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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한손수레 Apr 08. 2023

잔혹한 서울 모험기 2탄

왜 이런 시련을..


"지하쌤, 이제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의 멘토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분명, 비즈니스 미팅인데, 힐링 팬미팅 같은 시간을 보냈다.

대단한 그들과 함께 있는 내가 대견했고 자랑스러웠다.

마주할 만큼 많이 컸구나. 잘 컸구나.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을 만큼 아쉬웠지만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다. 따뜻한 사람들과 아쉬움의 포옹을 나누고 돌아섰다.


이제 다시 혼자다. 하지만 발걸음은 더 단단하다.

왔던 길이라 자신감이 자란 걸까? 나의 꿈들과의 대화로 성장한 걸까? 내가 누군가의 꿈이 되었을 때, 서울의 길을 우리 동네처럼 잘 알게 될까?


지하철로 몸을 싣는 데 왠지 친숙함이 느껴진다. 거침없이 지하철을 갈아타며 용산역까지 왔다. 습득력이 빠른 나란 여자. 홀로 칭찬하며.


빠듯하지도 잉여롭지도 않은  약간의 여유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도 있는 데 화장실이나 갔다 가야겠다.'

자신만만하게 화장실로 들어섰다. 더 이상 나는 쫓기고 있지 않았다. 두 갈래의 줄에 잠시 주춤했다. 본능적으로 조금 더 짧은 쪽으로 냉큼 섰다. 내 차례가 순식간에 다가왔다. 그때 발견했다. 실내화 변기임을. 크게 문제 될 건 없어서 갔는 데 충격 그 자체였다. 서울 사람들, 아니 서울 여자들은 모두 똥쟁이인 것인가. 물을 내릴 줄 모르는 것인가. 몇 인분의 똥을 본 건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빠르게 나온 이유는 상쾌함을 포기한 거였다는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부여잡고 긴 줄로 가서 다시 줄을 섰다.


'화실실에서 시간 보내느라 늦지 않겠지?'

슬그머니 부정이가 나를 건드린다.


의자변기의 수가 더 많다 보니 이번에도 순식간에 내 차례가 돌아왔다. 하얀색의 빠글 머리 할머니가 불쑥 나타나 긴급하게 문을 두드리며 다녔다. 한 줄 서기 문화가 어려울 나이시지, 암만. 마침, 사람이 나오는 칸을 향해 할머니는 젊은이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가셨다. 무사하시길. 마음으로 할머니의 상쾌함을 응원했다. 천천히 열리는 다음 문을 보고 나의 상쾌함에 다가갔다. 그리고 변기의 청결도를 매의 눈으로 스캔했다. 나의 귀한 빵댕이를 댈 것이기에 휴지로 혹시 모를 더러움을 차단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바지를 내렸다.


"... 목포행 열차는... 3시 33분 출발합니다..."


'이상하네. 내 표 사십몇 분이었는 데... 지금 몇 분이더라..?'

혹시 모를 불안함에 허겁지겁 바지를 올렸다. 상쾌함은 다급함으로 바뀌었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전광판에 노랗고 큰 글씨의 3:34와 목포가 눈에 들어왔다. 게이트번호 6을 확인하자마자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팔짝팔짝 뛰었다.

'어딨 는 거야, 도대체.'

용산역은 내게 익숙한 목포역과 그 스케일이 달랐다. 목포역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입이 하나였지만 용산역은 큰 괴문처럼 입이 참 많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여유로움에 흥얼거리던 나는 뛰고 있었다.


"야! 빨리 와! 목포 여기잖아!"

용케도 내 귀가 그 귀한 정보를 낚아챘다. 조심히 그 사람의 뒤를 밟았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나의 미행은 6번 게이트에 도착했을 때 끝났다.  그리고 익숙한 상황.


여기는 1번 칸이네. 나는 이번에는 15번 칸인데...

KTX는 길었는 데 말이지.

그래도 나를 데려갈 ktx를 만나니 긴장이 풀렸다. 안도하며 종종걸음으로 15라는 숫자를 찾아 또 걸었다.


13을 확인하는 그때, 유니폼을 입은 이쁜 언니가 나를 바라보았다.

'왜지? 왜 오는 거지? 나 마스크 썼는 데?'

마스크로 향한 내 손이 어색하다.

"표 좀 보여주시겠어요?"

"네, 여기요!"

'왜. 왜. 왜. 나 잘못한 거 없는 데...'

게이트를 찾을 때 생명줄처럼 붙잡고 있던 표를 그녀에게 건넸다. 잔뜩 구겨진 표가 나의 긴장감을 일러바친다. 그녀의 표정에 다급함이 번졌다.


"고객님, 이 기차 아니에요. 이건 9번 게이트로 가셔야 합니다. 이 기차는 34분, 고객님 기차는 48분 기차입니다. 9번 게이트는 위로 올라가셔 가셔야 해요. 서두르세요."


그녀의 랩은 친절하고 다급했으며 또박또박했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듣지도 하지도 않고 계단을 발견하자마자 무작정 달렸다. 계단도 성큼성큼 올랐다. 한 칸 두 칸 두 칸 다시 한 칸.

'운동 좀 해야 하는 데...'

뜬금없는 반성을 했다.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고객님, 491번 열차 맞으시죠?"

친절한 그녀는 마지막까지 책임감으로 소리쳤다.

