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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브티 Nov 06. 2023

사거리 신호등

살다 보면...


   집 앞은 사거리이다. 아파트 앞쪽으로 초등학교, 고등학교가 있고  뒤로는 중학교가 있다. 대학 빼고 다 있다 보니 등하교시간에는 시끌벅적하다. 아파트를 허물기 전에는 높게 자란 은행나무 때문에 풍경이 잘 보이지 않고 소음 차폐도 되었는데, 새로 아파트를 짓고 입주하니 은행나무는 잘리고 전망은 좋아졌으나 대신 소음차폐가 되지 않는 단점이 있다.


  사거리에는 학생들만 다니는 것이 아니다. 이른 아침은 길 건너 짓고 있는 아파트 건축 현장의 근로자들이 배낭을 메고 삶의 현장으로 걸어간다. 더 이른 시간은 청소부 아저씨가 다니며 간간이 버려진 쓰레기를 치운다. 겨울 오전 6시나 7시는 어둑한데도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학생들, 직장인들, 그리고 중년들까지 사거리에 초록불이 켜지면 각각 제 속한 곳으로 바삐 건너고 한창 바쁜 시간이 지나면 사거리는 차도 사람도 한숨 돌리듯 한산해진다.


  6층에서 내려다보는 사거리의 모습과 내가 사거리에 서서 바라보는 풍경은 확연히 다르다. 내가 선 사거리에서 보이는 것은 건너야 할 내 앞의 신호등만 볼뿐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바라보는 사거리의 모습은 다양하다. 초등학생, 중고등학생 그리고 직장인, 나와 같은 중년들 그리고 더 나이 든 노인들이 각자의 시간에 맞춰 오간다. 이쪽 횡단보도 등이 꺼지면 저쪽 횡단보도의 초록불이 켜진다. 신호등이 꺼지고 켜지는 순서까지 다 알고 있다. 신호등은 잘  짜인 시나리오 같다.


 인생도 이런 순서와 계획대로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인생은 시간 되면 순서대로 맞춰서 켜지는 신호등이 아니다. 갑자기 초록불로, 그리고 빨간불로, 때로는 갈까? 말까? 고민해야 하는 노란불이 계획 없이 꺼지고 켜지는 것이 인생이다. 아무 걱정 없이 조잘거리며 다녔던 초. 중학교 시절과 입시에 고민하던 고등학교 시절. 대학 후 진로, 그리고 아침잠을 이겨내며 다녔던 회사시절이 있었다.


  가정을 이루고 세월이 많이 지났다. 고장 난 신호등처럼 실수도 많았고, 후회도 많다. 초록불을 기다리지 못해 무단 횡단하는 사람처럼 잠시를 참지 못해 화를 낸 적도 많았고, 누구나 그렇듯 노란 불 앞에서 진로와 결혼, 이사, 자식 문제 등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도 있었다. 남은 인생도 여전히 고장 난 신호들처럼 들쑥날쑥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살아온 것처럼 정직과 평범한 계획들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남은 삶이다. 오전의 분주한 시간이 지나면 한가해지는 사거리처럼 내 삶도 이런 시간을 맞이할 것이다.


  오늘은 비가 온다. 하교시간이 되자 초등학교 앞은 우산을 쓰고 아이들을 데리러 온 엄마들로 북적인다. 우산을 쓴 사람은 우산 안만 보지만 6층에서 내려다보는 나는 검은색, 노란색, 초록색 등 알록달록한 우산들을 보게 된다. 각자 우산의 색만큼 다른 삶을 가지고 살아간다. 사거리는 우리의 삶만큼 복잡하지만 거실 창으로 내려다보면  방관자적인 여유로운 마음이 생긴다. 우리 인생도 멀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방관자의 태도가 가끔 필요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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