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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 김홍재 Mar 07. 2020

친구가 변했다

멕시코

"고갱니~임"

백화점이나 호텔, 마트에서 자주 듣는 말인데, 멕시코를 여행하면 '세뇨르, Senor'라는 말이 같은 뜻이다. 호텔에서도 '세뇨~르', 타코 식당에서도 '세뇨~르', 택시를 타도 '세뇨~르'였다. 영어로는 'Sir' 아니면 'Mr.'인데, 우리말로 그냥 '고갱니~임'이다.

멕시코에 도착하고 3일째 되는 날, 기념품 가게에서 '솜브레로, Sombrero'라고 부르는 멕시코 전통 모자를 샀다. 그림자를 말하는 스페인어 '솜브라, Sombra'에서 만들어진 명칭이다. 모자챙이 크고 폭이 넓기 때문에 그림자를 만드는 챙의 기능이 충실할 뿐만 아니라 예쁘기도 했다. 기념품 가게에 들러 모자를 구경했던 이유는 항상 무더운 멕시코 날씨 때문이었는데 강렬한 태양을 피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가게 주인아저씨는 가격을 흥정할 때까지 '세뇨~르'라고 불렀다. 그런데 모자를 사서 쓰고 가게를 빠져나올 때는, '아미고, amigo'라고 불러주었다. '아미고'는 스페인어로 친구라는 뜻.

이후로 줄곧 솜브레로를 쓰고 멕시코를 여행했는데, 열이면 열, 모두 '아미~고'라고 불러주었다. 길을 걸으면 웃으면서 '아미~고'라며 엄지 척 날려주는 사람도 있었다. 모자 하나로 알지도 못하는 나를 '아미고'라고 부르는 것은 좀 이상했다. "나를 언제 봤다고?" 친구라니. '고갱님'보다 확실히 더 듣기에는 좋지만 '친구'라는 말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닌데..., 멕시코 전통의 모자를 쓰고 있으니 반갑고 예쁘게 봐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언제 봤다고' 친구라니.

사실 우리도 비슷하다. 실제로 만난 적이 없는데도 온라인에서 서로 인친, 페친을 반갑게 부르는데 이게 시간이 꽤 지나면 진짜 친구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페친의 강아지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소식을 보면 내 마음도 짠~해지는 날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식당에서 '밥 한잔'하는 인친의 피드나 포스팅에는 댓글도 달게 된다. 주말이나 명절에는 인사말도 꼬박꼬박 챙긴다. 학창 시절의 베프보다 소식을 더 자주 주고받으니 실제로 '랜선 우정'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멕시코에서 경험한 '나를 언제 봤다고?' 보다 더한 얼굴도 모르는 랜선 친구와도 잘 지낸다. 친구가 변했다.

멕시코의 아미고도 친구이고 와이파이를 타고 교류하는 랜선 친구도 친구가 되지만, 베프라고 부르는 변치 않을 '진짜 친구'가 있다. 그런데 '베프'도 변한다. 3년마다 베프는 달라진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고, 남자들은 10년마다 베프가 변한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중학교 때 공부보다 친구 만나러 가는 학원에는 놀아주는 학원 친구가 있었고, 고등학교 때는 단짝 친구도 있었다. 대학시절 같은 과, 같은 동아리 베프도 있었다. 토익이나 취준 스터디, 밥터디를 하면서 매일 보는 베프까지. 베프도 종종 바뀌곤 했다. 매일 출근하면 담배 친구, 외국으로 출장 가면 '마이 스모킹 버디'도 있다. 베프도 변했다.

그래도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처럼 '진짜 친구'는 따로 있다. 그런데 '진짜 친구'도 변한다. 어려운 일을 겪어봐야 '진짜 친구'를 마음으로 감별할 수 있기 때문인데, '진짜 친구'를 감별할 만큼 어려운 때는 정말 드물다. 친구를 감별하기 위해서 고난이 오기를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려울 때'라는 광범위한 표현을 쓰지만 실제로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로 대부분 한정된다. 그럴 때 친구는 여유가 있으면 조금 더,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도와줄 수 있는 만큼만 도움을 주는 정도가 된다.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진짜'라는 말이 불변의 진리라면, 친구가 어려울 때, 운이 없어서 나도 그만큼 어려운 경우에 경제적인 도움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진짜 친구'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인데 그건 아니니까... 예전보다 넉넉해진 우리는 친구를 감별할 만큼 경제적으로 극단의 상황에 놓이는 경우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런 상황에 놓이더라도 가족이나 친척의 도움을 받지 친구로부터 어마어마한 도움을 받는 경우는 잘 없는 것 같다. 나이가 들면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겨도 감추려는 성향도 강해지니 '진짜 친구'를 감별할 기회는 점점 더 줄어드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기준은 좀 구식 기준이 된다. 물론 어려울 때 '좀 & 잘' 도와주는 친구는 너무 고맙고 마음의 위로가 되지만, 두 번째로 좋은 '진짜 친구' 정도가 된다.

그럼 요즘 세상에 첫 번째 '진짜 친구'는?

진심이 통하는 친구이다. 뻔한 말이지만 그렇다.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진짜 친구인지 감별할 기회는 만나기 어렵지만, 진심이 통하는 진짜 친구를 감별할 방법이 있다. 감별하는 방법도 쉽고 간단하다. 친구의 소식을 듣고 10초만 생각해보면 된다. 할아버지의 도움이나 엄빠 찬스로 강남 아파트에 신혼집을 차리는 친구를 보며 배가 하나도 안 아프면 '진짜 친구'로 인증된다. 뚜껑이 옵션인 차를 사거나, 독일제 SUV 자동차를 새로 사서 뿌듯해하는 친구를 두고 10초만 생각해 보아도 된다. 우리 아이보다 성적이 좋은 아이를 둔 친구를 보고 하나도 속이 하나도 안 상하면 '진짜 친구'이다. 친구가 좋은 일이 있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있다면 진심이 통하는 '진짜 친구'이다. 요즘 세상에는 이런 일을 통해서 진짜 친구를 감별해 낼 수 있다.

세상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진짜 친구?'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일이 지금 보다 많았던 과거에 더 결이 맞는 표현이었다. 진심이 통하는 친구. 어려운 상황이 와야 감별의 기회를 가지고 인증할 수 있었던 과거의 '진짜 친구'와 결이 다르다. 10초만 생각하고 느낌을 찾아내면 '진짜 친구'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진심이 통하는 친구는 좋은 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는 친구이다. 내 양심이 그렇게 답을 준다. 그런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진짜 친구'는 쉬운 것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는 멕시코의 '아미고'처럼 모두가 친구이거나, 아니면 '진짜 친구'는 갈수록 더 어려운 일이 되는 것 같다. 아주 아주 가끔 배가 아프다. 친구가 좋은 동네의 아파트를 사거나, 차를 독일제로 바꾸면.

PS) 몇 마리 안 남은 친구들과 요즘 핫한 톡의 주제는 역병이다. 역병 때문에 너무 심심하고 답답한 줄 잘 안다. 술 한잔 마시자고 퇴근 시간 즈음에 간 보는 톡을 날리는데 역병이 물러갈 때까지 좀 기다려주기 바란다. 알겠냐고? B군, K군 !!! 너거들이 강남 아파트로 이사 가도 배 안 아플 자신 있다고. 이 눔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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