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lue Jun 21. 2021

내가 만난 사람들

01.



   이런 주제에서 엄마를 이야기하는 것은 반칙일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 생에 최초로 만난 사람이 바로 엄마이기 때문에 나는 기어코 가장 첫 번째로 엄마를 떠올릴 수밖에.


   엄마의 역사를 적을 마음은 없다. 엄마에게 좋은 기억이란 것은 유와 무 중에서 따지자면 무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은 잘 웃는 사람은 필히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믿었고 믿고 싶었지만, 잘 웃는 사람은 그저 잘 웃는 사람일 뿐 행복과는 그다지 연관이 없다는 것을 나는 엄마를 통해 알았다. 엄마는 속 없이 웃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지만 웃긴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볼 때, 내가 아빠나 오빠의 험담을 맛깔나게 할 때, 뜨개방에서 있었던 일이나 엄마 친구들에게서 들었던 재미있는 일화를 이야기할 때 늘 웃었다. 엄마는 사과할 때도 겸연쩍은 미소를 자주 짓곤 했고, 나나 오빠가 결코 아물지 않을 상처를 남겼을 순간에도 재롱 한 번에 못 이기겠다는 듯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반면 엄마는 잘 울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엄마는 행복하지 않은 걸까. 생애 남들보다 곱절은 터지는 듯한 불행 앞에서 엄마는 울음을 참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울음이 어딘가에 고여 불행의 바다를 이룬 것 같았다. 엄마는 그 바닷속에서 오랫동안 잠수 중인 것 같았다. 때로 엄마의 우울이, 엄마가 세상을 바라보는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이 나를 한숨짓게 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내가 최초로 만난 사람이 내게 가르친 가장 첫 번째의 감정이 우울이라 나는 살면서 자주 엄마를 따라 퐁당 그 바다로 도망쳐 버리는지도 모른다고, 배운 게 도둑 질 뿐이라 내가 도둑이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엄마 탓을 한 적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도무지 엄마를 미워할 수는 없다. 엄마와 딸의 관계는 특별하기 때문이라던가, 세상에 진정한 내 편은 엄마뿐이라던가 하는 상투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은 기억을 먹고 살아간다. 엄마는 내게 성공보다 실패를, 오기보다 포기를 익숙케 했지만 나는 몇 가지의 기억으로 엄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중 한 가지 기억을 말하고 싶다.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 날에 엄마의 동네 친구분이 집에 놀러 오셨다. 간단히 맥주 한 잔을 하신다는 것이 연거푸 몇 잔으로 이어지자 두 분은 이내 기분 좋게 취하셨고, 나와 동창인 딸을 둔 엄마의 친구 분과 엄마의 입에선 자연스럽게 기억의 조각들이 두서없이 흘러나왔다. 엄마는 대뜸 나에게 미안한 것이 많다고 했다. 유치원에서 부모님을 초대해 발표도 하고 장기자랑도 하는 그런 날에 나는 유별나게 손을 들었단다.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에도 엄마의 팔을 잡아끌며, “여기요!”,“엄마, 손 들어! 우리가 하자!”하며 유별나게 군 모양이었다. 엄마는 나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유치원에 자주 들르며 얼굴 도장도 찍고, 아이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다른 ‘잘난’ 엄마들을 제치고 나서기에 스스로가 너무 초라했노라고, 만약 그때부터 내가 얘를 지원해줬다면, 내가 창피한 것쯤은 무릅쓰고 있는 힘껏 도왔다면, 분명 원하는 바를 이뤄냈을 애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울지 않았다. 다만 꼭 불로 지진 것처럼 그 기억이 흉처럼 남았다. 당시에는 그 말이 상처로 남은 것 같았다. 엄마가 하지 못해 가정으로 남은 무수한 기억이 엄마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괴롭힌다고 느꼈다. 하지만 기억은 점차 올바르게 자리 잡았다. 엄마의 기억 속에 딸은 매사에 똑 부러지고, 자신감이 있었다. 그게 자주 나를 살게 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 같은 게, 고작 나 까짓게 뭘 할 수 있겠냐고 밥 먹다 말고 엄마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릴 때도 엄마는 ‘우리 딸이 어때서’라는 흔한 말로 쉽게 내 눈물을 멎게 했다. 그 말이 지닌 힘은 어쩌면 모두 저 기억으로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나에 대한 믿음. 그게 혼자서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스스로의 믿음으로 번졌다. 모든 것은 자존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저 기억을 꺼내 곰곰이 생각해보곤 했다. ‘온전한 내 힘이 아니라 줄을 타서 편하게 자리를 얻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엄마와 아빠의 친구들, 하물며 내 친구들이 나보다 몇 발자국은 앞서 나가 있다는 기분이 들 때마다 엄마의 확신에 찬 믿음을 떠올렸다. 나는 결국 ‘원하는 바를 이뤄낼 애’니까 요행을 바라지 않고 내실을 다진다면, 스스로에게만 집중한다면 모든 것은 잘 될 거라는 믿음이 그림자처럼 따라오곤 했다. ‘나만 잘하면 돼.’ 결국 모든 고민의 귀결은 같았다. 엄마의 오랜 기억이 내 기억이 되어 나는 정말 자주 그 기억으로 배를 불리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어떻게 내가 엄마를 미워할 수 있을까. 엄마가 나를 살게 하는데 말이다. 때로는 우울조차 덕분이라고 여길 때도 있다. 엄마가 만약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면, 물론 나 역시 지금보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끼며 살았을지 모르지만, 우울을 배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울을 이용하고, 우울에 빠지는 것을 때로는 즐기는 사람이 되지는 못 했을 것이다. 또한 결국 우울에 질려 스스로 빠져나오는 방법도 몰랐을 것이고, 그렇게 빠져나왔을 때 스스로 조금이나마 성장한다는 것도, 어둡기에 밝음을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엄마는 좋은 선생님이다. 엄마의 좋은 점과 나쁜 점, 엄마와 닮은 점과 다른 점에서 나는 배운다. 그 가르침에 보답하는 제자가 되고 싶을 뿐이다.


