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려면 마음속 지뢰를 찾아서 제거하세요!
2017년 봄, 사서 경력을 모두 모아봐야 겨우 1년 조금 넘었을 때였다.
첫 사서직이었던 순회사서 9개월을 마치고,
운 좋게 다른 도서관에서 바로 1년 계약직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그 도서관에는 정규직 사서가 1명 있었고, 나는 그 정규직 사서의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이었다.
정규직 사서는 대부분 2층 사무실에서 사무업무를 봤고,
나는 1층 자료실에서 주로 대출반납과 같은 단순 업무를 했다.
내 근무시간은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였지만,
도서관 운영시간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였다.
그 도서관은 박물관 안에 있는 시설이라 박물관 운영시간을 따랐다.
나는 여느 날처럼 오전 8시 50분쯤 출근해 자료실 실내등을 켜고 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업무용 PC가 켜지기를 기다리는데, 자료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직원분께서 아직 청소 중이신가?' 생각하며 자료실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곳에는 처음 보는 중년 여성이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나는 놀란 기색으로 그 여성을 향해 어떻게 들어오셨느냐고 물었다.
그 여성은 문이 열려 있길래 들어왔다고 답했다.
자료실 출입구가 자동문이라
사람이 앞에 서면 자동으로 열리긴 하지만
운영시간이 아닐 때에는 벨트로 된 차단봉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다.
오늘 아침에도 분명 그 차단봉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중년 여성은 자료실 자동문이 열려서 들어왔는데
무슨 문제냐는 표정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들어올 때는 자료실 실내등도 다 켜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리 자동문이 열려도, 차단봉도 있고 자료실 불도 반밖에 안 켜져 있는데,
그냥 들어온다고? 이상한 사람이네~'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운영시간이 아직 30분이나 더 남았으니
그때까지는 자료실 밖에 있는 대기용 벤치를 이용해 달라고 안내했다.
하지만 그 중년여성은 이번만 그냥 좀 넘어가 달라고 말했다.
규칙을 어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반성은 없고
운영시간 보다 좀 일찍 들어온 게 뭐가 문제냐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 태도가 달갑지도 않았지만,
9시 좀 지나서 정규직 사서가 내려와
'왜 저 이용자가 지금 자료실을 이용하느냐'고 물어보면
'나가라고 했는데 안 나가시네요'라는 말로 얼버무리기 싫었다.
"그렇게는 어렵습니다. 9시 30분에 다시 입장해 주세요."
그 여성은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화가 났는지
책을 탁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어쩌다 한 번인데 이 정도도 양해를 못해주냐'면서
'불친절하다'고 신경질을 부렸다.
그러고는 내게 정규직이냐고 물었다.
"계약직인데요..."
내 대답을 들은 그 여성은
'그러니까 당신이 비정규직밖에 못하는 거야'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내뱉었다.
송곳 같은 말을 내뱉는 자신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채로.
살면서 처음 듣는 말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 순간은 내 모든 감각이 멈춰 버렸다.
대꾸는 물론이거니와 미간을 찌푸리는 그 흔한 표정으로도 반응하지 못했다.
심장만 평소보다 2배, 3배 빠르게 뛸 뿐이었다.
그 여성은 계속 씩씩거리며
'어추구니없다'와 같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연이어 내뱉었다.
그래도 분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나를 위아래로 흘겨보았고,
마지막에는 혀까지 끌끌 차더니 무어라 중얼중얼거리며 자료실을 나갔다.
마치 간절히 기다렸던 원수를 만나 악다구니를 쓰고 떠나는 사람처럼 말이다.
무엇이 그렇게까지 화나고 분하길래,
내게 이렇게까지 상처를 입히려 안감힘을 썼을까?
그렇게까지 느닷없고 살벌한,
낯선 이의 악의는 처음이었다.
그 여성이 떠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생각하니 후회스러웠다.
'침묵했어도 되는데 나는 왜 바보같이 계약직이라고 대답했을까?'
'왜 저 인간한테 '당신 참 무례하네요!'라고 말 한마디 못 했을까?'
'왜 인상 한번 못 쓰고 나는 멀뚱히 서서 당하기만 했을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을 겪고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여성이 다니는 직장에 민원을 넣을 수도 없고, 사과를 받을 수도 없었다.
그저 팀장님이 사다 주신 딸기라테와 함께 꿀꺽 삼키는 수밖에.
대게 첫 경험은 뇌리에 오래 남는다.
나는 꽤 오랫동안 그 기억으로 괴로웠다.
출근할 때마다,
도서관 안에 누가 있을까 봐 두려웠다.
가방을 내려놓기 전, 자료실 안을 살펴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해야만
편안한 마음으로 컴퓨터를 켜고 업무를 준비했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세상에는 그런 이들이 있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무관한 이에게 '너도 한번 당해봐'라는 심정으로 앙갚음하는 사람.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려 노력하기보다
남에게도 자신과 같은 상처를 내기 위해 '누구든 걸리기만 해 봐'라는
세상을 향한 복수심으로 이글거리는 사람.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가슴속에 지뢰밭을 일구며 사는 사람.
9년이 지났는데도
사소한 일에 불같이 화내는 사람들,
줄어들기는커녕 어쩐지 더 자주 보인다.
그렇게 날 서 있는 사람들을 자주 겪다 보니
어설프게나마 나를 지키는 위해,
생각한다.
'저 사람이 상처가 많고 사는 게 고달파서 저렇게까지 발버둥 치는구나..'라고.
(물론 여전히 화가 먼저 치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