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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혜ㅣ Grey Mar 29. 2023

뉴욕의 칵테일 파티에서 나 혼자 수면잠옷을 입었을 때


“응? 뭐라고? 책 읽느라 못 들었어.” 내가 어렸을 때 자주 했던 말이다.

책만 읽으면 주변 소리가 잘 안 들리길래 나는 내가 문과계의 천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저 남의 말을 안듣는 애였던..)


대학 전공수업을 들으면서 쓴 레포트 중 하나에는

‘A++, 미래의 칼럼니스트!’라는 코멘트가 달렸다.

앞으로 나가 교수님과 악수도 하고 칭찬도 받았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하마터면 그 교수님을 따라 대학원을 갈 뻔 했으나 다행히 가지 않았다.

‘뭐, 나중에 본업도 하면서 사이드로 글 좀 써보지.’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플랜비디자인은 2018년부터 구성원 모두가

칼럼을 쓰고 그것을 엮어 책을 만들어왔어요.

그러니 그레이도 한 달 뒤까지 칼럼을 써서 제출해주세요."

뭐, 설날도 껴있으니까요. 여유있네요.


그.러.나. 마감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아니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됐는지는 알 수가 없었는데

하여튼 자정이 되었다.


그러나 1일이 마감이라고 하면 1일 아침 9시까지는 시간이 있는 법이다.

나는 이 계산법으로 유구히 많은 일들을 말아먹어왔지만,

9시간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침대에 누워 생각해보자.. 내 입사가 반년만 더 늦었더라면 어땠을까..


sns를 들어가보니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서로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이런 글을 남겼다.

똥인지 된장인지는 싸봐야 안다!

맞다. 이게 똥글인지 아닌지는 싸봐야 아는 거 아닌가?

하지만 곧바로 이런 댓글이 달렸다. ‘싼다고 말한 순간부터 님 글은 똥인거임


상심한 나머지 다시 침대에 누워 2시간 정도 인터넷 서핑을 했다.

업무용 협업툴 잔디에 알림이 울렸다. 에일린이 칼럼을 올렸다.

아. 진짜 이 시간까지 썼나봐. 대박이다.

이제 진짜 나만 안썼나봐.... 개복치가 되어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밤새 신발요정들은 다녀가지 않았고

하얗게 질린 화면은 그대로였다. 질렸니, 나도 질렸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글쓰는 것 보다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낫겠지?


그길로 망원동의 독립서점에서 열리는

‘미루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쓰는 법’ 북토크를 신청했다.

‘미루는 사람’, ‘에세이 쓰는 법’ 책 제목이 심지어 ‘미루리 미루리라’였다.

책 제목에 걸맞게 미리 사둔 책을 한 페이지도 읽지 못하고 도착했다.


곽민지, 이진송 작가의 <미루리 미루리라>



토크가 끝나고 질문을 했다.

‘제가 칼럼을 써야하는데요. 글을 쓰면 쓸수록 어떤 느낌이 드냐면요.

뉴욕의 칵테일 파티에서 저 혼자 수면잠옷을 입고 있는 느낌이거든요?

어떻게 해야할까요?’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프로페셔널 작가님은 웃으시면서 ‘수면잠옷이 필요해서 부르셨을거예요.’라고 말씀하셨다.

너무나도 다정한 소리였으나 내가 원하는 답변이 아니었다.

작가님 제 고민의 요지는요 수면잠옷 말고,

지금 당장 아무 노력없이 2022 S/S 지방시 오뜨꾸뛰르 컬렉션을 입고 싶다는 거 거든요..

(라고 생각했으나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해서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행..)


북토크의 영향으로 열심히 글을 썼을 사람이면 애초에 밀리지 않았을거다.

그리고 북토크 갈 시간에 썼겠지.

어떤 작가는 엉덩이로 쓰고, 누구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는데

나는 일단 집 앞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을 사서 고소한 커피와 신 커피를 번갈아 마셔가며 글을 썼다.

아니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은 커피도 안마시고 책을 썼단말이지.


칼럼을 제출하며 제임스께 물어봤다.

‘아니 칼럼 한 편도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책을 쓰시나요?

혹시 다니엘한테 협박을 받고있나요?’ (그렇다면 당근을 흔들어줘)


당신은 한 달 후에 칼럼을 쓰게 된다



메리 올리버는 「긴 호흡」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을 쓰는 건 개를 목욕시키는 일과도 같았다.

다듬을 때마다 조금씩 깔끔해졌다.

하지만 개를 목욕시키다 보면 개가 너무 깨끗해져서

개다움을 완전히 잃을 위험에 처할 때가 있다.

나는 이와 같이 책도 너무 많이 씻어내게 될까봐

수건을 내려놓고 책에게 다 끝났다고 말했다."


차후에는 모르겠으나 2022년의 나에게는

수면잠옷이 나답게 어울리는 옷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수고했다. 수건을 내려놓고 칼럼을 보내주었다.


플랜비디자인은 2018년 이후,말은 흩어지고, 글은 남는다는 신념 아래 계속해서 우리의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구성원들 모두가 참여해 글을 쓰고 책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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