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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 Sep 30. 2021

내가 만난 사람들

02.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3년에 욕심부려 다닌 알파의 1년. 총 16년의 시간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많은 선생님과 교수님을 만났다. 그중 기억에 남는 세 분에 대한 이야기이다. 참고로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가 곧 그들이 모두 내게 은사님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가장 먼저 떠올랐던 분은 공연 기획을 배우기 위해 다닌 학교에서 총 두 과목을 강의하셨던 A교수님이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바로 그를 떠올렸다는 사실은 꽤 놀라웠다. 그가 당시 내게 적잖은 영향을 줬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토록 오랫동안 그 영향이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1년 총 2학기. 각각 한 학기에 한 과목씩 총 두 과목을 그에게 배웠다. 내가 이 학교에 들어간 것은 순전히 공연을 만들고 싶다는 내 막연하고 오랜 꿈 때문이었다. 어떤 위치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지 같은 계획은 없었고,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다가는 발가락조차 담가보지 못하고 인생이 끝날 것 같은 마음에 어느 날 덜컥 새 학기 접수를 해버렸다. 아무도 모르게 면접을 보고, 붙은 후에 가족과 친구들에게 알렸던 것은 내가 합격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라기보다 정말 말 그대로 이 모든 일을 단숨에 저질러버렸기 때문이었다. 면접을 보러 간 날, 면접관 중에 A교수님은 없었다. 만약 그가 면접관이었다면 내게 무슨 질문을 했을지, 나를 합격시키고자 했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와 면접에서 주고받은 대화 이후에도 나는 이 학교를 선택했을까도. 모든 이야기는 오리엔테이션 후 있었던 그와의 첫 강의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그는 오리엔테이션에서 과제를 하나 내주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선택이 무엇인지 발표할 준비를 해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내 확신이 아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여 한 모든 선택들이라고 발표했다. 물론 나는 명쾌하게 말을 하는 법이 익숙지 않아 불필요하게 말을 늘이기도 했고, 준비해온 발표 지를 볼 수 없었기에 긴장된 마음으로 같은 말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하기도 했지만 그는 단호했다. 유심히 나의 발표를 듣던 그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전혀 솔직하지 않다고 평했다. 마음속에 있는 진심을 꺼내 우리에게 이야기할 마음이 없으니까 그렇게 글을 쓴 것이라고, 그렇게 말을 한 것이라고. 또 다른 강의에서 그는 나의 말을 유심히 들은 후 나에게 물었다. 평소에 친구들이랑 말할 때도 그렇게 말을 하냐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그는 말했다. “네 친구들이 너랑 이야기하기 싫다고 안 해? 못 알아듣겠다고.” 

 나는 두 상황을 겪을 당시 몹시 화가 났었다. 그가 한 말이 옳거나 틀려서가 아니라, 그가 나에게 창피를 줬다고, 그리고 정말로 무례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내 성장을 위한 관심과 격려의 표현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진심을 담은 충고와 조언이었다고 말할지도. 하지만 그 포장지가 무엇이었던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이 선물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솔직함과 무례함이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미 나보다 몇 해는 더 살았고, 다양한 경험을 했을 그에게 내가 감히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진심이 학생들의 실력 향상 도모라면 나를 포함한 다수의 학생에게는 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가 살아왔던 세계에서 그 정도의 말쯤은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 세계를 들어가기 위해 이제 시작한 학생들에겐 아니다. 그에게 친절함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무례함을 허락하고 싶지는 않다. 당시 그가 강의했던 과목은 말을 하는 방법, 그 자체였다. 말이 주는 무게와 힘에 대하여 설파했던 그가 말로 누군가를 상처 받게 했다는 사실은 몹시 모순된 동시에 그의 주장에 강력한 근거가 되어주기도 했다. 바로 그가 직접 그의 주장을 증명했으니까.

 

   뒷걸음질로 개구리를 잡은 소처럼 그의 무례함이 일궈낸 성장도 있다. 그 덕분에 나는 글을 쓰며 의식적으로 ‘내’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한다. 할 이야기를 준비했다는 전제하에서는 언제나 속에 있는 이야기를 숨기지 않고자 한다. 누군가가 압박하고 다그쳤던 그때의 상황과는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배운 것은 진실한 태도를 통해서만 진심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라는 평가는 내가 말을 어렵게 해서가 아니라, 내가 아무 말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이제는 안다. 억지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 보면 이야기는 내게서 발화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써놓은 의미 없는 문장의 나열을 쏟아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만약 나의 이 모든 깨우침을 그가 의도한 것이라면 그는 나의 은사님 반열에 올랐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가 의도했대도 그는 내 기억 속에서 미화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 묻어 나오던 강압적인 태도,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서슴없이 지적하던 모습에서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명확하다. 교수님,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아도 됐다고요. 



