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표정
영화 보케는 아주 간단한 스토리다. 아이슬란드로 여행을 간 두 커플(라일리와 제나이)만 남겨진 뒤의 이야기다. 이 영화를 통해서 전달하려는 것은 스토리가 아니라 관객 마음의 표정은 어떤지 묻고 있다. 영화도 사람의 얼굴처럼 표정을 가지고 있다. 영화 보케는 어떤 표정일까. 위아래로 뒤집힌 포스터는 인간의 그림자처럼 상반된 생각과 시선도 같은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표정 중에서 가장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슬픔과 기쁨의 표정이다. 영화는 이 둘이 서로 다른 표정이 아니라 서로에게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울고 있다면 슬픔 자체가 아니라 언제가 있었던 기쁨에서 슬픔이 출발하고,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은 언젠가 있었을 슬픔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피카소의 우는 여인의 슬픔은 상실된 누군가와 함께했던 기쁨에서 출발한다.
피카소의 우는 여인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나치의 폭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스페인 게르니카의 비극을 담았다. 연인 도라 마라가 모델이기도 하지만 정확히는 게르니카 여인들의 슬픔이다. 장자 천운편에 중국의 4대 미인이라는 서시의 일화가 있다. 냇가의 물고기조차 넋 놓고 구경했다는 아름다운 서시가 속병(심장병이란 추측을 한다)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고 다니자 마을 여자들이 서시처럼 인상을 하면 아름다운 줄 알고 모두 찡그리고 다녔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문을 닫고 집 밖에 나오기를 꺼려했으며, 누군가는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서시가 찡그리게 된 이유를 모른 채 서시의 표정만을 따라 한 것이다. 우는 여인은 서시의 이야기와는 반대로 게르니카 여인들의 슬픔을 도라 마라도 함께한 것이다.
슬픔이라는 외부적 사건을 어떻게 내면화하는지 표현했다. 여인은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고 있다. 오른쪽 눈은 위로 뜨고 신을 향하고 있으며, 왼쪽 눈은 현실의 세계이자 사건인 게르니카의 비극을 향하고 있다. 눈으로 누군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고 있다. 눈에서 시작된 슬픔은 아래로 향해 입과 손으로 전해진다. 손으로 얼굴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얼굴을 감춘다. 여인은 자신의 형상을 감추려 한다. 형상을 감춰도 보이는 슬픔의 감정을 그린 것이다. 코와 눈, 입은 크게 확장되어 있다. 여인은 감정의 통로를 지나 내면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보케도 사람들이 사라진 현실을 보며 내면을 향하고 있는 한 여인과 외부로 향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한 쌍의 남녀가 아이슬란드에 도착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남자가 버스에서 꺼낸 것은 롤라이플렉스라는 카메라다. 지금의 SRL 카메라가 아닌 눈이 두 개인 TLR카메라다.
아래쪽 렌즈는 필름에 기록할 렌즈고 위 쪽은 뷰파인더로 필름에 담길 상을 확인하는 렌즈다. TLR의 뷰파인더는 심도 조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사진을 찍어서야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명확하게 찍히기도 하지만 흐리게 촬영될 수도 있다. 영화의 제목 Bokeh도 촬영할 때 초점의 대상물 이외의 주변부를 흐리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같으면서도 다른 두 개의 시선이 다른 대상을 바라보면 상대방의 초점은 Bokeh효과로 전달된다는 의미를 가진 카메라를 등장시키며 영화는 시작된다.
도착한 아이슬란드의 풍경을 감상하고 한 성당을 찾는다. 성당에서 신부는 아이슬란드에 어떻게 사람들이 살게 됐는지 이야기를 해준다. 노르웨이 왕 하랄 호르파게르의 폭정을 피해 온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위대한 여행가 잉바르가 찾기도 했단다. 위대한 여행가는 다름 아닌 노르웨이 작가인 잉바르 암비에르센이다. 그의 작품 "엘링 천국을 바라보다"는 자폐증으로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던 엘링이라는 청년이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신부는 두 남녀에게 아이슬란드를 찾은 것이 현실에서의 도피인지 고립을 위한 것인지 물었던 것이다.
