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RBP 3
코로나 팬데믹 때부터 판교 사투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판교에 많은 ICT 사업에 투자자들이 줄을 섰고, 고임금을 받던 개발자들이 미래 산업의 핵심으로 주목받던 시기였습니다. 우리말에 영어 단어가 풍부하게 사용되는 모습을 판교 사투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영어 단어에 우리말 조사만 붙어서 쓰는 표현이 너무 많아서 알아듣기 힘들다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그런데, 판교 사투리의 모습은 10년 전, 20년 전 광화문 사투리와 너무 비슷했답니다. 몇몇 광화문, 여의도 외국기업의 서울 오피스 모습입니다.
" 케대표님, 마상무님 인비하는 디너니까 컨펌하기 전에 ROI 신경 쓰지 말고 좋은 데로 3개 리스트업해줘. 금요일에 브라운백 워킹런치로 인터널 ‘미팅 포 미팅’ 어레인지하고, "
" 지난번에 SME 피보팅 이슈는 준비하지 못했던 것처럼 팝업하는 이슈 없도록 업데이트 챙겨주고, "
*케대표 : 검은 머리 외국인 코메리칸, 케빈 박 대표
*마상무 : 마크 상무, 서울에 파견 근무 중인 30대 후반 금발의 찐 미쿡 동료
*인비 : Invitation, 접대하러 가는 식사 자리
*ROI : Return On Investment, 효과나 가성비를 고려한다는 말
*브라운백 워킹런치 : 브라운 색깔 종이 가방에 샌드위치나 점심 메뉴 사 와서 회의하면서 먹는 점심 겸 회의
*인터널 ‘미팅 포 미팅’ : 중요 고객사 방문 회의를 위한 사전 내부 회의
*피보팅 : Pivot, 급격한 사업 방향 전환
*팝업 : Pop-Up,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튀어나와 당황시키는 일이 발생.
영어가 많다고 문제를 지적하는 게 아닙니다. 특정한 분야의 일을 하는데, 그 분야에 익숙한 사람들끼리 의사소통하는데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라면 충분하지요. 요즘은 서울 사무실에서 두 명의 한국인이 완전히 영어로만 소통하는 경우도 있지요. 외국인들과 소통할 일이 많은 업종이고, 당연히 어려서부터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많이 채용되는 분야에는 사실 한국인끼리 영어로만 소통하는 모습도 어색하지 않아 보이기도 하고요.
판교 사투리도, 오래전부터 있었던 광화문 외국기업의 사투리도 문제라고 지적할 수도 있지만 영어가 많이 필요한 각각의 비즈니스 여건을 고려하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도 될 만한 일처럼 보이고요. 의사소통이 필요한 사람들끼리 그 분야의 일을 해결하는 데 효율적이라고 생각되는 일인데, 뭐가 맞는지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편리와 효율을 위해서 점점 더 영어 표현을 우리말에 넣어도 좋을지… 아니면 더 이상은 곤란하니 한글화해서 쓰자는 노력도 필요한 지점인지…
그런데, HRBP는 판교 사투리 혹은 예전의 광화문 외국기업 사투리와 다릅니다. 쓰임새는 마치 관련된 당사자들만 알고 쓰면 되는 판교 사투리 같지만, HRBP라는 명칭은 판교 사투리처럼 쓰이면, 효과적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HRBP의 일은 HR 업무만 하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일도 아니고, 회사 조직의 모든 구성원들과 소통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HRBP의 업무는 평소에 HR 업무나 경영 이슈를 다루지 않는 영업 현장이나 연구소 연구원, 백오피스에서 반복적인 일을 효율적으로 빠르게 해내야 하는 구성원까지 모든 구성원과 인터뷰하고 여러 부서의 구성원들과 협업해서 자료를 수집하는 일이 주요한 업무입니다.
그래서 HRBP라는 명칭이 익숙한 글로벌 기업이 아니라, 사업장이 대부분 국내에 있는 기업이라면 퍼뜩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 HRBP라는 명칭 말고 다른 이름이어야 하지 않을까… 오래 고민했었던 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파트너’라는 단어를 어떤 부서의 이름, 혹은 담당 구성원의 역할로 생각하기에 어색함이 있습니다. 부서나 담당자의 역할이 이름으로 바로 이해되지 못하면, 소개를 하면서 추가로 설명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런 이런 일을 하고 있어요’라고 설명이 길어지면 비즈니스 미팅과 회의에 비효율이 발생하게 되겠지요.
