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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꼭그래 Aug 29. 2018

영화 유전

공포영화는 아니지만, 누군가에게는 공포영화.

유전


아리 애스터 감독의 첫 영화 유전 Hereditary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사찰 이야기가 세속을 벗어난 이야기라면 영화 유전은 세속의 우리들의 이야기다. 단순한 스토리 전개인 영웅물만 만든다며 유럽 영화인들에게 비난받던 할리우드가 이제는 슈퍼히어로물만 만들며 미국 영화인들도 비판하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영화 유전은 할리우드에도 작가주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영화다. 우선 영화가 담은 내용물과 내용물이 무엇에 담겼나를 나눠 봤다.


유전의 내용


원초적으로 인간이 두려워하는 잔혹한 죽음을 담았기에 공포영화라는 장르적 구분을 하기도 한다. 한 가족의 죽음들을 발생하게 한 악령 소환에 관한 것이기에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라 하기도 한다. 영화 유전은 한 가족의 참혹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나이트메어, 13일의 금요일, 헬레이져와 같은 잔혹한 폭력이 담긴 영화도 아니다. 2017년 개봉한 IT과 같이 아이들의 성장영화이면서 공포영화도 아니다. 영화 유전과 비슷한 영화라면 메시지에서는 반전 없는 식스센스와 같으며, 기법에서는 장화홍련과 같은 느낌을 준다.  


영화를 담은 것


잔을 만드는 장인은 술잔과 물 잔을 엄격하게 구분해 만들 것이다. 하지만 잔에 무엇을 담아 마시는 사람에게는 두 구분은 장인처럼 확정적이지 않다. 그리고 잔의 주인이 아니라면 잔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마셔봐야 알 수 있다. 영화 관람자도 잔의 주인이 아닌 사람과 마찬가지다. 관람하는 도중에 영화가 무슨 내용의 어떤 장르인지 구분하게 된다. 마시기를 끝내고 물 잔인지 술잔인지 구별하려는 사람처럼 관람이 끝난 뒤에 영화가 무엇에 담겨 있는지 알게 된다. 내용물을 잔과 일치시키며 뒷맛을 확정하는 것처럼 영화의 제목이 왜 유전 Hereditary인지 알게 된다.


내용


마주침


극장이나 집, 혹은 또 다른 어느 곳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준비할 것이 있다. 몸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먹고 마실 것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관람자와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시선이다

 

 

http://monthlyart.com/portfolio-item/baeknamjune_july-2/

박이소라는 작가가 미국에서 활동할 무렵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해 만들어준 작업공간이다. 긴 테이블 셋과 작은 테이블 하나다. 공간 가운데 무거워 보이는 돌 하나가 놓여 있다. 작가가 돌을 작업장에 놓은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작업장을 사용할 작가들을 가상으로 등장시켜 동선을 그려보면, 작업이나 사색하는 도중에 가운데 공간에서 마주치게 된다.


마주침에는 불편함이 따른다. 친분이 있다 하더라도 서로 자신의 공간을 침범했다는 불쾌감을 가질 수 있다. 성격이나 성향의 문제 이전에 마주침 자체가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돌 하나를 가져다 놓으면 그 불편함의 대상은 사람이 아닌 돌이 된다. 돌 하나를 가져다 놓음으로써 물리적 공간이 심리적 공간이 되는 것이다. 설령 마주친다 하더라도 작가들은 불편함은 돌이 가져가고 작가들은 돌이 주는 불편한 공간을 함께 한다는 유대감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저 한 가운데 돌덩이 같은 것을 제거한다면 무슨일이 일어날까. 영화 유전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


만남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누군가와 끊임없이 만남의 일상으로 살아간다. 일생에 단 한번 마주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체로 긴 만남의 관계 속에 있다. 사람과의 마주침이 많은 대도시 사람들은 익숙한 풍경과 사람을 피해 모든 것들이 새로운 마주침인 여행을 가기도 한다. 사람이 적은 시골은 익숙한 만남으로 하루가 채워진다. 작은 시골 축제에 사람들은 새로운 마주침을 위해 모여들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세상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마주침과 만남에 관한 이야기다. 예수와 부처는 사랑과 자비로 만나라 한다. 유학에서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어른과 아이, 친구, 부부의 만남에 관해서 말한다. 노자는 만남에서 물러남과 나아감의 때를 알아야 한다고 한다. 어린아이와 같이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 마음으로 만나야 한다는 장자의 말도 있다. 맹자는 우연한 마주침에 관해서도 말했는데, 측은지심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쩌면 인간의 모든 이야기들은 우연한 마주침과 정해진 만남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 유전의 배경 공간은 가족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집이다. 생을 마감한 누군가의 공간이 폐쇄된다는 설명 글과 액자와 같은 창문으로 다른 집이자 공간을 바라보며 화면은 시작한다. 이 시선이 영화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설명하고 있다.