"네! 꼭 탈게요! 감사합니다!"

그녀의 책임감에 안도감을 주고 다시 달렸다.


시간은 43분. 진짜 나의 가족이 나타났다. 다리의 힘은 이미 풀려있었다. 하지만 다시 힘을 줬다. 눈앞의 칸은 3번 칸이었다. 제발... 아놔... 빠르게 뒤를 향해 걸었다.

'여차하면 타서 뒤로 가야겠다.' 나름의 플랜비를 짰다. 그래서 여유가 생긴 건지 또 읊조렸다.

'...바나나는 길어, 긴거는 KTX...'

KTX가 길다는 것은 절대 잊지 않을 듯하다.


그렇게 14D를 찾아가니 옆자리에 여자분이 앉아있었다. 여자라 다행이라는 생각과 어떻게 들어갈지에 대한 고민이 동시에 들었다. 꽤 키가 큰 여자는 딱 보기에도 다리가 내 두 배는 될  것처럼 길었다.

"죄송합니다."

이유 모를 사과를 했다. 몸을 구겨 넣었다. 나의 공간으로. 다리 긴 여자 위에 앉다니피 내 자리로 왔다. 선사과 후잘못.

그렇게 앉아서 익숙한듯 내 이름을 자리에 새기기 시작했다. 노트와 펜. 마침 기차는 나를 토닥이듯 흔들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락한 기차의 위로는 전날 새벽 3시까지 글을 쓰고 새벽 5시부터 몸을 움직인 나를 기절시켰다. 얼마나 흘렀을 가. 마치 시몬스 같은 편안함이었는 데...

'코를 곤 건 아니겠지?'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려다 그만뒀다. 이제 안 자면 되지. 코를 골았다한들 이미 벌어진 일. 내 피부의 두께가 1cm 두꺼워졌다.


오늘의 모험기를 따끈따끈할 때 풀어내고 싶었다. 서둘러 노트를 펴고 낯선 곳에서의 설렘과 두려움을 모아둔 폰 메모장도 꺼냈다. 옆의 여자의 시선이 느껴진다. 곁눈질로 보니 그녀는 자고 있었다. 연예인병이 이거구나. 냉정히 나는 작가지망생이다. 스스로 작가라 믿는. 모두가 나의 글 쓰는 모습을 보고 있을 거라는 착각과 설렘 속에서 까만 글자를 늘려갔다. 이게 내 장점이지, 뭐야. 다들 나만 보니 딴짓을 할 수가 없잖아. 글쓰기에만 집중해야지. 늘 최면을 건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될 때쯤이었다.


"아니, 여기가 내 자리인데, 왜 여기 앉아있소?"

"무슨 말씀이세요? 잘 보세요."

"맞다고. 13C."

"열차칸도 확인하셨어요? 여기 15호차예요."

"15호차. 맞다니까. 보쇼."

"어? 진짜네요? 왜 이렇지?"

"당신 것도 봅시다. 무슨 표를 이렇게 팔았대."

"여기요."


앉아있던 여자가 뒤적거리며 표를 찾아 건넸다. 그때부터 철도공사 욕이 오갔다.


"아니, 무슨 표를 이렇게 판다냐, 입석도 아니고, 참내."

"그러게요. 일처리를 왜 이렇게 했을 까."

그러다 문득 앉아있던 여자가 맞장구를 중단하더니 큰 깨달음을 얻은 듯 목소리를 높였다.


"잠시만요! 이거 제 자리가 맞아요! 익산에서 타셨어야죠. 제가 익산까지 가거든요. 제가 내리고 앉으시는 게 맞아요!"


응? 무슨 말이지? 2초간 버퍼링이 걸렸다. 저게 말이 되나..?


정적을 깨고 입을 뗀 건 아줌마와 할머니 그 경계쯤일 것 같은 서있던 여자였다.

 

"여가 익산이니까 내가 탔겄제?"

"여기가 익산이라고요?"


앉아있던 여자는 보이지 않는 적에게 한 대 맞은 듯 비명 같은 대답을 했다. 이내 허겁지겁 짐을 챙겼다. 벌떡 일어섬과 동시에. 대단한 판단력이었다. 그 와중에 사과도 놓치지 않았다.


"이미 지나쳐서 어쩌지, 저는 다음에 내려야겠네요. 어서 앉으세요. 죄송합니다."


황급히 다른 칸으로 여자는 사라졌다. 꽤 오랫동안 새로운 13C의 주인은 지인에게 여자의 정신없음을 나무랐다. 13C의 전주인도 잔혹한 모험기가 생겼다.


어느새 내 옆자리는 내 가방이 차지했고 13C도 주인을 잃었다. 열차는 서서히 멈추었다. 내가 잘 아는 목포에. 아침에 서있던 자리에 다시 섰다. 익숙했던 곳에 작지만 큰 변화가 있었다. 조금 어두웠고 많이 추웠다. 조금 기대됐고 많이 벅차올랐다. 팔팔했던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침에 주차했던 차에 타서 집으로 가는 네비를 찍었다. 빨간 벨로스터가 출발했다. 이제 나는 운전대를 잡았다. 가는 것만 남았다.


남편말대로 오늘 잘 돌았다. 앞으로도 꾸준히 걸어가겠지. 계속계속. 서울이 익숙해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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