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같아선 눕고싶다
예전에 판교와 광화문의 직장인 패션은 어떻게 다를까? 라는 글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걸 서울 지하철에 응용하면 높은 확률로 앉을 자리를 획득할 수 있다.
다른 호선을 탈 땐 보통 내리는 곳이 한정적이라 남들 많이 내리는 곳에서 나도 내렸다. 서울 지하철 3호선 양재같은 역. 그럴때면 앉아가는 건 운에 맡겼었지만, 이직을 하면서 정말 장거리를 타게 되었다. 경기도 사람이 들으면 코웃음을 치겠지만 20개가 넘는 역을 움직인다는 것은, 그것도 못 앉아간다는 것은 정말 상상초월로 힘든 일이었다. 파김치가 되어 퇴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출근길에 파김치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나름 지하철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패턴을 파악하며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그 결과 나는 거의 모든 출근을 앉아서 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성수역을 얘기하자면 출근길에 요즘 유행하는 단정한 느낌의 분들이 많이 내린다. 내가 패션을 모르는거겠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꾸민 분들은 대부분 저녁에 많고, 출근 시간에는 비지니스캐주얼 보단 '캐주얼 비지니스'에 가까운 옷들이 성수역에 많은 편이다.
그리고 빠르면 한양대, 늦어도 뚝섬부터 휴대폰을 대충 휙휙 보는게 아니라 뭔가 문자는 아니지만 터치가 많은 제스쳐가 일어난다. 그리고 잠시 움직임이 멈춘다. 페이스 아이디로 결제하셨다. 성수는 역에서 가까운 스타벅스가 하나라 조금만 늦게 시켜도 많이 기다리기 때문에 다들 미리미리 커피를 시킨다. 스마트 오더가 가능한 저가 커피도 다들 미리미리 시키는 편이다. 출근 시간 저가 카페를 가면 마라톤 급수대처럼 커피가 쫙 늘어서있고, 아직 커피를 받지 못한 사람도 많다.
을지로 ~ 시청에선 남자분들을 잘 공략해야한다. 정장이나 셔츠는 변수가 많다. 피케셔츠를 입은 아저씨를 찾아야한다. 거의 90% 확률로 을지로 입구 와 시청역 사이에 내린다. 피케셔츠에 편한 단화(캐주얼화?)를 신으신 분은 정말 높은 확률로 시청에서 내리신다.
우르르 내리는 역이 생기기 때문에 나름 지하철이 한적한 구간이 생긴다. 반시계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아현역. 아현역에서 못 앉으면 홍대나 합정을 노려야하고, 합정에서 못 앉으면 구디까지 쭉 서서 간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아현에서 못 앉은 날은 힘이 쭉 빠지고 홍대에서도 실패하면 그 때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를 겉잡을 수가 없다. 한심한 박소경!!! 오늘 하루 시작부터 그지같네, 집에 가고싶어!!라고 속으로 백만 번 외치고
이 분노를 분출하기 위해 노래를 바꾼다. 젝스키스의 로드파이터와 방탄소년단의 불타오르네를 들으며 마음속으로만 분노를 터트린다.
딴 말인데, 출퇴근에 신도림이 끼면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차라리 타고 내리면 덜 힘든듯 하다. 이 거대한 흐름에 나를 맡기면 되니까. 오히려 내리지 않는게 더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진짜 빡센역은 문래역같은 곳이다. 흐름 없이 내리는 사람도 적고 타는 사람도 다른 역에 비해 적다. 이런 곳은 정말 비집고 타고 비집고 내려야한다.
조금 내려와보자. 대림, 그리고 구디. 정말 편한 차림에 딱딱한 백팩, 여름이라면 반바지에 슬리퍼. 50% 확률로 대림역이다. 왜 50%확률이냐면, 나머지 50%는 구디에서 내리기 때문이다. 성수에서 이 장거리 레이스를 함께 하신 분이라면 그 분도 구디에서 내릴것이라고 생각한다. 구디를 넘어가면 잠실~ 강남을 통해 가는 편이 더 나은 듯하다.
그리고 또 환승이 쉬운 칸에 사람이 많기 때문에 나는 주로 맨 끝 또는 맨 앞 칸에 탔다. 앉아가진 못하더라도 나름 한적한 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구디에서 내리는 게 더 가깝지만 대림에서 내린다. 대림역에서 회사 가는 길엔 로또를 파는 곳이 있기때문이다. 나는 반드시 다음주엔 이 지하철을 타지 않으리라. 내 한 몸 출퇴근 포기하고 님들의 쾌적한 출근길을 만드는데 일조하고야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