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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한손수레 Apr 07. 2023

잔혹한 서울 모험기 1탄

시작은 창대했다.


" ... 용산행 열차를 타실 분은 ... "

안내 방송의 목소리가 예쁘다. 그래서인가. 두근대기 시작했다. 예쁜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두리번거리며 발을 옮겼다. 사람들이 몰려가는 그곳이 대충 그곳이겠지. 앞선 사람들이 어딜 가는지 모르겠지만 쫄래쫄래 따라갔다.


KTX가 등장했다. 날 데려다줄 애.

생각보다 빛이 바랬고 생각보다 낡았다.

오히려 드는 친근감에 우두커니 서서 잠시 바라보았다.

근데, 16호라고 적혀있네. 나는 1 호칸인데.

머리를 찾아 걸었다. 시작부터 KTX는 참 길다는 걸 배웠다.


'...바나나는 길어, 길면 ktx'

의미 없는 유치한 흥얼거림을 열여섯 번쯤 반복했을 때 1호차의 글씨를 발견했다. 냉큼 다리를 뻗어 높은 층계를 올랐다. 겉의 모습과는 다르게 안의 의자나 바닥들이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아무도 없네, 내가 통째로 빌렸었나.'

혼자 재벌 놀이를 하며 의기양양하게 맨 끝 14D에 앉았다.

가방의 물건들을 꺼냈다. 여기가 내 자리라고 이름을 쓰듯. 노트와 펜. 세상 물가가 올랐음을 알려준 2200원짜리 소보로. 둘째 이름이 적힌 텀블러.


승무원아저씨가 지나간다.

"안녕하세요."

뭐라 불러야 할지 망설이다 냅다 인사부터 했다.

발걸음을 멈추고 날 돌아본 승무원아저씨는 의아한 눈빛이지만 미소를 띠며 인사를 받아줬다.

"열차 안에서 이거 먹어도 되나요?"

간절한 손가락으로 소보로를 가리켰다.

아저씨는 이내 웃으면서 당연히 된다고 하셨다.

나만 몰랐던 사실 하나를 또 배웠다.


곧이어 서서히 창밖의 페이지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분위기 있었다. 센치해졌고 괜시리 벅찼다. 뜯어먹은 소보로 한 꼬집까지.


책을 읽다가 피곤하면 글을 썼다. 옆에 앉은 알콩달콩 젊은 커블의 대화를 배경음악 삼아.

어느 순간 다리 위를 달리고 있었고 파란 물이 한강이라 자기소개했다. 평화로웠다. 이때까지는.

심장이 조금 빨리 뛰었고 소보로 빵이 맛있었다.


내가 탄 기차의 종착역이 용산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도착했다.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쫘 펴고 꼿꼿이 허리를 세워 걸었다. 난 도시여자다.

"저기요."

대답대신 이마주름과 눈썹을 올리며 쳐다봤다.

젊은 여자가 한없이 친절히 말한다.

"가방 문 열렸어요."


돌이켜보니 이게 잔인한 서울 모험의 첫 단추였던 것 같다.

발그레해진 볼도 잠시, 넓은 용산역에 괜스레 어깨가 올라갔다. 한 손에는 구글맵을 킨 폰을 쥐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다가갔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분명 이전에 카드를 써본 적이 있다. 부산에서는 늘 지하철을 이용했다. 그런데, 내가 갖고 있던 모든 카드를 갖다 대도 지하철 출입구는 날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역무원 아저씨와 지하철 표 뽑는 기계 앞에 나란히 서서 목포에서 왔음을 시인했다.


친절한 역무원 아저씨는 시골에서 온 지하철 표도 못 끊는 아줌마가 신경 쓰였는지 연신 몇 번으로 가라 외치셨다. 이 동네사람들 중에 내가 목포에서 온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 까. 신랑이 아침에 보내왔던 톡이 떠오른다.

'낯선 사람 따라가지 말고 조심히 잘 돌다와.'

'놀다 와'가 오타가 난 건가. 신랑 말이 씨가 되어 이후 나는 잘 돌게 된다.


지하철을 타니 자연스레 두리번거렸다.

'오잉, 자동문이네. 있어 보인다.'

지하철 칸 이동문이 자동문인 게 눈에 들어왔다. 부산에서 칸을 넘어가려면 온몸을 반대로 보내며 당겨 열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하철 유리창은 훨씬 더럽네.'

부산에서는 지하로만 다니는 2호선을 매번 이용했다. 지금 나는 지상으로 달리고 있네. 그래서인가. 한강을 햇빛 받으며 쿠궁쿠궁 달리니 나도 모르게 이쁜 척 표정을 지었다. 청량감 넘치는 음료수 CF 스타마냥 햇빛에 샤방해지려 유리창으로 얼굴을 더 밀어 넣었다.


나만 사진을 찍었다. 목포에서 온 거 티 나나? 뭐 어때. 이미 다 소문났는 데. 슬며시 눈치를 보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머리 긴 남자, 머리 짧은 여자, 하얀 머리의 젊은 남자까지 온통 내 눈에는 서울이었다. 그들의 귀에 검은콩과 하얀 콩나물까지도. 음악이 없어 아쉬웠는 데...

'같이 듣자 하면 신고당할까?' 용기가 나지 않아 음악을 포기했다. 다시 사람 구경을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눈을 감고 있었고 눈을 뜬 사람은 폰을 본다. 사람을 보는 건 나 하나인가. 옆의 여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웃었다. 그녀의 반응은 차가웠다. 마스크 때문에 잘 안 보이나? 아, 내가 못 보는 거일 수도 있겠네. 마스크가 그녀와 나에게 거리를 만들었다.


지하철을 갈아타기 위해 내렸다. 늘 그렇듯 우리 인생은 매 순간 선택이다. 왼쪽? 오른쪽? 다 같이 몰려가는 섞이기 싫었다. 지금 내 기분이 특별하달까. 다들 왼쪽으로 가니까 나는 오른쪽으로 가봐야지.

'어? 여긴 왜 안내판이 하나도 없지?'


내 서울 모험을 위해 보물 찾기라도 준비한 건가. 이렇게까지 없다니. 걷고 걸어서 드디어 찾았다. 보물!

'으앗, 완전 반대였잖아.'

참 많이도 왔다. 괜찮아. 이제 반대로 가면 된다는 걸 알았다. 오랜만의 낯선 곳에서의 걸음은 날 설레게 했다. 주저 없이 움직였다. 걸어왔던 만큼 걸어서 제자리로 갔다. 그리고 내가 가지 않았던 방향으로 다시 걸었다. 이제 다 왔나? 계단을 올라온 찰나, 잠시 주춤했다. 나의 긍정파워도 순간 바람 앞의 촛불처럼 아슬했다.

'나는 지하철을 갈아탈 거라고! 출구, 니가 왜 거기서 나와!'


2초의 숨 고르기. 뇌에 프레쉬한 공기를.


좋아. 다시 처음 자리로 가보자. 형사들도 사건이 안 풀리면 처음부터 재수사한다. 내가 내렸던 곳으로 돌아가 셜록 홈즈가 되어 하나의 증거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사방을 샅샅이 훑어 보았다.


아... 눈앞에 대문짝만 한 안내를 보지 못했네. 나의 탐정놀이는 아쉬운 탄성과 함께 끝났다. 다시 성큼성큼 걷는 다. 이렇게 가까웠는 데. 오늘 '사당역'을 정복했다. 마침 들어오는 지하철에 가볍게 달려갔다.


잘 돌고 있다, 여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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