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통의 장 콕토 박물관
이튿날 니스의 마지막 아침이다. 오후에 제네바행 비행기를 타기에 앞서 한 곳 더 들를 곳이 있다. 모나코에서 조금 더 이탈리아 쪽으로 가면 망통이라는 마을이 있다. 나는 화투를 칠 줄 모르지만 망통이 섰다에서 가장 족보가 낮은 패라는 것은 알고 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지명인 망통(Menton, マントン)을 일본말로도 그렇게 쓴다. 물론 뜻이야 무관하지만 한국이나 일본에서 화투 좀 쳐본 사람은 그 이름을 들으면 전부 한 번씩 웃을 것이다.
니스에서 모나코를 거쳐 망통까지 불과 40분 걸리는 해안 철길이 그림 같다. 가장 처음 빌프랑슈 쉬르 메르(Villefranche sur mer)가 나온다. 이곳에서 떠오르는 것은 코트다쥐르에서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세 여인이다. 먼저 그레이스 켈리가 그랬다. 1982년 딸 스테파니 공녀를 태우고 해안도로를 달리던 모나코 대공비는 갑작스러운 발작으로 사고를 내 사망하고 만다. 자신을 모나코의 공비가 되게 한 히치콕의 영화 <나는 결백하다To Catch a Thief>를 촬영했던 그곳이었다.
켈리에 앞서 1927년 ‘현대 무용의 어머니’라 불렸던 이사도라 덩컨이 니스 인근에서 무개차를 타고 가다가 스카프가 뒷바퀴에 끼여 즉사했다. 역시 명배우 버네사 레드그레이브가 타이틀롤을 맡은 영화에서 마지막 사고 장면은 너무도 섬뜩하다.
또 하나의 자동차 사고는 픽션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어서 와, 슬픔아Bonjour Tristesse》에서 새침한 숙녀 앤이 홧김에 차를 몰고 나갔다가 봉변을 당하는 것이다. 같은 제목의 영화에서 데버러 커가 이 역할을 맡았다.
데버러 커는 또 다른 고전영화 <잊지 못할 사랑An Affair To Remember>에서도 바로 이곳 코트다쥐르에 온다. 지중해 크루즈에서 만난 바람둥이 니키가 빌프랑슈 쉬르 메르에 할머니가 산다며 동행을 권한다. 모두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다.
망통은 초봄의 레몬 축제로 유명하다. 십자군 원정과 대항해 시대 때 괴혈병으로 고생하던 선원들이 비타민 C가 많이 든 레몬을 먹고 병세가 호전되는 것을 안 뒤로, 출항 전 배 한가득 레몬과 오렌지를 싣고 떠나게 되었다. 그 뒤로 지중해 연안은 노란 과일의 천국이 되었다.
레몬 축제 기간 망통은 온통 레몬과 오렌지로 만든 조형물로 장식된다. 앞서 말한 대로, 레몬 산지인 망통이 모나코로부터 떨어져 나와 프랑스에 속하게 되면서 모나코가 농업 기반 국가에서 문화 관광에 집중하는 나라로 탈바꿈한 것이다. 해외 토픽에서 온 도시가 노란색 물결로 덮인 곳을 보았다면 이곳일 가능성이 크다. 나도 축제 무렵이었다면 괴테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노래한 ‘레몬 꽃 피는 나라를 아시나요’를 떠올렸을 터이나, 오늘 망통에 온 목적은 레몬이 아니다.
장 콕토 박물관은 태양이 내리쬐는 망통 해변에 자리한다. 만년의 콕토는 자신과 이브 생 로랑의 후원자였던 프란신 바이스바일러의 별장이 있는 코트다쥐르에 머물렀다. 그는 가까운 망통의 음악제를 찾았다가 이 도시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시장은 그를 명예시민으로 예우했고, 모나코 대공의 옛 성채인 바스티옹을 소개했다. 콕토는 여기에 벽화와 도자기 따위로 꾸몄다. 콕토 사후 바스티옹은 박물관으로 개장한다.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했고 벨기에 태생으로 캘리포니아에서 사업을 했던 세브랭 분더만이라는 유대인은 콕토의 영화 <무서운 아이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십 대 때부터 모은 장 콕토 관련 유물을 망통에 기증했다. 1800점의 전시물을 소장한 망통의 콕토 박물관이 2011년 문을 연 내력이다.
사실 장 콕토와 코코 샤넬은 나치에 적극 항거하지 않았다는 혐의로 전후에 비판을 받는다. 항거는커녕 이들은 친나치 행각을 벌였다. 그나마 콕토는 특별히 정치적인 의도가 없는 순수한 예술 행위로 간주되어 복권되었지만, 나치 장교와 연인 관계였던 샤넬은 전후 스위스로 망명했다가 겨우 프랑스에 돌아와 파리 리츠 호텔에서 은둔하다시피 살다 세상을 떠났다. 죽은 뒤에도 프랑스가 아닌 스위스 로잔에 묻혔다. 심지어 근래에는 그녀가 나치의 스파이로, 실제 알려진 것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여성의 상징이자 선망받는 럭셔리 브랜드의 창시자로 사랑받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콕토가 그린 샤넬의 초상에 얼굴이 비어 있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몇 개의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스스로의 과오도 감당이 안 되는 마당에 지나간 역사의 오명까지 비판할 입장은 못된다. 나이가 들수록 나 자신이나 사랑하는 가족의 안녕과 바꿀 만큼 이데올로기나 신념이 그리 대단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콕토의 절친한 친구이자 샤넬과 한때 연인 관계였던 스트라빈스키의 됨됨이까지 평가할 수 없다. 그는 양차 대전을 운 좋게 스위스와 미국에서 피할 수 있었지만, 만일 프랑스에 남았더라면 콕토나 샤넬처럼 되지 않았으리라는 법이 없다.