   두 번째, B교수님. 그는 내가 대학을 다녔던 3년 중, 졸업 학년이었던 3학년 당시 지도교수님이다. 대학을 다녔을 당시에 나는 정말 겁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건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나의 허세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실제로 정말 진심이었다. 나는 우리가 학교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이토록 짧은데, 이런 방식으로 과연 졸업 후에 우리가 직장에서 제 몫을 해낼 수 있을까 싶었다. 3년이면 4년제 대학에 비해 1년이나 공부를 빨리 마치는데, 시간이 짧아진 만큼 핵심적인 내용을 굵고 강하게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기엔 우리 학교의 커리큘럼은 너무 느슨했고, 그마저도 사실상 시간을 때우는 식의 과목인 경우가 비일비재해서 등록금은 등록금대로 나가고 내 지식과 기술은 해가 거듭해도 제자리걸음이기 일수였다. 정말 의지가 있었다면 나라는 개인이 혼자서 뭐라도 못 했겠냐만, 그때는 그런 건설적인 생각보다 당장 바뀌지 않는 학교에 끈질기게 매달렸다. 교수님께 이러저러한 건의도 해보고, 내가 생각해도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어필한 적도 있었지만 돌아오는 건 모든 학생들 앞에서 빈정거림이나 당한 일뿐이었다. 그래 봤자 내가 원한 것은 커리큘럼 개편 정도였는데, 교수님들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존경했던 교수님 한 분께 그러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교수님은 잘 들어주시고 말씀하셨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 같더라도 너처럼 꾸준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야 돼. 그래야 언젠가 바뀐다.” 정말로 그럴 수 있었으면 싶었다. 어차피 나는 이미 입학했고 심지어 곧 졸업에 가까웠다. 내가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바뀌길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저 이런 비합리적인 방식을 고쳐 앞으로 누가 되었던 미래의 학생들이 보다 체계적인 학습을 할 수 있길 바랐다. 남들보다 빠르게 지식과 기술을 익혀 취업하고자 전문대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그보다 중요한 게 없었다. 나는 그렇게 믿었는데, 아마도 교수님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서두가 길었지만, 학교를 다니는 나의 기본적인 태도는 위와 같았다. 그러니까 일종의 반골 기질이 사방으로 가시 돋쳐 있던 셈이다. 그 상태로 나는 B교수님을 만난다. 솔직히 말하면, 학기 중에 그와의 갈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3학년이 끝나가고 실습을 나가던 시기에 그와 이어지던 잦은 면담이 기름 위의 성냥이 되어버렸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알고 있었다. 늘 그랬다. 그때 나는 엔터테인먼트의 A&R팀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음악을 좋아했던 나지만, 음악을 할 실력도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대신에 음악을 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었다. 그들이 음악을 만드는 일을 돕고, 기여하면서 음악이 나오는 과정에 함께 하고 싶었다. 내 음악은 아니지만, 우리 음악이고 싶었다. 그들이 실제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직 명확하게 몰랐어도,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면담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같은 말을 했다. 그러나 그는 수차례 이어진 면담에서 네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런 일은 없다고, 정말로 네가 원하는 일을 찾아 그 자리에 너를 넣어주고 싶지만 그런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럼 그 자리에 앉아서 그 일을 하고 있는 실제로 존재하는 그 사람들은 뭐지?’ 나는 이런 생각을 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저 대답 없이 면담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속으로 꼭 그 일을 해서 보여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제 더는 꿈이 곧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그로부터 벌써 몇 해가 지난 지금은 되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 나는 A&R팀에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건설적으로 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저 학교에만 매달리느라 시간을 모두 허비해서’도 이유일 수 있겠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바위를 치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나는 그저 계란에 불가하다는 것뿐만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금이가고 결국 박살이 나 산산조각이 나서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더라도 계란이었다. 계란으로 태어나서 계란으로 살았던 내 과거와 바로 코앞의 현재는 바뀌지 않는다. 


   면담을 하는 소파에 앉아 대답 없이 가만히 분을 삭이면서, 내가 누구인지 보여주겠다던 그 차가운 오기는 결코 그 무엇도 그에게 증명해내지 못했지만 나는 안다. 나의 반골 기질이 계속 새로운 길로 나를 이끌고, 나의 용기가 시도를 두렵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는 내게 바위 었지만, 이제 더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계란으로 부드럽게 바닥을 굴러간다. 꿈이 곧 직업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시간 동안 둥근 곡선이 다소 마모되었지만, 어쨌든 나는 계란이다. 나의 시도나 용기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더라도 괜찮다. 나 역시 바뀌지 않고 부딪힐 뿐이다. 그는 내게 그것을 알려주었다.



