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일타 스캔들>(tvN)이 아쉬운 결말로 끝이 났다. <일타 스캔들>은 대입 일타 강사와 그와 대조되는 반찬가게 사장이 사교육 전쟁터에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이다. 교육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 사회에 깊은 회의를 느꼈을 것이다. <일타 스캔들>에서는 ‘의대’라는 목표를 학생들에게 주입하고, 학생들은 이를 맹목적으로 욕망한다. 출신 고등학교를 기재한 과잠을 만든다던지, ‘에타’에서 오가는 끊임없는 ‘편 가르기’를 통한 순위 매기기가 어디서 왔는지, 결국 이러한 경향이 대학가에도 연장 적용되는 것 같아 아쉽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환경에서 그렇게 길러졌으니 이 사회의 대학생들은 모두 계속해서 <일타 스캔들>에 나오는 등장인물처럼 살게 될까?
영화 <아일랜드>(2005)는 이렇게 시작한다. 복제 인간인 새라(스칼렛 요한슨 역)는 본인이 복제된 줄도 모른 채, 자신이 지상 최후의 인류라고 생각한다. 새라는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지상 최후의 낙원 아일랜드로 떠나기 위해 ‘유토피아’속에서 엄격한 통제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아일랜드로 간다는 의미가 사실은 그들을 복제시킬 것을 의뢰했던 주인을 위한 죽음인 것을 모른 채.
새라는 복제를 의뢰한 주인의 필요에 의해 아무렇게나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다. 새라는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삶을 살 수 없다. 주어진 옷을 입고, 배식되는 음식을 먹는다. 그녀는 변화하는 존재가 될 수도 없고, 암묵적으로 주인과의 동일해질 것을 요구받는다. 새라가 아일랜드로 가기 위해 받는 모든 훈련은 한 가지 목표, 주인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주인이 필요로 하는 것은 복제된 새라의 육체일 뿐, 그녀의 가능성이나 선택에는 관심이 없다. 한스 요나스는 <책임의 원리>에서 ‘무지에 대한 권리’를 말한다. 자기 고유의 길을 찾아가며, 자기 자신에게 놀라워 할 수 있는 자유를 인간적인 삶의 권리로서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새라는 무지하지만 무지에 대한 권리를 가지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에서도 새라는 동료를 찾고, 함께 ‘유토피아’의 비밀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탈출한다. 살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찾고, 복제를 의뢰한 주인들을 찾으러 나선다. 교육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엔 항상 틈이 있다. 제아무리 한 가지 목표를 강요하는 주입식 교육 환경이라 한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복잡한 특징을 갖고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개인이다. 이것이 최악으로 돌진해가는 교육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이다.
영화 속에서는 새라는 새로운 동료와의 관계를 통해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본인의 인간성을 회복한다. 그 안에서 그들은 기존의 의미를 의심하고 비판하는 능력을 기르며, 진리를 찾는 여정을 떠난다. “자기갱신의 체험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보고 있다는 감각을 주고, 그 감각을 익힌 사람은 예속된 삶을 거부한다.”(<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그들의 관계, 그 안에서의 열린 교육의 경험은 그들이 복제된 인간으로서의 안전지대를 거부하고 진리를 찾는 모험을 떠나게 한다. 대학에서의 교육 또한 대입을 거치며 내재화 되었던 목표를 의심하고, 학우와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이고, 남보다 나아지는 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