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하고 싶은 나라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이유
“헬조선.”
한때는 자조였고, 한때는 밈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냥 현실이 되었다.
이 단어가 처음 유행하던 2010년대 초반, 사람들은 “너무 심한 거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헬’이라니,
나라를 그렇게까지 표현하는 게 과연 적절한가?
하지만 시간이 흘렀고, 이 말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보통명사가 됐다.
문제는 단어가 과격해서가 아니라, 현실이 그 단어를 따라잡았다는 것이다.
1. ‘지옥’이라는 이름에 사람들이 무뎌진 이유
지옥이라는 말은 공포를 동반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 지옥을 일상처럼 살아간다.
수능 5등급의 고등학생이 가상자산에 투자하다 전세금을 날린다.
비정규직 계약직에서 버티다 결국 앱 알림을 기다리는 플랫폼 노동자가 된다.
명문대 졸업자조차 공공기관 입사 실패 후 다시 학원을 전전한다.
이 나라의 2030 세대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철 지난 광고 카피처럼 대한다.
그들은 그 단어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그리고 얼마나 무책임한지를 안다.
그래서 분노하지도 않는다.
이미 포기했기 때문이다.
2. 왜 탈출하지 못하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싫으면 떠나면 되잖아.”
이 말이야말로 헬조선적인 가장 잔인한 표현이다.
떠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언어가 필요하고, 네트워크가 필요하고, 시민권이 필요하다.
즉, 탈출도 계급이다.
자유롭게 떠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유롭게 살던 사람들이다.
반대로, 헬조선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일수록 떠날 수 없다.
이 나라는 그렇게 이중 구조다.
3. 출구 없는 경쟁과 계층 고착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교육 경쟁, 부동산 상승률, 고용 불안정성을 동시에 갖춘 나라다.
어릴 땐 시험으로 줄을 세우고,
청년이 되면 취업 스펙으로 줄을 세우며,
어른이 되면 자산으로 줄을 다시 세운다.
그리고 그 줄은 거의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헬조선은 ‘불공정’의 문제가 아니라 ‘무의미’의 문제다.
노력해도 결과가 없고, 버텨도 방향이 안 보이는 곳.
이것이 사람을 무너뜨린다.
4. ‘헬조선’이라는 말의 본질은 냉소가 아니다
‘헬조선’이라는 말은 청년들이 만든 최초의 대규모 사회비판 담론이었다.
그들은 무력했고, 그래서 언어를 만들었다.
그 언어는 위트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어기제였다.
욕이라도 해야 버틸 수 있었고, 밈이라도 만들어야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국가는 그 말을 문제 삼았고, 정치권은 ‘자기비하’라며 타박했다.
국가가 한 번이라도 그 단어를 만든 현실을 직시했더라면, 지금 상황은 조금 달라졌을까?
5. 지옥의 문은, 늘 안에서만 열린다
사람들은 여전히 외친다.
“희망을 가지세요.”
하지만 말뿐인 희망은 지옥을 연장한다.
진짜 희망은 불을 끄는 일이다.
출산율, 자살률, 자산 불균형 같은 수치에 철학을 입히고,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가장 많은 이들이 가장 적은 걸 가지고 살아가는 나라에서
이젠 말이 아니라 구조를 교체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헬조선”은 단어가 아니라 진단이다.
그것은 현실을 과장한 표현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묘사였다.
탈출구가 없는 나라에서 청년들은 떠나는 대신, 사라지고 있다.
국가는 그 사라짐을 방치하지 않고, 바로 지금 질문해야 한다.
누가 이 지옥을 만들었는가?
그리고 누가 여기서 살아남아야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