리로 희화화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경전 암송을 한다지만 깨달음은커녕 그 모습이 개구리와 같다고 한다. 교종의 승려들이 잔뜩 모여 경을 외우는 소리가 마치 개구리울음 소리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불현듯 깨달음을 얻은 듯하여 높이 올라갔다 생각하지만, 뛰어올라도 곧 땅바닥에 내려오는 개구리의 처지와 같이 경을 외우는 것만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선사들이 "개구리를 만나면 놀려주고 호랑이를 만나면 이마를 한 대 때려준다"라 하는 말은 개구리와 같은 교종의 승려들을 놀려주고 계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상에 대항한다는 의미다.
설화에서 진표는 개구리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라 화두를 얻게 된 것이다. 개구리는 부처의 말씀이 담긴 경전임을 일연은 말하고 있다. 선사들도 경전을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은 경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전 안에서 화두를 얻어 경전 밖에서 얻을 수 있다 생각했다. 이와 같은 의미로 목탁이라는 의미의 잉어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경전을 암송하며 두들기는 목탁은 잉어의 모습에서 유래한다. 한 승려가 잠을 물리치기 위해 연못에 나오니 잉어가 한 밤에도 잠들지 않는 것을 보고 나무속을 비우고 잉어의 모양으로 깎아 잠을 물리치며 목어를 두들기며 경을 암송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설화의 첫 번째 단락은 진표가 교종 승려임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불경을 의미하는 개구리와 잉어라는 것을 떠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 교종의 수행방법에서 선종의 수행방법으로 출가를 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두 번째 단락
금산사에서 숭제법사의 문하에서 3년간 행자 수행을 거쳐 진표라는 법명을 받는다. 스승의 말에 따라 명산을 두루 다니다 찐 쌀 스무섬을 말려 선계산(지금의 변산) 함부로 넘지 못한다는 능가봉 부사의 방장에 들어가 계를 구한다. 3년을 미륵상 앞에서 깨달음을 얻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좌절감에 절벽으로 몸을 던지니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손으로 받아 돌 위에 진표를 놓았다. 하루에 쌀 다섯 홉을 먹고 한 홉은 쥐를 주며 3년간 수행을 했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좌절한 진표는 바위 아래로 몸을 던진다.
푸른 옷의 동자가 날아와 진표를 받아 돌 위에 뉘어 놓는다. 진표는 더욱더 정진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생각하며 돌을 두드리며 수행하자 손과 팔이 꺾어져 버렸다. 어느 날 지장보살이 쇠 지팡이를 두드리며 찾아와 진표의 몸을 쓰다듬으니 손과 팔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지장보살은 진표에게 가사와 발우를 주고 갔다. 진표는 21일간 정진하자 천안을 얻어 도솔천(미륵불이 지상으로 내려가기 전에 설법하는 곳)의 무리들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된다.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찾아와 지장보살이 율책을 주고 미륵보살은 그의 손가락 뼈에 팔八와 구九자를 새긴 패쪽 두 개를 주며 "구는 불법이요 팔은 새로 부처가 되는 씨앗이며, 몸을 버리고 대국왕의 몸을 받았으니 후생은 도솔천에서 날지어다"라는 말을 전한다.
진표의 뜻은 도솔천에서의 후생이 아니라 미륵보살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산사로 옮겨 용맹 정진하니 미륵보살이 찾아와 점찰경 두 권과 간자 189개를 주며 "8 간자는 새로 얻은 묘계妙計요 9 간자는 구족계이니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로 만든 것이니 이것을 뗏목으로 삼아 중생을 구제하도록 하라".
해설
첫 번째 단락이 "출가"를 이야기했다면 두 번째 단락은 "인간의 몸"에 관한 선가의 가르침을 이야기한다. 진표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찾아간 곳은 부안의 능가봉이다. 사람의 몸으로 오를 수 없다는 뜻의 능가봉에는 진표율사의 수행이야기뿐만 아니라 손처사의 수행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부사의 방장에 오르기 전에 동굴 하나가 있는데 그곳을 "손처사의 굴"이라 한다. 이 굴에는 손처사와 관련된 서로 다른 내용의 이야기이지만 두 이야기 모두 몸에 관한 이야기다.
