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태어난 문장들

by 설안


산책을 떠나는 마음은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칠 때 느껴지는 마음과 닮아 있다.


책의 목차와 뒷면의 소개를 읽으며

어떤 이야기일지 마음껏 상상해 보고

서문으로 책의 문을 여는 그때의 설렘처럼,

새로운 길 앞에 서면 어떤 풍경과 장면을 만나게 될지 기대하는 그 마음은 삶에 또 하나의 창을 내어 다시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한다.


제주에 머물던 1년 동안 참 많은 길을 걸었다.


쉬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휴무 전날이면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돌아와

산책길에서 먹을 간단한 주먹밥과 간식, 물,

그리고 작은 노트와 펜을 가방에 챙겨두고

괜히 들뜬 마음으로 일찍 잠자리에 들곤 했다.


이른 아침, 제주의 얼굴을 만나고 싶어서.


다음 날 이른 새벽 눈을 뜨면 미리 챙겨둔

가방을 메고 신발끈을 단단히 묶어

가장 첫 버스를 타러 나섰다.


서귀포에 머물던 시간에는 올레길을 만나기 위해

버스로 1, 2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날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시간조차

이미 길 위에 올라선 것처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

첫 발자국을 남기는 마음처럼,

올레길의 첫 얼굴을 마주하고 싶어서

이른 시간 길을 나서던 순간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그 시간마저 벅차게 설레어, 사람은 너무 설렐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떨린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렇게 먼 길을 지나

비로소 길의 시작점에 도착하면

걷기 전, 늘 한 가지 다짐을 되뇌었다.


길에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때는 지금 비워내야 할 때라는 것을, 많은 물음이 찾아올 때는 지금 찾아야 할 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고.


삶의 행복과 불행을 미리 가늠하려 하지 말고,

다가오는 마음들을 지레 짐작하지 않은 채

그저 삶이 들려주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고. 그렇게 길 위의 모든 것들과 같이

숨 쉬듯 호흡하며 걷는 일만이 그 시간 해야 할 전부였다.


그렇게 길 위에 머물던 어느 날,

유난히 또렷하게 남아 있는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눈이 소복이 쌓인 귤나무밭을 지나는데

햇살이 내려앉은 자리에 유난히 작은 귤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니

겨울 햇살을 머금은 그 둥근 귤이 반들반들 빛나는데, 눈빛으로 말을 건네는 누군가의

따뜻한 얼굴이 떠올라 괜히 한 번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던 날이었다.


크고 작음과 상관없이 빛을 머금은 존재들을 바라보며 이런 빛이 우리의 얼굴과 몸에서

흐르는 온기이기를, 그렇게 함께 익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처럼 빛이 내려앉은 자리에

잠시 멈춰 조용히 눈을 맞추는 그 순간,

마치 오래전부터 그 말을 건네기 위해

기다려왔다는 듯 그 순간, 무언가가 태어난다.


오래전부터 마음 깊은 곳에 심어져 있던 말의 씨앗이 비로소 마음 위로 떠올라, 빛과 바람을 머금고 하나의 문장으로 피어나 우리의 안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이처럼 길을 걸으며 찾아온 물음들은 입고 있던 마음의 허물을 벗기고, 생기를 잃었던 마음과 몸에 새로운 바람과 빛을 입혀 다시 태어나게 한다.


그래서 자연이 건네준 마음들을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길 위에서 떠오른 문장들 적는다.


그 문장들이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서 자라나

자신만의 숲으로 길을 내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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