성당 안에서 유리화를 보고 있다. 자신들의 감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길러진 감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연의 일부분을 보기 위해 여행을 간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선들은 문명에 기대어 자연을 바라본 것이지 자연의 감각으로 자연을 본 것은 아니다. 마치 동물원에서 사자와 원숭이를 보고 아프리카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부분의 여행이 그렇듯 인류 문명의 감을 자연으로 확장시킨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자연의 감각은 어떤 것인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레버넌트"에서 주인공 휴 글래스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자 죽은 말의 배속에서 겨울밤을 이겨낸다. 자연은 생존을 위한 감각만이 숨을 쉬게 한다. 영화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혼자서 불을 지피고 먹을 것을 찾으며, 외부로부터의 위험에 민감해지는 것이 자연의 감각이다. 고립은 문명에서는 외로움이라는 의미지만 자연에서는 외부로부터의 위험에서 멀어진 은밀한 안전을 의미한다. 하지만 영화 보케의 두 주인공은 사람들이 사라진 곳에서 여전히 문명에 기대어 만들어진 감각만을 채운다. 쇼핑몰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마음대로 가져가며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즐긴다.
문명 안에서의 고립은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상태가 아니라 의존적인 상태다. 오늘 만난 누구 때문에 분노와 슬픔을 느끼게 되지만 그런 사람들과도 알게 모르게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 맛있게 먹은 먹거리를 생산한 사람일 수도 있고.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옷을 만든 사람일 수도 있다. 문명 안에서 감각은 의존적으로 지속된다. 문명은 감각의 제국이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공유하기도 하며 새로운 감각을 창조하기도 한다. 그런 감각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통제된다. "약은 쓰다"라는 말도 자연 상태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말이다. 쓰다는 맛의 감각은 대상물이 산화되어 상했거나 불에 태워져 아무런 영양분이 없는 것이다. 많은 감각은 자연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문명이 제공한 감각에 익숙해져 간다. 어쩌면 문명이라는 것은 감각의 제국이 아닐까?.
주인공 라일리가 꽃을 꺾어 도로 중앙선을 줄타기하듯 걸어간다. 자연의 감각에서는 꽃은 의미 없는 것이다. 꽃이 지고 열매가 열리는 것에서 의미가 시작된다. 하지만 문명에서의 시선으로는 아름다움의 절정을 상징한다. 철조망 너머 자연을 보는 시선은 철저히 문명의 한 조각 시선을 통해서 손에는 꽃을 들고 보고 있다. 여주인공 라일리가 성당을 찾아가 신을 찾는 것은 내가 아닌 자신의 감각 창조자를 찾는 것이다.
자연에서는 아주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창조자는 철저히 자신이어야만 한다. 라일리와 제나이는 어떤 곳에서 추락한 비행기 잔해를 발견한다. 라일리는 그것을 버려진 쓰레기이며 죽은 것이라 한다. 하지만 제나이는 그 안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버려진 비행기 안에서 하룻밤을 안전하게 창조한 것이다. 자연에서 창조란 물건이나 도구 외에도 하루의 생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나무가 버린 낙엽을 깔거나 덮고 자야 한다. 자연에서 인간 삶은 죽은 것들에 의해서다. 아직 자연의 감각을 받아들이지 못한 제나이와 라일리에게 문명의 감각은 줄어가고 원하지 않아도 자연의 감각을 받아들여야 하는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전기는 끊기고, 식량은 떨어져 간다. 남주인공 제나이는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만 여주인공은 거부한다. 제나이와 라일리의 마음이 갈라질 무렵 한 노인을 발견한다.
라일리가 가족을 그리워하며 바다 저편 수평선 너머를 바라본다. 자신이 있는 아이슬란드는 Bokeh 처리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도달할 수 없다. 바다라는 거대한 경계가 가로막고 있다. 라일리는 제나이에게 끊임없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둘의 고립의 현실을 벗어나고자 둘은 아이슬란드에 사라지지 않은 사람을 찾아 나선다. 한 노인을 발견한다. 세상에 자기들만 남겨진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제나이는 노인에게 기쁘다고 한다. 그러자 노인이 대답한다.
"우리 각자는 혼자야. 한 명 한 명이 있는 것이지.
각자 자신만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
우린 각자 바다 위에 홀로 있어."