손처사가 둔갑술을 익히기 위해 이 굴에서 수행하려 제자들과 찾았다 한다. 오랜 기간 수행을 했지만 둔갑술을 완성하지 못하자 손처사는 곡식이 떨어져도 수행을 계속했다. 제자들은 손처사의 피골상접한 스승의 모습을 보며 이러다가는 스승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굶어 죽을 것 같아 한 가지 꾀를 내었다. 제자들은 스승의 몸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며 스승을 찾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손처사는 둔갑술을 완성한 줄 알고 몸에 걸쳤던 옷을 벗고 마을로 내려갔으나 손처사의 벗은 몸을 본 마을 사람들에게 얻어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이야기는 진표율사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다. 손처사가 수행을 했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한 좌절 하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죽었다는 이야기다. 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몸을 던진다는 것은 몸을 잊고 몸에서 떠난 깨달음을 의미한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고 다시 깊은 번뇌에 빠져 21일 후 열반에 들어가려하자 제자 가섭이 말리며 중생 구제를 위해 남아줄 것을 부탁한 21일째 되던 날이다. 이후 아무 말 없이 질문에 미소를 지으며 꽃을 들었다 하는 염화미소의 묵언 화답 기간이 57일이었다. 진표율사가 열반에 들어가려 21일 째 몸을 던졌고 청의의 동자가 그를 바위에 올려 놓았다는 것도 부처의 깨달음을 얻은 후 묵언설법 기간인 57일에서 따온 듯 하다.
진표에게 미륵이 주었다는 간자는 수미산의 9산과 8해를 의미하면서 언어유희를 통해 선사상을 담았다. 간자 두 개의 한자 팔八자는 이으면 인人이 되고 나누면 팔다리라는 팔자가 된다. 또 구九자 또한 칼刀도의 언어유희다. 칼은 자기 몸을 베지 못하는 것이다. 칼의 베임은 밖으로 향한다. 어떤 의지가 담기고 자신의 몸을 떠나면 죽음을 가져온다. 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몸을 베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몸을 베는 것이기에 가능하다. 칼이 자신을 벨 수 있다면, 자신의 몸을 베는 듯한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칼은 남을 베는 도구가 아니게 된다. 삼국 전란이 끝나고 수많은 죽음이 펼쳐졌던 한반도에 칼이라는 폭력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진표의 의지인지 일연의 생각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 간자 두 개는 평화를 상징한다. 훗날 이 간자는 진표의 제자 석총에 의해 고려 태조 왕건에게 전해진다.
자신이 할 수 없거나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공자는 말한다. 젊은 사람이 노인에게, 직장에서 직급이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이 예절이라 한다. 이런 것들은 몸에 관한 이념화의 산물이다. 인사를 하지 않으면 예절의식이 부족하다며 비난한다. 오래전 달마대사가 그랬던 것처럼 선가에서 예절은 인간이라는 동일한 생명에 관한 상호성이며 평등성에 의한다. 하지만 요즘은 군대문화의 계급주의와 서열주의에 기반해 이념화된 몸의 예절을 강요하기도 한다. 선가에서는 계급주의와 서열주의에 의한 몸의 이념화를 평등을 허락하지 않는 절벽과 같다고 한다. 절벽은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볼 뿐이다. 진표는 그 절벽에서 자신의 몸을 던졌던 것이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니 진표의 몸은 파란 옷을 입은 동자에 의해 올려졌던 것이다. 송고승전의 진표전을 보면
"진표가 길을 내려오자 골짜기의 높고 낮음이 사라졌다. 사나운 짐승들도 진표 앞에 부드럽고 순하게 엎드렸다. 짐승들도 그러할진대 인간들도 남녀노소 머리를 풀어헤치고 진표 앞에 펼쳐 밟고 지나가게 했다."
