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bin 김홍재 Apr 21. 2020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미코노스, 그리스

학생 시절의 나는 꽤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항상 1등을 목표로 성문이를 만나 영어 공부를 하고, 정석이와 수학 공부를 했다. 우선 순위로 외워야 하는 영어 단어책은 화장실에도 가지고 갔으며, 개념을 찾고 원리를 알아내려 수학책을 한 권 더 사서 공부했다. 가끔 1등을 하기도 했지만 고3 시절 건강의 이상을 발견하고 두 번이나 입원해버렸으니 수능에서 전교 1등, 반에서 1등과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 중고등학교 6년의 마지막을 망쳤으니 그동안 수많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서 1등을 위해 애를 쓴 것도 허사가 되어 버렸다. 공부로 1등도 몇 번 해본 10대 시절의 끝에 맛본 적잖은 좌절감에 우울한 20대를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건강이 다시 발목을 잡았다. 졸업을 하고 어렵고 힘들다는 대기업 입사시험에 합격하고 최종 신체검사 결과지를 제출하고 '불합격'이라는 쓰고 더러운 맛을 본 적도 있다. (지금은 신체검사를 이유로 당락을 결정짓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렇게 나를 내친 대기업의 제품은 영원히 불매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을 만큼 합리적으로 삐뚤어지기도 했다. 덕분에 커리어는 모두 그런 신체검사 결과로 당락을 결정하지 않는 외국계 회사로만 채워지게 되었다.  


졸업하고 커리어를 시작해도 1등에 대한 욕심과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스트레스와 압박은 벗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실적 1등이나 인사고과 1등을 향한 정글 속의 진짜 경쟁이 시작되었다. 졸업을 하고 회사에서 일을 하면 1등에 대한 압박은 오히려 더 커진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숫자로만 평가받는 실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회사 생활에서 1등을 못하면 당연히 스트레스가 따라붙는다. 1등 실적을 내어도 항상 올라가기만 하는 다음 연도의 목표치는 내내 부담이었다. 그러다가 1등을 못하는 연도에는 확 줄어드는 보너스로 철저하게 응징을 당하기도 했다.  




2등 미코노스와 1등 산토리니


그리스의 수많은 섬 중에 여행자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1등은 산토리니이다. 이전에 쓴 데로 산토리니는 제대로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여행지였다. 수백 장의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한 곳이다. 대신, 1등을 하고 있는 산토리니는 인기 탓으로 너무 피곤해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사랑을 받는 톱스타가 파파라치에게 쫓겨 다니며 사는 모습이었다. 1등 산토리니는 오버 투어리즘에 신음하며 환경오염을 걱정해야 하고 교통체증으로 아파하고 있지만, 여전히 카메라 앞에서 웃으며 여유로운 척해야 하는 톱스타의 모습이었다. 나의 상황이 어떠하든 나를 찾는 팬을 위해 즐겁게 웃어주고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톱스타처럼, 섬 구석구석 골병이 들어가고 있어도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최고의 관광지가 되어주어야 하는 산토리니도 같은 운명이었다. 1등을 바랐건 그렇지 않았건 되돌릴 수 없는 태생적인 '잘생김'이 산토리니이고, 힘들어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지고 있는 그리스 에게해 바다에 있는 최고 톱스타였다.


산토리니를 보고 미코노스 섬으로 향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미코노스가 더 좋았다는 블로그를 간혹 볼 수 있었다. 같은 에게해의 바다에 있는 섬이지만, 미코노스는 2등이기 때문에 더 좋은 점을 여럿 발견하였다.  