노인의 말은 이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바다의 섬들은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경계는 없다. 섬 자체는 경계가 없지만 인간들에게 있어서 섬은 바다라는 경계가 존재한다. 굶주림을 피해 육지로 제주인들이 떠나자 조선왕조는 제주도에 출륙금지령을 내린다. 제주인들은 절대 제주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경계는 문명의 것이지 자연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공간을 함부로 무례하게 침범해서는 안 된다. 연인이나 부부는 경계를 낮추거나 없애 물리적, 심리적 공간을 함께하지만 결국은 각자의 공간에 돌아가 머문다. 가족이 보고 싶다는 라일리의 말에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웨일스 말에 이런 말이 있지. 히래스
귀향할 수 없는 고향을 슬퍼한다는 말이지.
히래스에는 다른 뜻도 있는데 과거의 고향을 갈망할 뿐이라고."
작은 섬이 파도와 바람에 깎여 바다 밑으로 가라앉듯 노인은 깨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노인을 묻어주고 제나이는 라일리를 한 강가에 데려간다. 자연은 현재이고 끊임없이 재창조하려 노력한다고 제나이는 말한다. 임시 거주지로 돌아온 라일리는 노트북에서 한 통의 이메일을 확인한다. 아이슬란드에 오기 전 제나이의 메일이 그제야 도착한 것이다. 제나이가 잠에서 깨어 라일리를 찾지만 그녀는 없다.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두 주인공은 같으면서도 달랐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사유라는 하나의 본질이기도 하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다. 정 중앙에 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려져있다. 플라톤의 손은 관념의 세계인 위를 향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적인 평면을 가리킨다. 피카소의 우는 여인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손의 방향과 일치한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말에 따르면, 서양철학은 소크라테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과 그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양철학의 양대 축인 것 처럼 두 감독은 남성과 여성의 시각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스승과 정 반대의 사상을 펼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하학을 의미한다. 그래서 라일리는 형이상학적 세계로의 진입인 죽음으로 향하고 라일라의 시신을 남겨두고 떠나는 제나이는 형이하학으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라일리가 과거와 미래를 갈망하는 존재라면 제나이는 현재의 존재다. 인간이 자연을 과거와 미래로 볼 수도 있지만 자연은 늘 현재만이 존재한다. 과거에는 이랬을 것이다. 미래에는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자연에게 의미 없는 말이다. 철저히 현재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하루 종일 먹을 것을 찾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찾지 못할 경우도 있다. 다음 날, 그리고 다음날은 찾아오지만 자연에서 하루는 늘 현재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를 선사(선종의 승려)들은 이렇게 말한다. "물은 멈추고 사람이 흐르네". 사람의 시선에서는 다리 위에서 흐르는 물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물의 시선으로 보자면 다리로 끊임없이 사람이 흐르는 것이다. 다리에서 보는 계곡의 물은 늘 현재다. 계곡의 발원지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멀리 바다에 도착한 옛 물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다리 위에서의 물은 늘 현재다. 영화도 현재의 표정이다.
인간의 표정에는 다양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메시지가 상대방에게 정확히 전달되지 않겠지만, 우리는 늘 타인의 얼굴에서 메시지를 읽는다. 말을 하지 못해도 표정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사람의 표정은 현재의 감정에 따라 나타난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과거의 표정을 소환하지만 전과는 달라진 현재의 표정이다. 언짢음, 분노, 짜증, 기쁨, 유쾌함, 슬픔 등은 모두 외부세계와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같은 공간에 있다 할지라도 개인마다 느끼는 감정은 다르다.
표정에는 다양한 메시지가 있지만 대체로 간단한 몇 단어로 해석하고는 한다. 마주하고 있지만 상대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데, 어떤 표정은 긴 문장과 같기 때문이다. 그녀의 죽음으로 차 안에서 그제야 알게 된 라일리의 표정을 짓는 제나이의 표정으로 영화는 끝난다. 제나이는 뒤늦게 라일리의 과거 슬픔, 절규를 자신의 얼굴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다양한 표정을 가진 영화를 보면서, 지친 노새처럼 웃기도 하고 늙은 고양이처럼 울기도 한다. 영화가 어떤 표정을 가지고 있는가는 당신의 표정에서 알 수 있다. 타인의 감정과 함께하려는 당신의 표정처럼 영화의 표정은 당신의 얼굴에 쓰여진다. 선명하지 않지만 다양한 표정의 영화 Bokeh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