   엄마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혼자 큰 애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엄마가 이 생각에 동의하던 아니든 간에 이 생각은 사실에 가까운 부분이 있다. 양육에 있어 경제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지만, 아니,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까지 말할 수 있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 부분은 아니다. 우리 아빠는 군인 공무원으로 직장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기간을 수도권에서 보냈지만, 정작 말년에는 강원도 양구에서 보냈다. 그 시기는 나의 고등학교 3년의 시간이었는데, 그때 나는 아빠를 주말에만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생활을 엄마와 보내는 게 익숙해지는 동안 나는 엄마의 양육 방식에 익숙해졌다. 인간의 정서나 가치관 혹은 사고방식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서서히 자리 잡는다지만, 한참 진로에 대한 고민이나 미래에 대한 잡다한 생각이 많을 시기에는 타인에 의해 아주 기민하게 영향을 받을 수 있고, 내 경우에는 그게 엄마였다. 엄마가 선택한 양육 방식은 ‘선택은 네가 하되, 책임도 네가 진다’는 것이었다. 내가 혼자 큰 애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이 이유에 있다. 엄마가 나를 방관하고, 아무렇게나 방치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고도 행동도 모두 나에게 전적으로 맡겼다는 의미다. 그래서 나는 타인에게 의존하는 방식보다 독립적인 방식을 선택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굳이 내 선택에 타인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지식하고 독선적인, 다소 사회성이 결여된 모습이 보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엄마 탓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끼던 나는 이런 성향에 크게 불만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성향 때문에, 고민의 잔가지들이 너무 많아졌을 때 잘라내지 못하고, 그 고민의 몸집을 괴물만큼 키울 때가 많았지만 이럴 때까지 사회성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곁에 있는 좋은 친구들에게 내 전담 정원사 역할을 부탁하며 크고 작은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고집으로 나는 스스로 고독을 즐기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혼자 있는 것이 외롭지 않다는 사실을 다른 친구들보다 빨리 깨달을 수 있었다. 엄마가 곁에 많은 친구를 두지 않고도 크게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고 느낀 것은 단지 엄마가 외롭지 않길 바라는 내 희망에서 기인한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엄마는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익숙해 보였다. 그게 자의적이던, 타의적이든 간에 말이다. 나 역시 사무치게 외롭고, 어딘가에 혼자 던져져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매번 구조 요청을 하기보다는 내면의 ‘윌슨(Wilson)’과 함께 대화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 해가 거듭할수록 엄마에게 더 많이 말을 걸기 위해 노력하고, 자기 전 10분이라도 엄마 옆에 앉아 있으려고 하는 것은 비단 밖에서 나 혼자만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경험한다는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냥 내가 없는 시간 동안 텔레비전 앞에 앉아 시간을 보냈을 엄마, 친구 분들과 있다가 고요한 집에 들어왔을 엄마, 무수한 엄마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외롭지 않았으면 싶었다. 엄마는 매번 내가 이 말을 할 때마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에 뾰족한 해답을 줄 수도 없으면서 ‘그래도···’를 외치곤 했다. 뜬금없이 꽃다발을 사 가서 엄마에게 안기고, 맛집으로 소문난 마들렌 집에서 엄마 것을 포장해 건넬 때 나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엄마의 미소에서 그 순간만큼은 엄마의 외로움이 증발했으리라고 믿어버리곤 했다. 사실이 아니래도, 외로움 같은 것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대도 그냥··· 잠깐은 기뻐했을 엄마를 생각하며 나는 내 티셔츠를 고르며 엄마 것을 담고, 지나가는 엄마의 말을 기억했다가 발에 잘 맞아서 운전할 때도 불편하지 않을 크록스 신발 같은 것을 구매했다. 뜬금없이 엄마를 생각해주는 딸이 있다면, 스쳐 지나가듯 던진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는 딸이 있다면, 그 존재를 기억하는 한 엄마는 그래도 조금은 덜 외로운 인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남들한테 자랑할 만한 딸은 아니지만, 엄마가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떠올렸을 때 엄마가 낳은 엄마와 똑 닮은 딸이 그 외로움을 조금은 달래준다고, 그것이 엄마의 불행한 삶에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싶었다. 이 모든 사고와 행동의 근원은 엄마다. 엄마가 내가 이런 선택을 하도록 만든 것이다.