첫째, 1등 산토리니는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 때문에 호텔 가격이 너무 비싸지만, 미코노스는 훨씬 저렴했다. 같은 가격이면 더 넓고 좋은 숙소에 지낼 수 있다. 여행자는 그리스의 섬으로 떠나며 아름다운 바다의 풍경과 하얀 집들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동시에 온전한 '쉼'을 꿈꾸며 찾아온다. 도시의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아침식사와 햇살을 동경하며 그리스의 섬으로 향한다. 미코노스의 호텔과 숙소에서는 '쉼'을 사진으로 저장해 올 수 있다. 1등 산토리니에서도 절벽 아래 푸른 바다와 하얀 이아 마을의 절경을 메모리에 저장할 수 있었다. 물론 만족스런 여행 사진으로 간직할 수 있지만, SNS와 인터넷에는 '더 잘 찍은 내 것 아닌' 사진이 더 많다. 1등 풍경은 없지만 미코노스에서 찍은 사진의 피사체들은 아침에 마시던 사과주스, 커피, 태닝을 즐기며 선베드에 무심히 툭 던져두었던 선글라스였었다.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와 사진을 넘겨본다. 사과 주스를 찍은 사진만 보아도 그때의 주스 맛이 혀끝에 생생하게 소환되는 것 같다. 넓은 숙소의 사진을 핀치 줌인, 줌아웃을 반복하면서 좋았던 그때의 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져서 일상에서 짧지만 확실한 리프레시 효과를 느낄 수 있다. 숙소나 호텔이 크고 좋다는 것은 '쉼'을 목적으로 떠난 여행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둘째, 어깨를 부딪히지 않는다. 황금시간대 늦은 오후, 산토리니 이아마을의 좁은 골목은 줄을 서서 사진을 찍어야 할 만큼 많은 관광객으로 넘친다. 당연히 어깨를 부딪히지 않기 위해 배려를 가지고 걷고 구경해야 했다. 반대로 2등 미코노스 섬에서는 테이크아웃 커피잔과 기로스를 들고 다니며 먹어도 좋을 만큼 어깨를 부딪히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곳이었다.


셋째, 미코노스 섬에는 'Naturist beach'혹은 'Nudist beach'라고 부르는 해변이 있고 태양이 있다. 수영복만 입어도 마지막 한 군데 허리를 조여주는 고무밴드의 느낌마저 벗어서 던져 버릴 수 있다. 건강에 좋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남자한테 참~ 좋은데 설명할 방법이 없다. 여자한테도 참 좋은데 역시 설명할 방법이 없다. 경험해 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미코노스에서 혈액순환의 신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1등을 기대할 만큼 충분한 '노오오~력'을 해도 1등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운이 따라주어서 간혹 1등을 해도 계속 1등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세상 일이 원하는 데로 다 될 리도 없고, 죽어라 용을 써도 안 되는 일은 안된다. 입시에서도 사회생활에서도 1등을 한 적보다 1등 근처를 스쳐가는 일이 더 많았지만 지나고 보면 살아가는데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할 수 있을 때, 온 우주가 1등을 허락할 때 1등을 하면 의미가 있겠지만, 성적이나 고과에서 1등을 계속하면 시기와 질투, 모략과 험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최고 톱스타가 되면 뭐라도 꼬투리를 잡으려는 파파라치가 따라붙어 종종 1등의 이성을 흔들어 버리는 것처럼. 대신 1등이 아닌 미코노스는 1등을 항상 꿈꾸며 압박감에 쩔어 쓰러지기 직전이던 나를 생명수, 사과 주스 한잔의 상큼함으로 살려내었다.


1등으로 산다는 것은 재미있는 지옥에 사는 것이다. 재미있는 1등 지옥에 잠시 살 수는 있어도 오래 살면 몸과 마음에 병이 생기기 마련이다. 지병이 생기거나 갈수록 마음만 독해질 뿐이었다. 미코노스를 더 좋아하게 된 것처럼, 꼭 1등만 바라고 살 이유가 없다. 너무 지치고 너무 힘드니까.

 


아침마다 숙소로 가져다 주는 아침식사 바구니


Paradise beach, ,

club tropicana


여기가 문제의 신세계 ㅋㅋ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것이 더 좋은 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