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무(無)의 증명

최진영의 <구의 증명>을 읽고

by 냉정과 열정 사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려야 삶이 완성되는

그림이 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죽어버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져본 적이 없었으므로

없었다 보다는 없다,라고 쓰는 게 맞겠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나를 뜯어먹고 있는 담이를 바라보며

육체가 천천히 파 먹혀가는 나로서는

더는 알 필요 없는 문제겠지만,

글쎄요, 언제까지고 그렇게 살았을 것 같습니다

담이가 옆에만 있는다면.


슈퍼울트라캡숑 아빠가 되는 방법이

좀 더 두들겨 맞아야 하고 좀 더 피 흘려야 한다면

얼마든 그렇게 할 수 있었을 텐데,

눈에 아무렇게나 들어오는 밤의 황량한 거리는

식어버렸고, 툭툭 걸리는 돌부리도 그렇고

공중전화부스에서 수화기를 쥐었을 때의 서늘한 감촉을

기억합니다


조금만 더 아무렇게나 살아있고 싶었습니다

담이가 나를 다 먹고 난 뒤에 더 오래 살아서,

내가 못 본 것들을 다 보고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아이가 나를 증명해 주기를

내가 아직도 못 다 풀었던 무(無)를 증명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