이 시선이 끝날 무렵 파리 한 마리가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집이라는 공간은 파리의 자유 비행이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부모의 규율로 이루어진 곳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집에서 누려야 하는 먹고 자는 것을 얻기 위해서 포기해야 하는 자유는 파리처럼 하찮게 취급되기도 하는데 그 규율이 시작되는 것이 집을 오랫동안 사용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남들의 시선 때문인지를 창문을 통해서 내부의 시선과 외부의 시선 모두를 담아낸 장면이다. 감독은 질문과 동시에 답을 해주기 위해 엄마 애니의 작업장으로 향한다.

애니의 작은 집들의 미니어처를 통해 이 가족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을 말하고 있다. 애니는 심리치료센터에서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으로 파탄난 엄마보다 더 행복한 가족을 만들기 위한 결혼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한 가족의 만남은 미니어처처럼 만들어진 것이다.


헤어짐


만남과 헤어짐은 상반된 의미지만 사회에서는 차이가 없다. 만남이 예절이라는 사회 규칙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헤어짐도 공동체의 관습에 따라 이뤄진다. 정신지체인 찰리를 통해서 그것을 말하고 있다. 관에 누워있는 할머니를 보고 있는 손녀 찰리는 감정이나 판단 없이 초콜릿을 먹고 있다. 어른들의 가치판단에 좌우되지 않고 자신의 감각만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정신지체라는 말은 신체와 정신을 분리한 것이다. 하지만 찰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회가 몸과 머리를 분리한 것이지 찰리 스스로는 한 것이 아니다. 찰리의 몸과 머리를 분리한 것처럼 죽음이라는 것도 사회가 규칙을 정해 분리한 것이다. 어른에게는 삶과 죽음이 확연히 구별되지만 찰리의 시선에서는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어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비둘기를 분리한다

찰리는 창문에 부딪쳐 죽은 비둘기의 머리를 가위로 잘라낸다. 찰리의 몸과 머리를 분리한 사회와 비둘기의 머리를 잘라낸 찰리 중 누가 더 잔인한 것인가. 장자 경상초에,


"아이와 같을 수 있어야 한다. 길을 가도 가는 곳을 알지 못하고, 앉아 있어도 할 일을 알지 못한다. 다른 것에 순응하며 그 흐름에 자기를 맡긴다. 이것이 삶을 위하는 것이다.". 만남으로 이루어진 삶을 위해서는 구별이나 차이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흐름에 따라 자기를 맡긴 아이와 같았던 찰리는 머리가 분리된 채 죽는다.  박이소 작가가 가져다 돌덩이 역할을 했던 찰리가 치워진 것이다.


교실 밖과 안을 창문으로 구별한 것은 인간의 생각이다. 인간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투명한 창문에 자유의 상징인 비둘기가 안과 밖을 구별하지 못해 죽은 것과 같이 찰리는 끊임없이 인간 사회의 구별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비둘기를 통해 암시한다.


만남은 사회적 약속을 통해, 같음을 기대하기도 하고 혹은 다름에 의해서 이뤄진다. 만남을 통해서 동일성을 발견하면서도 구별을 통해 차이를 발견하기도 한다. 헤어짐도 마찬가지다.


잊힘과 사각지대


장례식이 끝나고 사용할 사람 없는 어머니 헬렌의 방을 폐쇄한다. 영화 러브스토리 2편에서 올리버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그에게 새로운 사랑인 마시가 그를 바라보며 죽은 제니가 생각나냐고 묻는다. 그러자 올리버는 제니가 생각나지 않아서 슬프다 말한다. 죽음은 한 인생의 폐쇄이자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사랑했던 사람도 지워진다. 집은 떠나간 사람의 흔적을 간직한 듯 하지만 그렇게 많지 않을 수도 있다. 많다 하더라도 시간이라는 지우개가 조금씩 지운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기억은 어떨까.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가족에 대한 생각이 정확한 것인가. 함께 살아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하고, 보지도 못한 사각지대가 있다. 그것이 물리적 공간인 방이 될 수도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 생각이나 마음속에 더 잘 감춰져 있다. 유전에서는 다락방이다.

영화 초반 등장한 자유의 이미지인 파리가 가득한 다락방에서 목이 잘려 없어진 어머니 친구 조안의 시신을 발견한다. 허락되지 못한 자유롭고 은밀한 생각과 기억들이 감춰진 다락방을 발견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말에는 사랑 대신 증오나 미움이 있는 상태가 아니다. 무관심이거나 사랑까지 도달하지 못한 상태일 뿐이다. 가족은 사랑의 정점에 도달된 상태가 아니라 타인보다 무관심과 증오, 미움이 적은 상태일 뿐이다. 가족 구성원은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이 규칙으로 정해졌다 해서 그렇게 되지 않듯이 마음 한 구석에는 미움이 있을 수도 있다. 싫어하는 마음을 은폐하고 감춰진 상태로 가족이라는 틀에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유지할 수도 있다.