첫째, 우리말로 ‘파트너’라는 용어는 조직 내부의 구성원이라기보다 외부의 주체처럼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파트너’, 혹은 ‘비즈니스 파트너’는 외부의 거래처, 수요처, 고객사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의 뇌피셜인데, 어떻게 느껴지나요? HRBP를 외부의 자문이나 컨설팅 형태로 작동하는 경우가 있지만 매우 예외적인 사례입니다. 일반적으로 HRBP는 기업 조직 안에 있는 부서나 담당자를 말하는데, 외부의 어떤 주체를 말하는 느낌을 주는 ‘파트너’라는 말은 어색하고 꼭 들어맞는 표현은 아닌 것 같습니다.
둘째, ‘BP, 비즈니스 파트너’라는 표현은 조직 안에서 사용될 때, 역할에 있어서 모호성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영어로 된 부서명을 생각해 보면 ‘비즈니스 플래닝’은 기획업무팀, ‘비즈니스 스트래티지’는 전략기획실같이 의미가 느껴지지만, ‘비즈니스 파트너’라는 일을 하는 부서는 우리 기업에서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비즈니스 파트너’라는 역할이 그대로 부서의 이름으로 쓰였을 때, 역할과 기능에 대한 명확성이 부족해진다고 느껴집니다.
셋째, ‘파트너’라는 의미는 조직 안에서 사용될 때, 공동 대표라는 의미도 담겨있다고 생각됩니다. 쉬운 예로, 대형 법무법인 로펌에서 임원급 간부 변호사를 ‘파트너’ 변호사라고 명함에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파트너 변호사가 되면 법인의 수익에 대한 지분을 요구할 수 있는 지위를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요. 파트너라는 의미에는 이렇게 ‘공동 대표’급의 등기 임원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기업 조직의 HRBP는 그런 지위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역할과 지위에 대해서도 오해와 인식 부족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문화적 차이, 언어적 차이에 의해서 HRBP라는 중요한 역할에 대해서 불필요한 설명을 줄이고, 조직 안에 역할을 쉽게 인식할 수 있게 HRBP라는 명칭을 다른 이름으로 바꿔서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제대로 번역되지 않거나,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직책을 채택하면 HRBP라는 역할의 효과가 저해되고 구성원 사이에 혼란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생겼습니다.
외국 기업의 사례를 찾아서 기록해두고, 생각하고, 다시 검색하면서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피플 파트너’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HRBP 아래의 소 부서를 활용하는 기업의 형태가 있었습니다. HRBP 부서가 확장되면서 별도로 ‘People Partner’라는 업무 부서를 둔 기업은 구글, 유니레버가 있었고, 애플은 HRBP라는 명칭 대신 ‘People Business Partner’와 ‘Employee Relations Partner’라고 합니다. 아마존은 HRBP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고, 역할은 인력 계획 수립 및 리더십 자문과 같은 전략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P&G는 HRBP라는 기능을 활용하는 것으로 읽히는데 이름으로 좀 심심하게도 Human Resources Manager라는 명칭을 씁니다.
국내 기업 중에서 삼성과 LG, 일본에서는 Mitsui가 HRBP라는 명칭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더 많은 기업의 사례를 발견했지만, 대부분의 외국 기업들은 ‘파트너’라는 의미를 경영자와 임원에게 경영과 관련한 이슈에 대해 솔루션을 연구하고 자문해 주는 역할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어적 차이 때문에 어색함을 느끼는 상황인데, 영어나 유럽어를 쓰는 기업들은 조직 안에서 ‘파트너’라는 어감이 자문, 컨설팅, 솔루션 제공과 같은 역할로 인식되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봅니다. 많은 사례를 읽어도 그렇게 판단되네요.
그래서, 결론은
1. 구성원들이 HRBP를 쉽게 인식하는 곳이라면 그대로 쓴다.
2. 구성원들이 쉽게 인식할 수 있는 명칭으로,
‘인재경영담당’, 인재경영자문’ + 팀/실/부/TF
‘인재전략솔루션’, ‘인사전략솔루션’ + 팀/실/부/TF
‘조직개발솔루션’, ‘조직혁신연구’ + 팀/실/부/TF
3. 무엇보다 HRBP의 기능 중에서 지금 우리 조직의 HR 관련한 문제 사항에 대해 솔루션으로 확보하고 싶은 기능을 파악해서, 명칭에 반영하되 무조건 HRBP라는 명칭만 고집하지 않는다. 다른 기업의 HRBP 롤 모델을 연구하되 도입 시에는 우리 조직에 맞게 수정해서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