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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브티 Nov 27. 2023

호랑이 선생님

살다 보면...


  중학교 3학년 1학기가 시작되자  담임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신다. 대답을 하니  "아버님  성함이 안 00 이 시니?"라고 물으신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담임 선생님은 "내가 너 아버지 제자다! "

60  명 가까이 반 친구들이 모두 나를 쳐다본다. 한참 부끄러움이  많은 때  나는 으쓱하기보다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다정하신 분이 아니어서 학교 때 담임과 안 좋은  관계였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담임은 아버지에게  벌  받은 얘기를 하신다. 친구들은 킥킥거리고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었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주번이 되어 교무실에 가니 담임은 다른 선생님들에게

" 얘가 안 00  선생님 딸이에요"

그러자 선생님들은 한 두 마디씩 하신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부산의  명문 남자고등학교  k고등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치셨다. 안 그래도 깐깐하고 대쪽 같은 성격이 윤리라는 과목으로 학생들을 어떻게 대하였을지 짐작이 간다

그때 우리 학교는  k고등학교 출신 선생님들이 많다 보니  제자들  몇 분이 우리 학교 선생님이신 것이다. 그때부터  나의  도피생활(?)이 시작되었다. 복도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다니고,  사회과목 담당인 담임선생님 시간은 괜히 싫었고, 특히 국어 선생님은 노골적으로 나를 놀려대었다. 교무실도 되도록이면 피했다. 관심을 가져 주시는 그 조차도 부담이었다. 다행히 중3학년 5월쯤 나는 서울로 전학을 왔고.  아버지의 제자 선생님들을 안 볼 수 있다는 것에 아버지 아닌 또 다른 속박에서 풀려난 것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제자 선생님들 때문에  부끄러운 일만 있었던 게 아니다. 살다 보니   덕을 보는 일도 있었다. 서울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집을 사게 되었다. 집수리를 아파트상가에 있는 인테리어가게에 맡겼다. 일군들이 와서 일할 때 이것저것 얘기하다 보니 고향  사람들이다. 엄밀히 하면 내 고향보다 아버지와 오빠들의 고향이다.  게다가 일군들이 아버지를 알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지나가는 말로 '친정아버지가 우리 단지 사시는데  고향에 있는 교장선생님으로  퇴임했다' 고 하니 본인들의 고등학교 때였단다. 그 뒤로 나는 아버지 덕을 톡톡이 보았다. 고장 난 게 있어 연락하면  다른 집은  한참 기다려야 된다는데 우리 집과 아버지 집은 즉각 와서 고쳐준다. 아버지는 그때 연세가 80이라 제자를 기억 못 하지만 인테리어가게는 교장 선생님집이라며 vip로 올려놓았다. 신세 지는 일은  하지 않으시는 분인데 인테리어가게에 아버지를 들먹인 것을 알면 한소리 하실 뻔해서 돌아가실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신 지  15년이 되었다.

엄격한 아버지이며 호랑이 선생님이었지만 확실한 것은 타고난  교육자셨고, 자신에게도  없이  엄격하셨기에  훗날 나의 정신적 기둥이셨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도  훗날 내 자식에게 이런 정신적 기둥으로 남아 있을지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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