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위임 3]
저는 국내 대기업에 입사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국내 대기업 최종 면접까지 합격하고도, 저는 번번이 입사의 문턱에서 좌절해야 했습니다. 발목을 잡은 건 역량도, 인성도 아닌 채용의 마지막 관문, '신체검사 결과지'였습니다. 2000년대 초중반엔 그랬어요. 지금은 다행히 법으로 그런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건강 지표가 당락을 가르는 기준이 되지 않는 곳은 오직 유럽과 미국의 기업들 뿐이었어요.
덕분에 저는 꽤 이른 시기부터 소위 '수평적'이고 '자율적'이라는 서구권 기업 문화를 자연스럽게 경험하며 커리어를 쌓아왔습니다. 대기업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상황은 저에게 강제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너무 아픈 일이라 좌절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 이후로 오히려 외국계 기업에서 더 만족하면서 일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다 다시 외국계 기업에서 외국계 기업으로 이직한 입사 첫날, 제 책상 위엔 업무용 노트북과 함께 요즘은 좀처럼 보기 힘든 묵직한 파일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두께가 거의 한 뼘은 됨 직한 그 파일 안에는 Guidelines, Guidance, Authority Statement 등이 적힌 문서 뭉치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어요.
솔직히 입사 후 첫 6개월의 심정은 그랬습니다. 이 회사는 모든 업무의 결정 권한을 토 나올 정도로 꼼꼼하게 문서화해 두고 있었습니다. 고객사에 보내는 이메일이나 공문 발송 시 거쳐야 할 체크리스트는 기본이었죠. 법인카드로 결제한 커피 한 잔이 '접대비'인지 '회의비'인지 구분하는 기준이 명시되어 있었고, 심지어 업무 현장 사진을 기록으로 남길 때의 앵글과 해상도에 대한 지침까지 있었습니다.
처음엔 이것이 개인의 자율성을 해치는 '비효율의 극치'이자 '관료주의의 끝판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입사 1년 차가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저는 이 빽빽한 문서들이 저를 옥죄는 족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이것만 외워서 지키면 업무 효율이 높아진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면서 일했으니까요.
한국 사회가 유독 사랑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입니다. 언뜻 들으면 실무자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달콤한 칭찬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프로페셔널의 세계에서 이보다 비겁하고 위험한 단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센스 있게 처리해'라는 말 뒤에는 "구체적으로 지시하기 귀찮으니 네가 알아서 하고, 만약 결과가 잘못되면 책임은 네가 져"라는 리더의 무책임함이 교묘하게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명확한 위임 규정이 없는 조직일수록 시스템의 부재를 개인의 '센스'나 '눈치' 탓으로 돌립니다. 기준이 없으니 실무자는 상사의 기분이나 의중을 살피느라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아야 했고, 결과에 대한 평가 역시 상황에 따라 널뛰기 마련이었습니다. 평가… 여기가 제일 문제지요.
반면, 두꺼운 서류 파일 속의 그 문서들은 역설적으로 저에게 완벽한 심리적 안정감(Psychological Stability)과 자유를 주었습니다. 사실 그 많은 문서 어디에도 '매뉴얼'이라는 딱딱한 표현은 없었습니다. 제가 입사 초기의 부담감에 짓눌려 그것을 지루한 매뉴얼로 인식했을 뿐이었어요. 자세히 들여다본 그 서류 뭉치는 권한 위임의 범위와 승인 신청 절차, 그리고 이후의 업무 프로세스를 상세한 예시와 함께 알려주는 '권한 위임을 가장 자세하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멘토'였습니다.
"이 계약서에 내가 서명해도 되나?" 규정을 펼칩니다. 제 권한 범위예요. 그러면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즉시 결정하고 실행하면 됩니다. 책임 소재와 업무 범위가 예리한 수술용 칼로 자른 듯 명확했기에, 불필요한 사내 정치나 감정 소모가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그어진 선 안에서 저는 누구보다 주도적인 주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어떨 땐, 내가 CEO 처럼 일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을만큼 업무에 몰입하고 있구나를 느낄 수 있었답니다.
이러한 '문서 기반의 위임(Documented Delegation)'은 현대 조직론에서도 강력한 효율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전 직원이 100% 원격 근무를 하는 실리콘밸리의 유니콘 기업 깃랩(GitLab)은 '핸드북 퍼스트(Handbook First)'라는 철학 아래 2,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사내 핸드북을 운영합니다. 그들은 "핸드북에 없는 내용은 업무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단언합니다. 상사가 자고 있어도, 동료가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직원들은 누군가의 '허락'이나 '센스'를 기다릴 필요 없이 핸드북에 명시된 절차에 따라 즉시 업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개인의 감에 의존하지 않는, 시스템이 보장하는 진짜 자율입니다.
제가 겪은 그 꼼꼼한 매뉴얼과 엄청난 두께의 문서는 저를 감시하기 위한 CCTV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낭떠러지로 떨어질 걱정 없이 트랙 위를 전속력으로 질주하게 해주는 튼튼한 가드레일이었습니다. 두꺼운 분량으로 문서화된 권한 위임 자체가 멘토였고 동기 부여였으며, 궁극적으로 업무 몰입을 이끌어준 핵심 요소였습니다.
진짜 프로의 자유는 모호한 '알아서'와 ‘알잘딱깔센’이 아니라, 칼같이 정리된 '규정'과 ‘권한위임’ 위에서 춤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꼼꼼하게 문서화된 권한 위임, 그것은 비효율이 아니라 조직이 구성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세련되고 프로페셔널한 형태의 배려입니다.
[명확성] 권한의 범위가 '구두'가 아닌 '누구나 열람 가능한 문서'로 정의되어 있나요?
[실행력] 실무자가 규정된 권한 내에서는 상사의 '재확인' 없이 즉시 결정을 내릴 수 있나요?
[안전감] 위임 규정이 구성원에게 '책임 추궁의 공포'가 아닌 '보호받는 안정감'을 주나요?
[속도] 매뉴얼이 불필요한 보고 단계를 줄이고, 업무 처리 속도를 높이는 가속 페달인가요?
[멘토링] 시스템 문서가 신규 입사자에게 업무의 기준을 알려주는 '가장 친절한 사수' 역할을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