증삼은 효성이 지극했으나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장자는 말한다. 부모는 어떨까. 애니는 아들 피터에게 자신의 뱃속에 있을 때 낙태하려 했다고 고백한다. 지금은 사랑하지만 당시에는 낳아 기를 용기가,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부모와 자식 간에 사랑은 꼭 그래야만 하는 규칙이 정해진 것이 아니다.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 그렇게 보이는 경우도 있다.


파이몬과 소크라테스, 너 자신을 알라


솔로몬 왕이 저술했다고는 하지만 중세 르네상스 시대에 쓰이고 1904년 알레스터 크롤리가 정리했다는 추측이 대체적인 책인 마도서 게티아, 솔로몬의 작은 열쇠(The book Goetia, Lesser Key of Solomon)라는 악령 소환에 관한 마도서에 등장하는 72 악령 중 9번째 악령인 파이몬을 아들 피터의 몸으로 소환하기 위해서 영화상의 모든 죽음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끝으로 영화는 끝난다.


솔로몬의 작은 열쇠에서 파이몬은 루시퍼의 가장 충실한 신하이며 아름다운 미소년의 모습으로 낙타를 타고 다니는 악령이라 기록하고 있다. 파이몬에게 지식을 배우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된다고 한다.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악으로 규정되었던 시대가 있었다. 서양철학의 시작이 된 소크라테스 시대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철학적 질문은 던지며 그들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의심의 시작은 자신에게서 출발해야 함을 말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이후에 그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어려운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중세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신의 정신에 복종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선에 가깝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삶이 절대적 기준이 됐기에 외부의 모든 것들은 악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다. 로마법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법도 절대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어떤 기준이 절대성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름을 인정해야 대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장자에 송나라 모자장수 이야기가 있다. 예식 때 쓰는 모자를 월나라에서는 파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들은 송나라 모자장수는 자신이 가진 모든 모자를 가지고 월나라에 갔다. 하지만 단 한 개도 팔 수 없었다.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변발하고 문신을 해 모자를 사용할 수도 없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송나라 관습과 규칙에 따르자면 예식에서 무조건 모자가 필요했으나 월나라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송나라 모자장수는 다름이라는 것을 월나라에 가서야 알게 된 것이다.

죽은 동생을 죽였다는 자책감으로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피터가 유리창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온통 슬픔으로 채워진 것 같은 마음과 생각 한 구석에는 지체장애인인 동생이 죽어 더 이상 데리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귀찮은 존재의 사라졌다는 기쁨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장면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장례식장에서 돌아온 애니가 남편 스티브에게 했던 "내가 더 슬퍼해야 했을까?"라는 말은 철저히 자기기만적이다. 애니와 마찬가지로 유리에 비친 피터의 미소 짓는 모습은 타인의 시선만을 의식하고 타인의 시선에 의해 자신이 만들어지는, 당신의 자화상은 아닌지 묻고 있다.


신의 정신이라 생각하며 마녀라는 주홍글씨를 새겨 죽였던 것도 신의 정신인가를 물었던 르네상스 시대의 질문을 감독은 지금 다시 하고 있다. 고대와 중세시대보다 더 정신적으로 성숙해졌다고 생각하는 현재 사람들이 가진 생각이 신의 정신이 기준이 되었던 중세시대처럼 관습, 규칙, 법이 지금도 절대적인 기준이 되고 선이라는 생각은 유전자와 같이 반추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닌지에 관한 메시지로 뼈 때리고, 골 때리고, 최종적으로는 유전자까지를 때리려는, 누군가에게는 감독의 메시지가 공포가 될 수 있는, 영화 유전이었다.


레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 첫 번째 노래 챕터 9편 중에서


"늙은 대양아, 기하학의 근엄한 얼굴을 유쾌하게 만드는, 너의 조화롭게 둥근 형태는 인간의 작은 눈을 너무 많이 떠오르게 한다만, 그 눈이란 것이 왜소하기로는 멧돼지의 그것과 같고, 둥그란 윤곽의 완벽함으로는 밤새들의 그것과 같다. 그런데도, 인간은 어느 세기에나 자신이 아름답다고 믿어왔다. 나로 말하면, 인간은 오직 자기애 때문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믿지만, 실제로는 아름답지 않으며, 스스로도 그 점을 미심쩍어 하리라고 추측한다. 인간이 제 동류의 얼굴을 왜 그렇게 경멸하며 바라보겠는가?  나는 너에게 경례한다. 늙은 대양아! - 중략


인류의 세계 대가족이란 것은 가장 빈약한 논리에나 어울리는 한개 유토피아이다. 또한 네 풍요로운 젖가슴을 보노라면, 배은망덕의 개념이 스스로 드러난다. 창조주에게 배은망덕하기가 자신들의 가련한 결합의 열매를 내버리고도 남을 정도인, 수많은 부모들이 금방 생각나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 경례한다, 늙은 대양아!"


옮긴이 황현산. 황현산 선생님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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