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위임 1] '알아서 하라'고 말하고 '왜 그랬냐'고 따지는가
"박 대리, 이번 승진자 리더십 교육, 자네가 PM이니까 전권을 줄게. 예산? 신경 쓰지 말고 아주 획기적으로 한번 뒤집어 봐. 내가 밀어줄 테니까."
대한민국 회의실에서 매일 벌어지는, 아주 익숙한 풍경입니다. 리더는 ‘임파워먼트(Empowerment)’라는 대단한 신뢰의 징표를 건네듯 비장하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회의실을 나서는 박 대리의 표정은 묘합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머릿속은 복잡한 계산으로 분주하죠.
'전권이라... 강사료 10만 원 더 쓰는 것도 눈치 봐야 하고, 커리큘럼 하나 바꾸면 "이게 최선이야?"라는 질문이 돌아올 텐데. 마음대로 하라면서, 나중에 강의 평가 점수 낮게 나오면 그 책임도 온전히 내 몫이라는 뜻일까?'
냉정하게 말해봅시다. 권한의 한계는 안개 속에 있는데 책임의 무게만 선명하다면, 그것은 신뢰가 아니라 '불공정 계약'에 가깝습니다.
'조용한 퇴직'과 '저몰입'의 시대, 리더들은 만병통치약처럼 '임파워먼트'를 꺼내 듭니다. 참 좋은 단어입니다. 매불쇼 최욱 형이 싫어한다는 그 ‘예쁜 말’이라는 생각이고요. 권한위임, 임파워먼트라는 말은 비즈니스 현장에서 평범한 리더들의 도피처가 되기도 합니다.
글로벌 현장에서 다양한 국적의 리더들과 일하며 느낀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언어의 해상도’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적 맥락에서의 '권한위임'은 다분히 감성적입니다. "우리가 남인가", "믿는다", "주인의식을 가져라"... 뭔가 감성을 터치하려는 시도라고 의심해야 됩니다.
하지만 냉혹하리만치 효율을 추구하는 글로벌 오피스는 다릅니다. 그들은 '믿음(Trust)'을 이야기하기 전에 '정의(Definition)'를 먼저 요구합니다. 리더가 생각하는 위임의 범위와 실무자가 생각하는 범위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회색지대(Grey Zone)', 프로들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글로벌 프로들의 룰은 명쾌합니다. 마치 영토를 확정 짓듯 선을 긋습니다.
"여기까지가 당신의 영토(Territory)입니다. 이 안에서는 당신이 CEO입니다. 하지만 이 국경선을 넘을 때는 반드시 입국 비자를 신청(Referral)하고 승인(Approval)를 받으세요."
지도가 선명합니다. 내 권한 안의 일은 스스로 마침표를 찍고, 밖의 일은 절차에 따라 승인을 구합니다. '적당히', '눈치껏' 같은 모호한 단어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반면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요? 국경선이 없으니 고도의 '눈치 게임'이 시작됩니다. 리더는 "주인의식 가지고 알아서 좀 하지"라고 답답해하고, 실무자는 "이것까지 했다간 깨질까 봐"라며 몸을 사립니다.
감성을 걷어내고 '문서'로 말하라
구성원이 진짜 주도적으로 일하게 만들고 싶으신가요? '임파워먼트'는 교과서, 학자들의 논문, 경영 저널에서나 쓰는 예쁜 말일 뿐입니다.
툭 까놓고 말해, 회사는 고상하게 논문이나 쓰는 곳이 아닙니다. 인사팀, 교육 담당자, 영업 관리자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피똥 싸며 비굴하게라도 어떻게든 성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처절한 현장의 '선수'들이잖아요. 그런 선수들이 쓰는 확실한 도구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Authority Grant'입니다. 글로벌 용어라 낯설 수 있지만, 아주 일반적인 문서이고 실체는 아주 심플합니다. 각각의 모든 구성원 손에 하나씩 딱 쥐어주는 '권한 문서'입니다.
리더의 기분에 따라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기분파 위임'이 아니라, 명확한 범위(Scope)가 박힌 '공식 문서'만이 구성원을 움직이게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놓치고 있던, 신뢰를 실체화하는 강력한 도구 ‘Authority Grant’. 이것을 어떻게 설계하고 활용해야 하는지, 다음 편에서 그 '사용 설명서'를 펼쳐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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