   세 번째, C 선생님. 그녀는 나의 중학교 3년의 생활을 상징한다. 그녀가 당시 담당하던 과목은 과학이었는데, 그녀의 과학시간은 내 중학교 시절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전혀 관심 없던 과학이라는 과목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오로지 그녀 덕분이었다. 


   선생님은 정말 인간적인 분이셨다. 선생님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선생님이 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목표가 있으면 나이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전설과도 같은 말을 선생님은 실현하여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지만,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우리에게 훈계하지 않았다. 어른이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에게 훈계하지 않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그녀는 내가 그녀에게 과학을 배우던 모든 시간 동안 한결같이 겸손했다. 그녀는 강압적인 태도가 아니라 진실한 태도가 참된 카리스마라는 것을 내게 몸소 알려준 몇 안 되는 어른이었다. 나는 그녀와 같은 사람이자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내가 목표한 바를 이뤄내는 우직한 사람이. 상대의 위치와 상관없이 존중할 줄 아는 겸손하고 진실된 사람이. 


   나는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무작정 선생님과 가까이하기로 했다. 하지만, 과학이 너무 재미없고 최악이었다면 나의 계획은 애초에 무너졌을 것이다. 그녀는 정말 좋은 선생님이었다. 그녀가 가르쳤던 과학은 내가 알고 있던 어려움이나 복잡함과는 전혀 무관해 보였다. 수학을 끔찍이도 싫어했던 나는 그와 같은 계열이라는 생각에서 과학 역시 자연스럽게 멀리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가르쳤던 과학은 전혀 새로운 과학이었다. 매시간마다 이어졌던 새로운 과학 실험들···. 그녀와 가까이하고 싶어서, 그녀의 눈과 마음에 들고 싶어서 흥미를 가져본 과학에 나는 어느새 진심이 되었다. 그녀가 맡은 방과 후 과학실험반에도 들어갈 정도로 나는 과학에 푹 빠졌다. 내가 과학에 매료된 이유는 정말이지, 그녀의 덕이 컸다. 그녀는 정말로 과학을 사랑했다. 그녀가 별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반짝이던 눈을 기억한다. 실험을 할 때 아이들이 있던 책상을 쭉 돌며 미소 짓던 얼굴과 판서하며 설명할 때 설렘으로 가득 찼던 목소리. 나는 그녀에게 전염된 것처럼 과학을 사랑했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의 모습은 저렇게 반짝거리는구나. 시간이 흐르고 그녀가 가르쳐줬던 내가 사랑했던 과학에 대한 기억은 이제 대부분 사라지고 없지만, 이 기억만은 어제처럼 선명한 것을 보니 그녀는 과학보다도 내게 그것을 가르쳐준 것 같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할 것. 그리고 그 일에 진심을 다할 것.


   열심히 하는 내 모습을 그녀가 눈치채기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와 가까워진 나는 그녀에게 선생님과 편지를 주고받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흔쾌히 수락했다. 다행히도 나를 당돌하게 보지 않으셨다. 노트에 주고받던 그 편지에 선생님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말을 남기셨다. ‘미영아, 네 말에는 진심이 있단다.’ 열다섯의 나의 말을 그저 어린아이의 말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사춘기의 치기 어린 그저 그런 글로 여기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주신 분이셨다. 그분에게 내가 지닌 말과 글의 힘을 인정받았던 것은 그 순간만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큰 울림을 준다. 나는 지금도 종종 그 말을 생각하며, 나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불안을 거둔다. 어떤 면에서 선생님과 나의 관계는 <월플라워>의 찰리와 앤더슨 선생님 같다고 볼 수 있다. 영향력면에서도 그렇다.

 선생님은 멋진 사람이었고, 참된 어른이었다. 열다섯 살인 내가 만난 최고의 행운이기도 했다. 다만, 선생님을 탓할 점이 하나 있다면 선생님 때문에 나는 과학과 과학선생님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접한 과학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등을 돌리며, 선생님을 생각했다. 과학은 그저 같은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선생님 덕분이었다.


   선생님께 연락을 드린지도 오래되었다. 이 글을 써서도 있지만, 연락을 드릴 참이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열다섯이 아닌데 어째서 세상은 더 어려운지. 선생님은 어떻게 이토록 어려운 세상에서 그토록 자연스럽게 살 수 있었는지 묻고 싶었다.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별처럼 반짝이던 눈으로 우리에게 꿈을 이야기하던 선생님이라면, 그 해답을 아실 것만 같았다. 또, 꼭 그랬으면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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