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이전까지 출장 준비물
출장 좀 다녀봤다 하는 4050, 잠시 눈을 감고 과거를 떠올려 보세요.
팬데믹 이전, 비장한 각오로 공항에 나서는 여러분의 뒤를 묵묵히 따르던 막내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의 한쪽 손에는 꽤 큰 박스가 아슬아슬하게 들려 있었죠. 팬데믹 이후로 외국 출장이 많이 줄었다지만, 팬데믹 직전까지, '잉크젯 프린터'를 출장 준비물로 챙겨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프린터를 넣은 박스, 카트리지 몇 개, A4 용지 묶음까지. 이렇게요.
낯선 도시의 호텔 방에 도착하면,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었습니다. 호텔 방에서 비좁은 책상에 노트북과 프린터를 겨우 올리고, 자리가 없으면 바닥에 놓고 엉킨 유선 케이블을 풀며, '위이이잉…' 소리를 내며 인쇄를 시작하는 프린터. 그 소리는 고요한 호텔 방의 평화를 깨뜨리는 한편, 중요한 문서가 인쇄되고 있다는 안도감을 주기도 했었죠.
그렇게 한 번의 인쇄를 위해 장엄한 의식을 치렀던 우리에게, 요즘 구매할 수 있는 손바닥만 한 휴대용 프린터는 마법처럼 느껴집니다. '진작에 이런 게 나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출장에 프린터까지 가지고 다니던 이유가 있었겠지요.
첫째, 출력물에 진심인 임원님들 때문이었습니다. 출력된 종이로 이메일과 문서를 읽는 일이 습관이 된 세대의 분들은 프린터가 필요했지요.
둘째, 실수를 줄이기 위한 전투였습니다. 꼭 임원들의 니즈가 아니더라도, 수시로 바뀌는 중요한 계약서 워딩이나 데이터는 모니터로만 보면 불안하죠. 한 글자라도 틀리면 큰일 나는 중요한 순간, 출력해서 밑줄 긋고 메모하며 실수 '제로'에 도전해야 했습니다. 프린터는 단순한 기기가 아니라, 꼼꼼함의 상징이었던 셈입니다.
셋째, 보안은 생명이었죠. 중요한 문서를 출력할 때 호텔 비즈니스 센터의 공용 프린터를 사용하기는 꺼림칙했습니다. 오직 나의 랩톱과 나의 프린터만이 연결되는 끈끈한 유선 연결은, 소중한 정보의 외부 유출을 막는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지금은 굳이 무거운 프린터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갤탭/아이패드의 세컨드스크린/사이드카 기능이면 아쉬운데로 넓은 화면을 쓸 수 있지요. 그리고 디지털 펜으로 문서를 읽고 교정보는 일도 편리해졌구요.
그리고, 저는 출장 다닐 캐리어 안에 분무기와 바지걸이를 꼭 가지고 다녔답니다. 분무기로 셔츠나 바지에 물을 뿌려서 걸어두면 다음 날 다림질 안해도 주름없는 옷을 입을 수 있었거든요.
10년 전 잉크젯 프린터가 '출력물'과 '보안'을 책임졌다면, 요즘 출장 준비물은 '효율'과 '편안함'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죠. 여러분에게는 어떤 특별한 출장 꿀템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