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오후 3시쯤, 노브랜드 버거 알바를 끝내고 버스 정류장 앞 카페에 앉아 박상영 작가의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라는 에세이를 펼쳤다. (팔뚝에는 여전히 불고기 소스가 튀어 검은 점들로 굳어 있었는데, 집에 가서 씻으면서 알았다) 에세이는 작가가 잡지사를 다니며 글을 쓰던 갓생 시절부터 퇴사 후 젊은 작가 상을 받기까지 매우 솔직하게 보여준다. 내가 사랑하는 박상영 작가의 '통찰력있는 날티'가 그의 인생에 대한 서술에서도 여김없이 들어나 있었다. 역시 그의 일상은 나와 닮아 있는 점이 많았다. 어딘가 빈약한 가정구조, 사회생활에 대한 환멸, 상황에 대한 무심한 시선, 일반적임에 가지는 은근한 반항심. 그리고 허기. 허기를 다짐한 뒤 무너지는 자신에 대한 자책.
그의 챕터별 마지막은 항상 다짐으로 끝난다. 기필코, 오늘 밤은 굶을 것이라고. 그의 우울에 대한 이야기는 내 번아웃과 닮아 있어 떠올리고 싶지 않던 과거가 스물스물 기어올라왔다. 그래서 늦은 밤, 5월부터 이른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집 소파에 앉아 있던 나는 딱 195p에서 책을 덮었다. 우울한 표정으로 상큼한 연분홍 표지를 바라보며. 너무 읽기 힘들어져 덮었다. 생각없이 볼 수 있다는 게 에세이라는 건, 거짓이었다.
젊은 비만 여자로서 잔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나 또한 허기와의 싸움을 한다. 우울증까진 아니어도 '우울하다'라는 감정을 어깨에 이고 살던 대학시절의 밤은 그의 글처럼 다짐 뒤에 수십번을 무너졌다. 그리고 아래 한 문장은 학교을 다니던 몇 년의 밤과 닮아있었다. 정확히는 왕따를 당했던 12살 이후의 밤부터 지금까지.
< 아몬드 열 주먹을 입안에 쑤셔 넣는다고 한들 산불처럼 번지는 이 허기를 해소 할 수는 없다 >
박상영처럼 나도 안다. 그래, 우린 안다. 이게 '그' 허기라는 게 '그' 허기가 아니라는 걸.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 허기를 1시간 안에 채울 수 있는 건,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환경호르몬이 내포된 따끈한 음식이었다. 나는 외로울 때 따뜻한 음식을 먹었다. 삼키면 식도부터 위까지 따뜻해졌고, 어쩌면 식도 옆 왼쪽 어딘가에 존재할 심장까지도. 거짓된 순간의 온기를 쫓았다. 당연하게도 온기에 대한 대가는 내 존재였다. 나는 사람들에게 '긁지 않은 복권'이라는 존재가 되었다. 박상영 작가 또한 비슷한 상황에 여러 번 놓였고, 그 때에 대해 쓴 그의 글에 깊이 공감했다. 내 생각이 그대로 활자에 옮겨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직장을 다니던 시절 그는 ‘자신에게 긁지 않은 복권’이라 칭하는 동료 직원 A에 한대 맞은 기분을 느낀다.
‘상대방은 누구보다도 절실히 자신의 현실을 살아가는 중인데 타인이 왜 함부로 그 사람을 무엇이 되지 못한 존재로 규정하는 것인가’
2024.06.01
백번 맞는 말이었다. 홀린듯이 그 페이지를 찍어 몇일간 나의 카톡 배경사진으로 두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책을 읽는 자신을 자랑하는 것 같았지만. 내 카톡 프로필을 보고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할지 상상해봤다. 아마도 많은 글자를 보고는 질려하며 바로 프로필을 나가겠지, 하며 머릿속으로 코웃음 쳤다. 비웃음은 아니고 사진을 배경으로 한 내 의도 따위는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을 거란 허망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카톡으로 지인들과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이 자리에서 다 읽고 말 것이라는 다짐을 저버릴까봐 얼른 휴대폰을 내려놨다. 다시 책을 붙잡고 쭉 - 글을 읽었다. 시선을 내리고 올리며 페이지를 넘기는 것을 반복했다. 깜빡하고 헤드셋을 집에 두고와 음악이 없는 허전함을 견디면서.
2시간이 지나고, 무덤덤히 책을 덮어 내려놨다. 다 읽은 여운을 문 너머 하늘 빛을 보며 정리했다. 박상영 작가는 역시 단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충족감을 느꼈다. 박상영 작가는 자신의 구멍들을 모두 받아들이며 그렇게 살아가기로 한다. 설령 좀 모난들, 그게 자신임을 받아들이며. 여전히 늦은 밤 참지 못하고 배달 음식을 시키고, 맞는 바지가 없어도. 작가로서 성공한 삶이지만 달라진 것 없는 자신의 삶에 의문을 갖고 있어도. 양극성 장애를 진단받고 먹어야 할 알약이 너무 많아도. 연애를 몇년이나 쉬고 있어도.
자신을 받아 들였다. 그럼에도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결심하며.
그의 위트에 한차례 다시 반하며 나 또한 다짐했다. 나도 오늘 저녁은 간단히 먹고 간식은 먹지 말아야지.이렇게 결심하는 것은 어쩌면 나를 위한 다짐일지도 모른다. 이 허기가 사라지고 오로지 나로 채워져 평온할 밤이 오길 바라는. 그런 결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확신이 없어도, 이른 아침 더부룩한 배를 안으며 다짐한다. 오늘 밤은 굶기로. 그 평온은 머지 않아 당장 오늘 밤이 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