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끈기는 다른 데다 쓰시죠!

예약도서를 한 달간 기다린 이용자

by 사서살이


목요일 오후 4시, 도서관 자료실 근무를 하던 중이었다.

전화기 벨이 울려 수화기를 들고 소속과 이름을 말했다.

"안녕하세요. ○○도서관 □□□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한 여성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생각처럼 잘 써지지 않는 '독서의 달' 행사 운영계획서 때문에 답답하던 참이었는데

밝고 친절한 목소리를 들으니 괜스레 반가웠다.


"네~ 안녕하세요. 이용자님~ 어떤 일 때문에 전화하셨어요?"

나 역시 친절한 목소리로 이용자를 맞이했다.


"제가 꼭 읽고 싶은 책이 있어서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검색했더니,

그 책이 A작은도서관에 딱 1권 있더라구요~

근데 이미 다른 사람이 대출 중이어서 예약을 걸어뒀는데

제 앞에 예약자가 2명이나 더 있어가지고 한 달이 지난 오늘에서야

대출할 수 있다고 문자가 왔어요~

근데 하필 제가 지금.. 중요한 가족 행사가 있어서 지방에 내려와 있거든요~"


이용자의 설명을 듣는 내내 그녀의 서글서글한 눈웃음과 선한 인상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 말이다.


"그래서 그 책을 소장하고 있는 A작은도서관에 전화해서

제가 지금 지방이라 도서관에 방문할 수 없으니까

그 책을 이틀정도만 더 보관해 달라고 부탁드렸는데 안된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여기로 전화드렸어요~"


그러더니 'A작은도서관 선생님은 말이 통하지 않더라구요~' 라는 말을 덧붙였다.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찬물을 확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목소리만 듣고 섣불리 그녀를 좋은 이용자일 거라고 기대한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웠다.

이런 이용자들을 적잖이 겪었는데도 여전히 이러는 거 보면 나도 참 안 바뀌는구나!

이용자분은 처음부터 본색 좀 드러내시지, 정말!

몇 초사이 여러 생각과 감정이 내 머리와 가슴을 재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나 혼자 기대하고 실망한 이 상황이 씁쓸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사유할 여유는 없었다.

나는 응대를 해야 했다.


“아이고.. 그런 상황이시군요. 많이 속상하시겠어요..”

어디선가 배운 대로 상대의 상황을 공감하는 말로 운을 띄었다.

(물론 나 같아도 오래 기다린 책을 대출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많이 아쉬웠을 것이다)


내 반응에서 어떠한 희망을 보았는지 이용자 목소리는 조금 더 밝아졌다.

“그쵸?? 선생님~ 제가 이 책을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저도 도서관에 이런 전화 처음 해봐요~”


'처음'이라...

그 단어에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얼마나 다급하고 간절하기에 안 되는 걸 해달라고 '처음' 전화를 했겠는가?

하지만 '처음'은 어떤 일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안 되는 걸 계속해줘야 하는 '시작'이 될 수도 있고,

원칙을 지키는 직원과 융통성을 가지려는 직원의 대립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고,

흐트러진 원칙을 다시 잡으려는 고통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

찬물을 끼얹고 비수를 꽂을.


“이용자님 사정은 잘 알겠지만, 예약도서는 3일 이내에 수령하시는 게 원칙이라 제가 임의대로 A작은도서관 사서에게 보관해 드리라고 할 순 없어요. 그리고 기한 내에 대출하지 않으시면 자동으로 다음 예약자에게 넘어가도록 되어 있구요~"


나는 도서관 운영 원칙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이었고,

(친하진 않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를 시련에 빠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중앙도서관 근무자라고 해서 A작은도서관에 연락해 해주라 마라 말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아무리 좋은 마음이라고 해도 원칙을 어겨가며 이용자를 돕다가는

원칙을 지키는 직원만 욕을 먹게 될 상황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이용자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의 회원증을 사진으로 찍어 지인한테 전달할 테니

지인이 도서관에 가면 그 책 좀 대출해 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방법 또한 불가하다고 안내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 사용하는 회원증은 본인 외에는 사용할 수 없는 게 원칙이다. 본인 외에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가족회원으로 묶여 있는 경우뿐이다. 가족이라고 해도 가족회원으로 사전 등록이 되어 있지 않으면, 그 마저도 불가하다.


이용자는 또다시 제안했다.

혹시 개인적으로 부탁드리는 것도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개인적 친분이 전혀 없는데 이런 말을 한다는 게 당황스러웠다.

내가 직업인으로서 가진 권한을 오용해서

알지도 못하는 이에게 특혜를 주도록 종용하는 상황이 거북스러웠다.


"네.. 죄송합니다. 이용자님.."


이용자는 나 역시 말이 안 통한다고 느꼈는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휴~~~"


원칙만 들이미는 내가 답답했겠지만

나 역시 원칙에 어긋나는 요청만 하는 이용자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한숨 소리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 정말 너무하네요. 다들!!!"

그녀는 갑자기 화를 냈다.


화난 목소리를 들으니 내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했다.

(혹시라도 어마어마한 진상이면 어떡하지?)

과연 이 통화는 어떤 끝맺음을 갖게 될까?



"저도 이용자님을 도와드리고 싶지만 원칙을 어겨가며 도와드리기는 어려워요. 죄송합니다."

죄송하지 않았지만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제가 이렇게까지 사정하는 데 도와줄 생각을 안 하는 도서관 선생님들이 참 부당하네요!"

이제 더는 이용자 목소리에서 그 어떤 다정함도 친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용자는 자신이 겪은 이 부당함을 말할 수 있는 책임자에게 연결해 달라고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관장님 번호를 알려주었다.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도 아닐지언대

원칙을 지킨 직원을 나무라겠는가, 설마?

하는 생각으로.



다행히

그 후로 이 일과 관련해서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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