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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한손수레 Apr 25. 2024

기쁘게, 하지만 무겁게.


"엄마, 우리도 강아지 키우면 안돼요?"


9살 아들은 지나가는 강아지만 보이면 내 눈치를 보며 슬쩍 묻는다. 고개 돌려 아들을 바라보니 역시 나의 대답을 이미 아는 표정이다. 이미 알면서 왜 묻는 걸까.


"엄마, 제가 잘 돌봐줄 수 있어요."


6살 딸은 오빠의 용기에 힘이 들어갔는 지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한다. 이미 키우고 있는 상상이라도 한 것인지 눈에서 빛이 나고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안돼."


단호한 나의 대답은 아이들의 뾰루퉁한 입과 눈물바람으로 이어진다.


"엄마, 나빠. 엄마는 맨날 엄마 마음대로야. 왜 안되는 건데."

"..."


두 아이를 붙잡고 강아지를 키울수 없는 이유를 말하자면 열가지도 넘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아이들이 다 납득이나 할까. 결국 말을 아꼈다.


대학교시절 푸들을 키웠다. 나는 무책임했고 결국 강아지는 부모님 손에 맡겨졌다. 지금까지도 나는 '초코'를 보면 죄의식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후 강아지를 선물받게 되며 다시 한 번 강아지와 인연을 만들었지만, 당시 남자친구인 남편의 제안으로 지금의 시댁마당으로 보내졌다. 결국 나의 무책임함은 변한 게 없었다. 시댁 마당으로 보내진 강아지는 언젠가 멀어지는 내 차를 뒤쫓다 없어졌다고 했다.


이 짧은 두 사건만 봐도 나는 강아지를 키우면 안되는 사람이다. 강아지를 키운다는 건 보호자로서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어야 하고 돌볼 수 있어야 한다. 반드시 필요하고 최소한으로  갖추어져야 하는 소양이 책임감이지 않을까.


그 이후 나는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럴 자격이 내겐 없었으니까.


굳건하던 내 각오가 흐물흐물해진 건 아이의 심리상담이후였다.


"아이에겐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님만 있고 아이를 포용해주는 엄마가 없었습니다."


나는 아이마저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고 있었다. 많은 자책과 속상함에 사로 잡혔다. 그리고 이런 아이에게 반려동물은 치료와 힐링이 된다며 권고받았다. 아이와 부모의 대화 화제가 만들어지는 역할도 톡톡히 한다며.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으로 내 아이를 위해 다시 한 번 반려동물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래도 쉽게 수용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남편의 의견을 물었다.


남편은 시골에서 나고 자라 네 발 달린 짐승은 집안에서 함께 사는 게 아니라는 마인드가 있었다.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나보다 더 큰 두려움이 있었으리라 추측한다. 우리들의 고민은 항상 같은 방향으로 답을 내렸다.


우리는 반려동물과의 생활이 불가능하다.


그러다 아들은 점점 타인을 배려하는 행동이 없어지고 말도 거칠어지는 상황이 왔다. 베푸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어느 것 하나 손해를 보게 되면 참지 못했다. 너와 내가 더불어 살아가는 게 아닌 마치 생존하기 위해 필사적인 사람처럼 보였다. 고작 9살 아이가 말이다.


그쯤부터다. 남편을 데리고 애견샵을 수시로 방문한 게. 그렇게 유리창 너머로 작은 투명 상자같은, 비좁은 공간에서 장난치며 노는 귀여운 강아지들을 보며 사람이 제일 잔인하다고, 우리가 바로 그 사람이라며 돌아섰다. 우리가 강아지를 데려온다면 마치 아들의 행복을 위해 그 강아지의 행복을 뺏는 기분일 듯했다. 엄두도 나지않았고.


처음 유기견센터를 고민하던 우리는 이미 상처가 있는 아이들은 더욱 많은 사랑으로 우리가 보살펴줘야 할텐데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10개월을 넘게 고민하며 애견샵만 서성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눈에 한 아이가 들어왔다.


"얜 어디서 봤다고 이렇게 난리일까."

"그러게. 유독 당신한테 난리네."


우리 둘은 한참을 녀석을 바라보다 발을 돌렸다. 그 와중에도 남편의 시선은 녀석에게 있었다.


한참을 애견샵거리를 돌아다니던 우리는 어느새 다시 그 강아지 앞에 서있었다. 어디갔다왔는 지 묻기라도 하듯 녀석은 남편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손을 창으로 내밀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보, 쟤 우리가 데려갈까."

나의 말에 남편은 처음으로 망설였다.


"우리가 잘 키울 수 있을까."

늘 확고하게 거절하던 남편의 말랑한 대답을 들으니 괜히 내가 각오를 다졌다.


"여보, 우리가 쟤 데려가면. 사실, 우리는 진짜 이기적인 마음으로 데려가는 거잖아. 가족은 당연하고 진짜 우린 쟤한테 잘해줘야해. 우리가 할 수 없는 걸 해달라고 데려가는 거니까. 은인으로 알고 진짜 잘해야돼. 잘 키울 수 있냐 없냐가 아니라 진짜 잘 키워야만 하는 거야."

"..."


신중한 남편은 역시 말이 없어졌다. 물끄러미 녀석만 바라보더니 녀석의 앞발이 닿아있는 창에 손을 맞댔다.


그 날, 새 식구가 생겼다. 나의 각오에 대한 남편의 대답없이. 아이의 행복을 위해 이 녀석을 희생시키는 것처럼. 기쁜 마음보다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 기쁘고 무거운 마음을 지속할 수 있도록 인간의 이기심으로 망각하지 않도록 두부와 함께하는 날들을 추억으로 새기며 써내려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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