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특이했던 1학년 남자아이, 수현
내가 2달 동안 근무한 초등학교 도서관에는 특이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수현(가명), 1학년 남자아이였다.
지금도 그 아이를 떠올리면, 어딘가 의뭉스러운 기분이 든다.
수현이는 내가 학교 도서관에 출근한 첫날부터 내게 책을 찾아 달라며 말을 걸어왔다.
그 아이가 찾는 책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였다.
책 제목을 듣고 나는 '얘가 이 책을 읽을 수 있나?'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학교 대출 규정을 정확히 숙지하지 못해) 일단 책을 검색했다.
책은 대출 중이었다.
나는 수현이에게 '채식주의자'는 이미 다른 사람이 빌려 갔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이 책이 조금 어려울 텐데, 읽을 수 있어요?"
"저희 누나가 빌려다 달라고 했어요."
"아~ 그렇군요!"
나는 수현이의 대답을 듣고 안도했다.
그저 누나의 부탁을 받고, 대신 빌리려 한 거였다니 괜한 걱정을 했다.
수현이가 떠나고 대출 규정을 확인해 보니
교사용 도서로 등록된 일반자료(성인도서)는 학생들이 대출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이 규정을 알았더라면 검색할 필요도 없이 대출이 안된다고 알려주는 건데.
며칠 후 수현이는 아직도 '채식주의자'가 대출 중이냐고 물었다.
그때서야 나는 수현이에게 '그 책은 교사용 도서라서 학생은 대출이 안 돼요'라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고 수현이는 '엄마가 읽고 싶다고 빌려오라고 한 건데요?'라고 대답했다.
분명히 지난번에는 누나가 부탁했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엄마라고 하길래, 의아했지만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누나랑 엄마 둘 다 그 책을 보고 싶어 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여하튼 수현이가 읽지 않더라도 교사용 도서를 수현이 이름 앞으로 대출해 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 후로 수현이는 더 이상 내게 '채식주의자'에 대해 묻지 않았다.
대신 도서관 안에 있는 도서검색 PC에서 '채식주의자'를 혼자 검색하곤 했다.
그 모습이 다소 의문스러웠지만 왜 아직도 '채식주의자'를 찾느냐고 묻지 않았다.
하지만 수현이의 특이한 행동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채식주의자'에 이어 찾아달라고 한 도서는 '기묘한 병 백과'였다.
검색해 보니 그 책은 아동책으로 등록되어 있었고, 현재 대출 가능한 상태였다.
나는 청구기호가 적힌 종이를 들고, 그 도서가 꽂혀 있을 100번대 서가로 갔다.
하지만 책은 제자리에 없었다.
그 책이 있어야 할 자리의 양 옆과 위아래를 모두 훑어봤지만 책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간 코너와 그림책 서가 100번대,
교사용 서가 100번대까지 살펴봤지만 그 책은 없었다.
기다리고 있을 아이에게 다가가,
책이 제자리에 없어서 다른 곳도 찾아봤는데 보이지 않는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수현이는 내 말을 듣고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더니 도서관을 떠났다.
다음 날, 수현이는 등교를 하자마자 도서관으로 왔다.
다른 아이들이 반납한 도서를 처리하느라 분주한 내게 다가오더니
'기묘한 병 백과'를 찾아달라고 했다.
어제 오후와 상황이 크게 달라진 건 없을 것 같았지만
이용자의 요청이니 어김없이 종이에 청구기호를 적어 서가로 갔다.
여전히 책은 제자리에 없었고,
어제와 똑같이 신간 코너, 그림책 서가, 교사용 서가까지 차례대로 훑었다.
기다리고 있는 수현이에게 다가가 어제와 같은 상황임을 설명했다.
그리고 선생님이 틈틈이 찾아보겠다고 새로운 말을 덧붙였다.
그 순간 1교시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수현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쏜살같이 교실로 뛰어갔다.
그날 오후에도 수현이는 내게 그 책을 찾아달라고 했고, 나는 서가를 훑고 책이 없다고 말했다.
다음 날도 수현이는 같은 요청을 했고, 나는 같은 대답을 했다.
수현이는 '근데 기묘한 병백과는 왜 자리에 없어요?' 물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책을 보고 제자리에 꽂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혹은 대출 처리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빌려 갔을 수도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수현이는 왜 대출이 안 됐을 수도 있냐고 물었다.
나는 아이들이 자가대출기에서 실수로 처리를 잘못했을 수도 있고,
그 책을 읽다가 빌렸다고 착각하고 그냥 들고 도서관을 나갔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 도서관은 학생들이 스스로 자가대출기에서 책을 빌리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었고, 출입문에 도난방지 시스템이 없었다.)
아이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이해를 한 건지, 아님 이해를 못 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나는 어쩐지 이 책을 찾아야지만 끝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기묘한 병 백과'를 찾기 위해 온 서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아.. 이 정도면 책이 진짜 도서관 안에 없는 거 같은데'라는 답답함과 지루함이 몰려올 때쯤,
역시나 제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책을 찾았다.
