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위임 2] 프로들이 일하는 방식, Authority Grant
'임파워먼트'라는 단어가 얼마나 비겁하게 쓰일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뜯어봤습니다. "믿고 맡긴다"는 말 뒤에 숨은 모호함이 결국 현장의 선수들을 '눈치 게임'의 늪으로 빠뜨린다는 사실, 이제 다들 공감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뭘까요? 글로벌 기업의 프로들은, 그 피도 눈물도 없는 성과주의 조직들은 도대체 어떻게 일할까요?
그들은 '마음(Mindset)'이 아니라 '문서(Document)'로 일합니다. 그 문서의 이름이 바로 'Authority Statement(권한 기술서)'입니다. Authority Statement는 상위 카테고리에 있는 것이고, 하위 문서의 하나로 ‘Authority Grant’를 두고 활용합니다.
우리는 채용할 때나 인사 평가할 때 R&R(역할과 책임, Roles & Responsibilities)이나 JD(직무 기술서, Job Description)를 봅니다. 그런데 냉정하게 봅시다. 그건 회사가 구성원에게 바라는 '해야 할 일(Duty)'의 목록입니다. 즉, 숙제 리스트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에게 "이 고지를 점령해(Mission)"라고 명령만 내리고, 병력은 얼마나 쓸지, 무기는 뭘 쓸지 권한을 주지 않는다면 그건 말이 안되는 상황이지요.
Authority Grant는 장수에게 '칼자루'를 쥐여주는 행위입니다. "교육 예산 500만 원까지는 팀장 승인 없이 박 대리 전결", "계약서 특약 사항 수정은 법무팀 경유 없이 영업 담당자 판단 허용". 특히 규모가 있더라도 매년 반복되는 업무라면, 전년도와 비교해서 변동 범위가 작으면, 올해 담당자가 전권을 가지거나, 범위를 넘어가면 재검토하는 업무의 절차를 정해두면 되는 일입니다.
이렇게 선명한 '결정권(Decision Right)'이 박힌 문서가 바로 Authority Statement입니다. 이 문서가 손에 쥐어지는 순간, 박 대리는 더 이상 팀장의 눈치를 보며 기안서를 썼다 지웠다 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예산과 범위 내에서 자신이 CEO처럼 결단하고 실행합니다.
JD가 '해야 할 숙제'라면, Authority Grant는 그 숙제를 끝내기 위해 지급받는 '실탄'이자 '무기'입니다. 무기 없이 전쟁터로 내몰면서 "주인의식을 가져라"라고 하는 건, 리더의 직무유기입니다.
이 문서의 진짜 매력은 구성원의 성장(Growth)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 데 있습니다.
글로벌 기업의 10년 차 과장은 2년 차 사원보다 단순히 월급만 많은 게 아닙니다. 그의 Authority Statement가 훨씬 길고, 두껍고, 강력합니다. 신입 시절엔 10만 원짜리 비품 하나도 결재받아야 했지만, 10년 차가 되니 수천만 원 프로젝트를 전결로 처리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구성원은 매년 갱신되는 이 문서를 보며 "아, 회사가 나를 이만큼 더 신뢰하는구나. 내 영토가 이만큼 넓어졌구나"를 눈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백날 말로만 "김 과장, 많이 컸네"라고 칭찬하는 것보다, 전결 규정 한 줄을 늘려주는 것이 백배 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됩니다. 성장의 증거가 '말'이 아닌 '권한의 크기'로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문서는 리더가 은혜 베풀듯 하사하는 걸까요? 절대 아니죠. 현장의 선수들은 권한을 요청(Request)하고 협상(Negotiate)합니다.
1년 동안 현장에서 굴러본 박 대리는 압니다. "팀장님, 현장에서 강사 섭외할 때마다 결재 올리느라 타이밍 다 놓칩니다. 내년에는 강사 섭외 전결권을 주십시오."
이때 리더는 건건이 간섭하는 '시어머니'가 아니라, 1년에 한 번 큰 틀의 운동장을 그려주는 '가이드'가 됩니다. "좋아, 대신 예산 초과할 때만 나한테 미리 사이렌 울려(Escalation)."
이렇게 합의된 문서는 서로를 자유롭게 합니다. 실무자는 승인을 받기 위한 보고서를 쓸 시간을 아껴 일에 몰입하고, 리더는 마이크로 매니징의 지옥에서 탈출해 진짜 전략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우리 조직을 점검해 볼 시간입니다. "우리는 자율적인 문화를 가졌다"고 자부하시나요? 아래 5가지 질문에 답해 보십시오. 하나라도 "No"가 나온다면, 죄송하지만 당신의 조직은 아직 '아마추어'입니다.
[Document] 권한의 범위가 리더의 기분이 아닌, 명확한 '문서'로 존재하는가?
[No Reporting] 상사에게 보고하지 않고, 스스로 종결(Self-approval) 지을 수 있는 업무가 있는가?
[Visible Growth] 연차가 찰수록 연봉뿐 아니라, 전결 권한의 범위도 눈에 띄게 확장되는가?
[Request & Approve] 권한은 일방적 하달이 아닌, 구성원의 요청(Request)에 의해 합의되는가?
[Safety Net] 권한 내의 실패는 비난받지 않으며, 애매할 땐 언제든 조언(Consultation)을 구할 안전망이 있는가?
믿음은 감정이 아닙니다. 시스템입니다. 구성원을 진짜 프로로 키우고 싶다면, 따뜻한 말 한마디 대신 명확한 'Authority Statement' 한 장을 건네줄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