   인간을 믿지 않지만 인간을 연민하는 것도, 다소 예민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예의를 차리고 동일하게 나에 대한 예의를 요구하는 것도, 내가 가진 모든 모순과 불안정성까지도 나는 혼자 크며 갖게 되었지만, 놀랍게도 이 모든 면은 엄마와 닮았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 글을 쓸 수 있었을까. 글로 도망치고, 활자로 도피할 수 있었을까. 삶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던 젊은 시절에도 엄마는 <태백산맥>을 읽었다. 나는 우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가만히 멈춰 흘러가는 구름의 속도에 감동하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공기의 냄새에서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성을 되찾았다. 엄마는 온갖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하다가도 산책길에 펴있는 라일락 향기에 감탄하고 아무렇게나 펴있는 들꽃들을 사진으로 찍으며 내게 보여주곤 했다. 나는 항상 음악을 가까이에 두고, 좋은 음악을 찾는 것을 삶에서 큰 즐거움으로 여겼고, 엄마는 광고에서 들었던 음악이 좋았다며, 그 음악을 검색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고, 음악만 좋다면 장르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이것저것 자르고 오리고 붙이며 내 방을 꾸미고, 내 수첩과 내 일기장에 장난을 쳤고, 엄마는 바늘과 실이라는 두 가지 재료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스웨터 몇 벌을 내게 안겨주곤 했다.  엄마는 내에 열 개의 손가락과 열 개의 발가락만 준 것이 아니다. 세상을 보는 눈을,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시야를 주었다. 세상은 정말이지 살 수록 별 것 없지만, 또 나는 실패부터 배운 인간이라 자주 삶을 비관하지만, 적어도 엄마의 피가 흐르고 있는 한 결코 스스로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쓰기로 했다.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나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