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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경 May 11. 2022

내 머리카락이 이렇게나 많이 빠진다고?

나만 헨젤과 그레텔처럼 머리카락으로 흔적을 남기는지.

머리카락이 빠진다. 사람은 모두 머리카락이 빠지지만, 이건 빠져도 너무 빠진다. 드라이어로 머리를 탈탈 털고 나면 내가 드라이어를 어느 쪽으로 썼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바람의 방향에 따라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다. 이쯤이면 헨젤과 그레텔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과자를 떨어뜨려 자신이 온 길을 표시했는데, 나는 내 머리카락으로 나의 행동반경을 확인할 수 있다. 가족들과 함께 살 때는 용의자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혼자 사는 지금, 수없이 많이 떨어진 머리카락의 범인은 바로 나 하나뿐이다.


내 눈앞에 사정없이 흐트러져 있는 머리카락을 쓱쓱 닦아내어 휴지통에 버린다. 뭉쳐져 있는 머리카락이 꼭 내가 싫어하는 벌레 선생님같이 보인다. 쓰레기통에 꾹 눌러 넣고 뒤를 돌아서면 또다시 머리카락이 나를 반겨준다. 하나도 반갑지 않다. 한두 올 정도면 못 본 척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내가 청소를 하지 않은 것처럼 흐트러져 있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으면 이 녀석들이 나를 놀리기 위해 어디 숨어있다가 나타나는 거냐는 생각이 든다..


머리카락이 길면 길수록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단발일 때는 머리 말리고 나서 한 번 쓱쓱 밀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이건 나의 기준이긴 하다. 나는 청소에 아주 관대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지만 긴 머리로 진입한 이후로는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마치 산천어대축제에 일부러 풀어놓은 물고기 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산천어들이 다 잡히지 않듯, 내 머리카락도 다 모았다고 생각해도 다 모이지 않고 여기저기 꿈틀대고 있었다.


집이 크지 않기 때문에 손이나 정전기포 정도로 청소가 가능하지만, 가끔은 집 한구석에 잘 누워있는 오래된 유선 청소기를 꺼내어 마음먹고 청소기를 돌린다. 러그가 빨려 올라올 정도로 강한 흡착력을 자랑하는 청소기로 집 안 구석구석 싹싹 청소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정리를 하고 돌아서면 어디선가 또 나온 머리카락이 나를 반긴다. 그것도 구석도 아니고 러그 한중간에서 나를 놀리듯이.


화장실 수챗구멍 상황은 더 암담하다. 매일 오래된 칫솔로 빙빙 돌려 꺼내지만 할 때마다 많은 양의 머리카락이 물에 젖은 미역처럼 줄줄이 딸려 나온다.


이쯤이면 정말 나도 탈모인 대열에 합류해야 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앞선다. 


독립 전에도 머리 감은 직후나, 한번 풀었다 묶은 후에 내 주변에 머리카락은 언제나 떨어져 있었다. 그땐, 머리가 빠지는 것에 대한 걱정만 했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고, 의식해본 적도 없었다. 내 주변만 대충 훌훌 훑고 나면 그걸로 끝이었고, 그때 이후로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사실 그들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 근처 어딘가에 모여 있을 뿐이었다. 단지 이전에는 내가 청소하지 않아서 몰랐을 뿐이었다. 


정전기포로도 전부 훔쳐지지도 않고 청소기에서 빨려 들어가지 않을 거면 애당초 빠지지도 말지, 모근엔 잘 붙어 있지 않으면서 왜 그렇게 바닥엔 잘 붙어서 성질을 건드는지 머리카락 녀석의 마음은 당최 알 수가 없다.


혼자 산 지 몇 개월을 지나며 바닥에 머리카락을 제로로 만드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 삭발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은 후, 나는 나의 뒤를 따라다니며 머리카락을 모아 버리는 행위를 포기했다. 그리고 조명을 샀다. 머리카락과 조명이 무슨 관계냐고 생각할진 모르지만, 형광등을 켜면 집에 너무 밝고, 밝으면 머리카락과 먼지가 잘 보인다. 치우지도 않으면서 스트레스만 받는 꼴이다. 


그래서 그냥 따뜻한 조명으로 집을 꾸미고 하여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하는 방법으로 결정한 것이다. 안경을 쓰고 뭐든 선명하게 봐야 직성에 풀리지만, 어차피 어디에 뭐가 다 있는지 아는 작은 공간. 안경도 쓰지 않기로 했다. 내 머리카락을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최종 타협안이었다.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청소에 크게 관심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잔소리는 하지만, 본인이 더 빠르게 움직이는 부모님들의 성향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누구라고 특정한 적은 없지만 내가 바닥에 벗어 놓은 옷을 개어 올려놓거나, 물 마시고 식탁 위에 올려둔 컵을 치우는 어떤 존재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 당연한 걸 새삼스럽게 깨달은 건 혼자 살고 난 이후였다. 내가 출근 준비를 하며 아무렇게 벗어놓은 잠옷은 퇴근 후에 여전히 아무렇게 던져져 있고, 어제 마시다만 커피는 오늘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것을. 그걸 치우는 건 요정도, 어떠한 존재도 아니라 나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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