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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꼭그래 Sep 08. 2018

영화 버드맨

영화에서 인물 그리기

흥성대원군, 난

유럽 고딕 시대 사람들의 내면은 조선시대 선비들과 비슷하다. 그들의 내면의 시선은, 나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신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봐야 했다. 고딕 시대를 지나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서야 인간의 시선이 나타나게 된다. 동양에서도 그런 사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 어떤 특정 시기에 사상의 흐름이 거대하게 바뀌었다면 동양에서는 혼재해 있었다. 서양처럼 흐름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상과 엮여 변화된다는 점에서도 다르기는 하다. 엮어진 사상의 큰 줄기가 조선시대에는 유학이었다.


흥선대원군의 난은 내면의 시선을 형상화했다. 유학사상에 따라 세상을 봐야 했던 조선 선비들의 시선과 일치한다.  자연의 것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지만 선비들이 그렸던 매난국죽들은 홀로 존재한다. 홀로 존재하면서도 사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유학자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 사군자다.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남이 보건 말건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사상으로 내면을 완성하려 했다. 유럽 중세 사람들이 신의 시선으로 자신과 세상을 봤던 것처럼, 조선의 선비들도 신체의 시선이 아니라 사상의 시선이었다. 관직에 나가 높은 자리에 오르기도 했고 그것으로 귀양을 가거나 목숨을 잃기도 했던 조선 선비들의 모습을 닮은 한 남자의 이야기, 영화 버드맨이다.


 

강희안, 고사관수도

출처, 한국학 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3629#


나를 만나다


남곽자기가 은궤(팔받침 있는 방석)에 기대앉아 하늘을 우러러보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으니, 멍한 것이 자신조차 잃은 듯하였다. 시중을 들던 제자 안성자유가 스승인 남곽자기에게 말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스승님 모습이 죽은 고목과 같고 마음은 타버린 재와 같습니다. 지금 안석에 기대고 계신 모습은 전에 안석에 기댄 모습과 다릅니다."


남곽자기가 말했다.


"언아 좋은 질문을 하였다. 방금 나는 나를 잃었는데 너도 그것을 알았느냐? 너는 사람의 피리소리는 들었어도 땅의 피리 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땅의 피리소리를 들었다 해도 하늘의 피리 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장자 제물론편에서 남곽자기와 제자 안성자유의 대화를 통해 땅과 하늘의 피리소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피리소리는 무엇인가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땅과 하늘의 피리 소리가 들렸던 것은 자신을 잃은 존재라야 한다. 자신을 잃는다는 것은, 피리가 소리를 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를 비워 냄에 있다. 피리는 빈 막대기에 구멍을 뚫은 것이다. 선사禪師들은 수행이 부족한 제자를 꾸짖을 때 구멍 난 가죽 자루라 한다. 반대로 수행의 완성을 상징하는 것은 피리다. 사찰 벽화인 심우도를 보면 소년이 소의 등에 올라타 피리를 불고 있다. 삼라만상의 모든 소리, 진여의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의 피리소리는 어떤 소리를 낼까.


남곽자기가 말한 인간의 피리소리는 인간이 내뿜는 숨소리를 의미한다. 자신을 비워낸 어딘가에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인간의 피리소리인 것이다. 땅의 피리소리는 땅이 내뿜은 바람소리다. 바람에게 있어서 대지의 구멍 난 것은 있음의 없음이다. 숲에 나무가 있지만 바람에게는 구멍 난 것들이다. 나무가 크면 클수록 더 큰 구멍이다. 그 소리들이 각자 자기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을 하늘의 피리소리라고 말한다. 영화 버드맨은 인간의 피리소리, 자신을 비워낸 자기 내면의 소리, 인간의 피리소리를 들으면서 시작한다.


나를 완성시키는 진실


추락, 날개를 잃다


조선 초기 문인화가인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를 보면 붓을 찍어 눌러 강렬한 선으로 사물을 표현하는 절파풍의 그림이다. 조선 후기 달마도로 널리 알려진 선종화의 대가 김명국 또한 절파풍으로 사물을 표현했다. 절파 기법은 강렬한 선을 통해서 내부의 밀도를 높인다. 영화에서도 주인공 리건 톰슨의 외부적 환경을 보여주면서 그의 내면의 밀도를 관객들이 짐작하게 한다.