다음 날 아침 수현이에게 '기묘한 병 백과'를 건넸다.
수현이는 그 책을 받아 들고는 고개만 아래로 한번 까딱였다. (고맙다는 인사 같다;)
아이의 얼굴에서 기쁨이나 반가움, 고마움 같은 감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수현이의 무표정은 도통 가늠이 안 됐다.
아이는 그 책을 가지고 도서관 어딘가로 향했다.
더는 내 자리에서 그 아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종이 울리자 아이들이 우르르 나갔다.
책을 정리하려고 북트럭에 가보니 '기묘한 병 백과'가 놓여 있었다.
그렇게 찾더니 빌리진 않고 보고만 간 모양이었다.
나는 그 책을 제자리에 꽂았다.
며칠 후, 수현이는 또다시 내게 '기묘한 병 백과'를 찾아달라고 했다.
이번에는 청구기호를 적지 않고 곧바로 서가로 향했다.
책은 또 자리에 없었다.
그 사이에 다른 아이들이 보고 어디다 잘못 꽂았나 싶었다.
"책이 또 자리에 없네.. 선생님이 더 찾아볼 테니까 내일까지 기다려 줄 수 있니?"
수현이는 또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리고는 갔다.
이번에도 서가 전체를 훑어볼 작정으로 책을 찾기 시작했다.
책은 엉뚱한 곳에 꽂혀 있었지만 다행히 금방 찾았다.
나는 그날 오후 수현이에게 그 책을 건넸다.
수현이는 늘 그렇듯 고개만 한번 끄덕이고 또 구석에서 그 책을 보더니 북트럭에 올려놓고 갔다.
나는 또다시 책을 제자리에 꽂았다.
다음 날도 어김없이 수현이는 도서관을 찾았다.
이번에는 어쩐지 책을 찾아달라 하지 않고, 혼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지나가며 쓱 보니, 아이가 들고 있는 책은 '기묘한 병 백과'였다.
이제는 책 자리도 외웠나 보네 생각했다.
그날 오후, 책을 정리하다가 다른 곳에 꽂힌 '기묘한 병 백과'를 발견했다.
그 순간 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혹시 그동안 수현이가 나한테 장난을 친 건가..'
나는 그 책을 제자리에 꽂아두고, 다음 날 수현이의 동선을 비밀스레 염탐(?)했다.
수현이는 도서관을 한 바퀴 돌더니 본인이 어제 꽂은 자리에 책이 없는 걸 눈치챘는지
'기묘한 병 백과'의 원래 자리인 100번대 서가로 갔다.
서가에서 그 책을 꺼내더니, 구석에 앉아 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도서관을 나가기 전에는 서가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무언갈 하고 조용히 떠났다.
수현이가 가고 100번대 서가에 가서 '기묘한 병 백과'를 찾아봤지만 그 자리에 없었다.
방금 전 수현이가 있던 곳에 가서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앉아 자세히 보았다.
서가에 꽂힌 책들 뒤에 다른 책 귀퉁이가 살짝 보였다.
그 서가에 꽂힌 책들을 모두 빼내고 나니, 뒤에 '기묘한 병 백과'가 있었다.
수현이는 서가 맨 아래 칸에 꽂힌 책을 다 꺼내고, '기묘한 병 백과'를 가로로 넣고
원래 있던 책을 그 앞으로 다시 꽂았던 것이다.
책장 안 쪽에 책이 가로로 들어가 있으니, 책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책을 찾을 때,
청구기호를 중점적으로 보니 책의 귀퉁이는 웬만해서 인지하기가 어렵다.
도대체 어떤 책이 길래 수현이가 나를 속이면서까지 책을 숨겨 놓았을까?
그때서야 처음 그 책을 훑어보았다.
우울을 위로하는 그림 에세이로 일러스트가 다소 어두운 느낌이었다.
초등학생 1학년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내용인 듯 보였다.
그 책을 내 앞으로 대출 처리 하고, 서랍장 안에 넣었다.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묻고 싶었지만, 무표정인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니 어쩐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후로 수현이는 자신이 숨겨둔 책이 없어졌음을 알아채고,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혹시 '기묘한 병 백과' 책 어딨어요?"
"아~ 그 책 누가 빌려갔어요."
"누가요?"
"그건 말해 줄 수 없어요."
"왜요?"
"원래 대출기록은 누구에게도 말해 줄 수 없는 거예요.
수현이도 수현이가 어떤 책을 빌려갔는지 선생님이 친구들한테 수현이 허락 없이 말하면 기분 어떨 거 같아요?"
아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뒤돌아 갔다.
그 후로 '기묘한 병 백과'에 대한 집착(?)은 끝이 났다.
하지만 '기묘한'이라는 단어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그 후로는 '기묘한'이라는 단어로 책을 검색하기 시작했고,
'기묘한 소원'
'기묘한 미술관'
'기묘한 모모 한약방'
책들을 찾아 달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