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ol as a cucumber
리더십을 이야기할 때 선장이나 장군을 소환하는 식상한 방식은 재미도 없고 설득력도 떨어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리더십을 '쿨한 오이(Cucumber)'에 비유해 저를 단숨에 설득했던 어느 미국인 상사가 있었습니다.
30대 초반, 미국 동부의 오피스에서 경쟁사의 파격적인 공세로 팀 전체가 패닉에 빠진 채 무거운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대형 클라이언트와의 계약 갱신을 앞두고 터져 나온 예상치 못한 공격에 회의실의 공기는 얼어붙었고, 팀원들은 탈진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죠. 그때였습니다. 상사가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복잡한 엑셀 수식과 아이디어 쥐어짜기에 지쳐있던 10명의 팀원을 다독이는 말이었지만, 당시의 저는 그 '오이', ‘Cucumber’라는 단어 앞에서 멍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팀내 유일한 외국인이자 파견근무자, 즉 외국인 노동자였고, 영어 실력은 딱 10등, 꼴찌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야 동료들을 통해 Stay Cool as a Cucumber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위기의 순간 리더가 먼저 'Cooooool'한 평정심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팀의 긴장을 누그러득이고 멈췄던 사고 회로를 다시 돌리게 만드는 미국식 리더십의 핵심이라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접해온 리더십은 대개 '히딩크호'나 '홍명보호' 같은 선장, 혹은 전장의 장수 이미지였습니다. 리더란 모름지기 거창한 책임을 짊어지고 비장하게 앞서나가야 한다는 부담스러운 서사였잖아요. 하지만 현대 오피스라는 전쟁터에서 진짜 필요한 리더십은 뜻밖에도 마트의 채소 코너에 있었습니다.
상상을 해봅시다. 대형 갱신 계약의 입찰은 1시간 남았고, 클라이언트는 가격 경쟁력을 호소하는 이메일을 '전체 회람'으로 보내왔습니다. 이때 팀원들의 눈은 단 한 사람, 리더의 얼굴로 향합니다. 리더의 안색이 창백해지거나 같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면 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됩니다. 하지만 리더가 마치 방금 냉장고에서 꺼낸 오이처럼 서늘하고 담담하게 "자, 일단 커피 한 잔 마시고 순서대로 점검합시다"라고 말하는 순간, 팀원들의 요동치던 심박수는 안정을 찾습니다.
현대의 조직은 마치 '디지털 압력솥'과 같습니다. 성과 지표, 실시간 피드백, 끊임없는 변화라는 증기가 가득 차 있죠. 여기서 리더의 역할은 압력솥의 '추'가 되는 것입니다.
너무 꽉 막혀 있으면 솥이 터지고(Burn-out), 너무 헐거우면 맛있는 요리가 되지 않습니다(Low performance).
리더는 적절한 타이밍에 김을 빼주고, 열기를 조절하며, 그 안에서 재료들이 서로 잘 어우러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최고의 리더는 본인이 가장 뜨거운 불 위에 있으면서도 팀원들에게는 그 열기가 직접 닿지 않게 '냉각판' 역할을 자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팀원에게도 때로는 자신에게도 stay cool as a cucumber를 말하는 것이 미국인 멋진 저의 상사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Cool as a cucumber"가 결코 무관심이나 냉소(Cynical)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겉은 차갑지만, 그 안에는 목표를 향한 뜨거운 집요함이 있어야 합니다.
팀원들이 진짜 따르는 리더는 무색무취의 차가운 로봇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이 갱신 계약이 왜 중요한지 알고, 우리가 해낼 수 있다는 걸 확신해"라는 뜨거운 비전을 품고 있으면서도, 위기 앞에서는 누구보다 차분하게 길을 찾아내는 '온도 차가 있는 리더'입니다. 이를 심리학에서, 리더십 교육에서 '정서적 지능(EQ)'이라 부른다고 배우기도 했습니다.
처음 리더가 된 사람들은 대개 '불타는 고구마'가 되기 십상입니다. 열정 과다로 팀원들을 들볶거나, 작은 실수에도 불같이 화를 내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서 리더는 점점 '오이'의 지혜를 배웁니다. 내가 흔들리지 않아야 내 사람들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그 단순한 진리 말입니다.
당황스러운 순간이 오면 속으로 외쳐보세요. "I'm staying' cool as a cucumber!" 이 한마디가 우리를 대단한 카리스마의 리더로 만들어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팀원들이 먹고 힘낼 수 있는 가장 맛있는 냉면을 만드는 냉면의 킥, 오이 토핑이 될 수는 있겠지요. 2026년식 한국의 리더십에는 장수, 선장이 아니라 오이가 맛을 내주는 맛있는 상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