리건 톰슨, 한 때 버드맨이라는 블록버스터 영화로 잘 나가던 할리우드 배우였지만 지금은 빈털터리 신세로 전락한 비상을 꿈꾸는 배우다. 영화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버드맨의 특별한 점은 서양인들이 자신들에게 오래도록 해 왔던 이성과 감성의 양립이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 리건이 추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진실이라는 날개를 잃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자신의 추악한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 날개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추락하면서 그의 내면에 가득 찬 것은 거짓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했던 진실을 회피였던 리건 톰슨의 내면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진실을 모르고서 거짓을 말할 수 없는 법"이라 했다. 영화는 거짓을 모르고서는 진실을 알 수 없다는 방식으로 리건 톰슨의 모든 거짓을 진실과 만나게 하면서 드러낸다.


진실이라는 날개



타원형의 나뭇잎은 대칭이 아니다. 폭이 좁은 곳에서는 좌우의 연결이 나란하지만 폭이 넓은 곳은 어긋나 있다. 아마도 비바람에 접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다. 인간의 내면도 대칭적이지 않다. 이성과 감정이 동시에 내면의 시선을 구성해서 사물을 판단하지 않는다. 감성이라는 것도 인간 내면의 한 축을 담당한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오랜 이성의 시대를 지나야 했다. 인간 이성이 만든 이데아의 세계가 이를 갈며 잠자는 사자와 같이 잔혹성이 이성에 깃든 것을 목격한 뒤에 감성은 이데아를 향한 방향키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리건 톰슨의 행위들이 드러난다.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는데, 이름을 곤이라 한다. 그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변해 새가 되는데,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 역시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한 차례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의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대해가 거칠어져 태풍이 일면 남쪽 끝에 있는 어두운 바다로 향하는데,
이 어두운 바다를 천지라 한다.


장자 소요유편의 곤과 붕의 이야기다. 물고기가 새가 되고 그 큰 새는 태풍을 만나야만 하늘을 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리건 톰슨은 새로운 날갯짓을 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맞는 환경과 날갯짓이 필요하다. 그것이 자신보다 크거나 작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장자에서는 흐름에 맡겨야 한가고 한다. 흐름에 맡긴다는 것이 쉬운 것 같지만 끊임없는 자기 변형이라는 힘든 과정을 통해서다. 자신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우고 진정한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자기가 어떻게 생겼다는 것을 알아야 변형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새가 날아오르기 위해서 날갯짓이 자유로운 크기의 공간을 알고 이륙을 위한 도약의 거리를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눈은 자신을 바라볼 수 없으며, 칼은 자신을 벨 수 없다, " 선사들은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하고 행위를 정당화한다. 범죄자조차도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정당화와 합리화로 가득 찬 인간의 내면은 외부의 시선을 통해서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다. 결혼기념일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하며, 딸이 태어나는 순간에 함께하지도 않았으며 그들에게 관심조차 없었던 자신을 발견한다. 오로지 높이 날던 버드맨으로 살았던 것이다. 높이 날 수 있었던 것은 아름다운 깃털이 달린 자신의 날개로 힘찬 날갯짓으로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강한 바람에 날려 다닌 것이 진실이었다.


비상, 두 날갯짓


모든 것은 타인의 판단이 아닌 그 자체로서 빛난다


명체불리名體不離,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꽃 한 구절처럼 사마천이 살았던 후한 시대에는 이름과 신체는 운명 공동체였다. 이름을 욕보이면 신체도 손상된다는 생각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죽은 뒤에야 본명이 밣혀지기도 했다. 죽기 전에는 본명 대신 휘를 사용하는데 그것을 기휘라 했다. 사마천역시 명체불리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사기에서 유일하게 본명이 아닌 기휘로만 등장하는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뿐이었다.


버드맨과 로건 톰슨은 분리될 수 없는 운명공동체다. 처음에는 버드맨이라는 과거의 영광을 거부하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로건은 알아차린다. 무지하며 타락했던 버드맨 시절의 자신을 받아들인다. 평론가에게는 혹평을 듣고 발가벛겨진 채 거리를 활보한다. 허영이 만들어 준 깃털을 벗겨진 그는 리건 톰슨도 버드맨도 아닌 어리석은 한 인간일 뿐이었다. 진실이 추악하다고 그것을 거부할 것인가. 이제 로건 톰슨은 자신을 발견하고 이제 변형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된다. 그리고 리건과 버드맨 모두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날아오름.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버드맨에서 인물을 그리는 방법


영화 버드맨이 흥미로운 점은 인물을 그리기에 있다. 절파법과 같이 누군가의 거친 대사를 통해서 결정된다. 각각의 캐릭터는 거칠게 그려지기도 하고 부드럽게 그려지기도 한다. 출연 분량이 많건 적건 자신들의 크기로 빛나는 캐릭터로 화면을 채운다. 그렇게 그려진 인물들이 한 화면을 장식하는 것은 여러 다른 그림을 보는 것과 같이 풍부한 색채로 가득한 전시관에 있다는 착각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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