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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온한 삶 Feb 08. 2021

책임감은 내 선택의 결과다.

어느 날 동생이  슬며시 내 곁에 앉았다.

“누나, 나 미국에 가려고 해”

가슴에서 쿵하는 소리가 난다.
한번 뱉은 말은 항상 행동으로 옮겨온 동생이기에  말 한마디의 무게감은 묵직했다.

동생은 그렇게, 공부를 더한다는 말만 남긴 채 담담하게 미국으로 떠났다. 동생이 떠났다는 건, 부모님의 노후 생활을  내가 오롯이 챙겨야 하고,  그 모든 책임이 나에게 귀속된다는 의미였다.

평소 효녀라는 얘기를 들었으나, 나의 실체는 효녀와는 거리가 먼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게 두려움이 엄습해오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책임감이 강한 난 두려움을 내 뒤에 남겨두었다.
어깨에 짐을 슬며시 올려놓고, 앞만 보고 달렸다. 과외강사에서 공부방으로, 그리고 어학원 확장으로 오로지 앞으로 만 나아갔다.

무거운지도 몰랐고, 무겁다고 말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실상은 너무 버거워 견디는 시간들이 더디게 흘러갔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줄만 알았다. 장녀에다가, 부모님에겐 나뿐이었다.



​얼마 전, ‘오베라는 남자’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거기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죽지 않으려면, 죽을 만큼 버텨야 한다”
버티는 게 미덕이고 당연하다 생각해왔다.



​올해는 동생이 미국에 간지 15년 차다.
그동안 동생은 교수로 명성을 날리고, 난 사업을 성장시켜왔고, 엄마, 아빠는 그만큼 늙으셨다.



얼마 전, 2주간의 자가격리를 마치고 동생이 한국에 왔다.
동생이 내가 좋아하는 향수를 선물했다. 향수병을 보며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15년 동안 짊어졌던 짐에 대해서다.



아빠는 사업을 마무리하시며

“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있는 집 팔아서 쓰면 된다. 넌 걱정할 필요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줄곳 거기에 살았다. 한 번도 이사 간 적이 없고, 나와 함께 나이를 먹은 아파트였다. 그 집은 꼭 지키고 싶었다. 그 집은 다행히 아직 팔지 않고 가지고 있다. 15년 동안 부모님께 생활비를 드리며, 장녀 역할을 해냈다. 풍요롭지는 않지만, 부족함도 없도록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했다.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전지대에 놓이고 ‘나도 게으름을 피워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 때, 부모님 생각을 하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난 우리 집 가장이었다.
항상 감정적이면 안된다고 믿고 살던 내가 향수병을 보고 울음이 터졌다. 오랫동안 쌓인 감정들이 한꺼번에 폭발 중이었다.


책임감이란 무엇일까?


항상 가지고 있었고, 내가 가지고 있어야만 했던 것.
문득 책임감이 내 삶에 주는 의미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누가 나에게 그런 짐을 짊어지라고 얘기한 적이 없었다. 강요한 적도 없고, 눈치 준 적도 없는데 , 스스로 선택한 결과였다.


되돌아보면,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며 누군가를 보살피는 일은 마음의 버팀목이 되었다.

‘누가 나를 원하고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다’는 느낌은 내 삶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원동력이었다.

돌봐줄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것!
그건 나에게 또 다른  삶의 의미였다.

책임감의 다른 이름은 삶의 버팀목이었다.
어깨를 으쓱해본다. 확실히 훨씬 가벼워졌다, 앞으로도 가장이겠지만, 그 역할을 좀 더 기쁘게 받아들이게 된다. 내가 이 세상에 나뿐만 아니라 가족을 챙기고 보살 필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사업을 하고 월급을 주며 직원들의 가족까지 챙기고 있다는 건 가슴 뛰는 삶의 의미이다.

행복감이 몰려온다.

동생에게 나는 괜찮다고, 정말 괜찮다고 전화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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