강과 바다가 모든 계곡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들보다 낮기 때문이라는 노자의 말과 같다. 진표가 자신의 몸을 낮출 줄 알아 백성들이 그를 높였다는 것이다. 세 번째 단락은 삼국유사에서는 경덕왕의 지원으로 금산사를 창건하게 된다는 간략한 이야기로 전해지지만 민간 설화로 다른 이야기가 덧 붙여졌다.
세 번째 단락
진표가 모악산에 오니 한 명당이 눈에 띄었으나 연못이었다. 연못을 메꾸고 절을 지으려 했으나 어쩐 일인지 메꾼 다음날 다시 처음과 같았다. 꿈에 미륵이 나타나 숯으로 메꿔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 날 한 문둥병 걸린 자가 진표를 찾아 자신의 병을 치료해 줄 것을 부탁한다. 혹은 효심 깊은 청년이 자신의 어머니 병을 낫게 해달라 청한다. 진표는 문둥병 걸린 자에게 연못에 숯 한 덩이를 던지고 목욕하면 원하는 대로 된다 말한다. 그러자 문둥병 환자, 혹은 효심 깊은 청년의 어머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온 나라에 소문이 퍼지며 진표를 찾아와 연못에 숯을 던지고 병을 낫게 했다. 그렇게 연못을 메우고 지금의 금산사를 지을 수 있었다.
숯은 세 가지로 해석된다. 첫 째는 금산사에 있는 점판암으로 된 육각 다층 탑이다. 대체로 석회암으로 불상과 탑, 석등을 만들지만 검은색 점판암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후대에 진표를 기려 세워진 듯하다. 고려 문종 33년(1079년)에 봉천 원사에 의해 세워졌다는 해석이다. 진표율사가 수행했던 변산 능가봉을 가면 점판암을 볼 수 있다. 능가봉에서의 진표율사의 수행과 깨달음을 이곳 금산사에 채웠다는 의미로 점판암 석탑을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는 금산사 중창은 민간에서 어떤 의미였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숯이라 하는 것은 숯처럼 보이는 검은 떡을 말한다. 극락왕생을 위해 지장보살에 바치는 검은 떡으로 해석된다. 지금도 고인의 극락왕생을 위해 49일 동안 불전에 검은 떡을 올린다. 전란으로 죽어간 가족들을 위해 백제 유민이 많이 찾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세 번째는 선가에서의 화두에 관한 이야기다. 어느 승려가 스승에게 화두를 어떻게 붙잡을지 물었다. 그러자 스승은 한로축괴 사자교인韓獹逐塊 獅子咬人을 이야기해 준다. 한나라의 명견이라는 한로(지금의 사자개)는 털이 검고 길어 마치 사자와 같지만 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흙덩이 하나만 던지면 된다는 것이다. 사자는 흙덩이를 던진 사람에게 달려들지만 한로는 흙을 쫓는다며 화두 또한 그와 같이 어리석음으로 흙덩이 같은 말을 쫓지 말고 그 말의 화두가 시작된 것을 찾으라는 말이다.
금산사 설화의 의의
일연은 선문의 개조를 길러낸 진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교승인 진표에게서 선승이 배출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신라 왕조의 지원을 통해서 금산사가 중창되었지만 진표의 의도는 대중들을 진정으로 위로하려 했다는 것이다. 백제의 유민을 평등주의에 의해 다스려져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랬을 수도 있다.
금산사를 중창하여 백제 유민들을 흡수해 나라를 안정시켜 왕의 권한을 강화하려 했으나 경덕왕의 계획은 실패한다. 그리고 또 다른 후삼국시대를 거쳐 왕건의 고려가 개국된다. 민간설화는 전사자를 위로하려 했다는 것을 이야기 형태로 새롭게 구성한 듯하다. 금산사 진표율사의 설화는 평화는 평등주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일연의 고민이 담긴 듯하다. 전란이 끝난 진표율사의 시대에도 그렇지만 일연의 시대에도 몽골군과 무인들에 의한 전란은 이어졌던 것이다.
금산사의 미륵전의 미륵불은 절벽과 같이 우뚝 서 있으며 우리에게 평화와 평등을 지금도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