여하튼 콕토의 박물관도 프랑스에서 가장 외진 이탈리아 국경 옆에 겨우 자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유대인 컬렉터의 소장품으로 세워진 것이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친나치 행각에 면죄부를 준다. 시골 도시답지 않게 현대적인 건물에는 콕토가 관여한 연극과 영화, 발레 따위 종합예술에 관련된 자료가 빽빽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1층의 주인공이 눈부신 아르 누보 여신 사라 베르나르라면, 지하층을 다스리는 사람은 콕토의 분신과도 같은 배우 장 마레(Jean Marais, 1913-98)였다. 영화 <미녀와 야수>와 <오르페>가 바로 마레가 주연한 대표작이었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와 콕토의 우정을 보여주는 작품은 역시 오페라 오라토리오 <오이디푸스 왕>이다. 1927년 5월 30일 이 곡이 초연된 곳이 파리의 사라 베르나르 극장이었다. 지금은 샤틀레 광장에 시립 극장(Théâtre de la Ville)이라는 이름으로 관객을 맞는다.
스트라빈스키가 45세 때 쓴 <오이디푸스 왕>은 사실 그의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독창적이고 그 다운 음악이다. 스트라빈스키는 프란체스코 성인이 기도를 할 때는 일상어가 아니라 프랑스 말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도 진지한 주제를 다루기 위해 구어가 아닌 다른 말을 쓰기로 했다. 바로 라틴어이다.
스트라빈스키는 친구 콕토가 프랑스 말로 써준 <오이디푸스 왕>의 대본을 그가 소개한 신학생 장 다니엘루에게 맡겨 라틴어로 번역했다.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하바드 대학 강연에서 풀어 보인 대로 <오이디푸스 왕>은 헨델과 글루크, 베토벤과 베르디 같은 선배들의 음악을 비틀고 차용한 신고전주의 음악의 보고이다. 그러나 그런 내력을 전혀 모르고 만나도 흥미진진하다.
수년 전 명 소프라노 제시 노먼이 내한했을 때 국내 마케팅을 위해서 그녀가 출연한 유일한 DVD 타이틀이었던 <오이디푸스 왕>이 한글 자막으로 출시되었다. 음반사로는 고육지책이자 모험이었을지 모르지만, 사실 이 공연의 내용은 실로 스펙터클 해서 스트라빈스키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 보아도 눈길을 끌 만하다.
미국 여성 감독 줄리 테이머(Julie Taymor)는 멕시코의 실존 여성화가를 그린 <프리다>, 비틀스의 음악을 가지고 만든 뮤지컬 수작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셰익스피어의 비주얼을 극대화한 <티투스>와 <템페스트> 등으로 화제를 모았다. 엘턴 존이 음악을 맡은 뮤지컬 <라이언 킹>과 보노가 록 음악을 입힌 스파이더맨 뮤지컬 <턴 오프 더 다크>는 21세기 브로드웨이의 새로운 화제작이다. 모두 테이머의 작품이다.
그녀는 무대 예술에 대한 자신의 장기를 총동원해 <오이디푸스 왕>을 일본 전통극 가부키 양식으로 만들었다. 스트라빈스키가 이 곡을 오페라화하지 말고 성악가들에게 가면을 씌워 오라토리오쯤으로 공연하라고 했던 말을 무색하게 한다. 당장 우리 창극이나 판소리로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나는 2002년 TV에서 보았던 이런 양식 교류의 모범 하나를 똑똑히 기억한다. 아시아 유럽 정상의 모임인 아셈 회의를 기념해 베세토 연극제가 마련한 무대에서 우리 <춘향전>을 세 도막으로 나눠 한중일 삼국의 전통극으로 보여준 것이다.
먼저 이몽룡이 성춘향을 보고 첫눈에 반하는 광한루 그네 타는 장면은 화려한 멋이 일품인 중국의 월극(越劇)이다. 베이징의 경극(京劇)이 남성만의 공연이라면 남방의 월극은 여성 출연진으로만 구성된다. 월매가 거지꼴로 찾아온 사위 이몽룡(실은 어사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을 수청 거부로 옥고를 치르는 딸 춘향에게 데려가는 장면에서는 일본 가부키(歌舞伎)가 눈물을 자아낸다. 여기서는 월극과 반대로 여장남자 배우가 춘향을 연기한다. 마지막으로 탐관오리 변학도의 생일잔치에 들이닥치는 어사출두 장면은 우리 창극(唱劇)이 후련한 대단원을 장식했다. 스트라빈스키와 콕토가 보았더라도 무릎을 쳤을 이 걸작 무대는 손진책이 총 감독했다. 동북아 삼국의 문화가 이보다 더욱 뜻깊게 조우했던 적이 있던가? 매년 가다듬으면 좋은 고전이 될 터인데 아쉽다.
테이머 감독이 작곡가의 뜻을 어기고 이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일본풍 오페라로 그렸지만 스트라빈스키가 보아도 크게 언짢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공연될 때마다 화제를 몰고 온다. 존 엘리엇 가드너는 런던 심포니, 베를린 필하모닉과 각각 이 곡을 연주했는데, 매번 변사가 바뀌었다. 런던에서는 영화 <칼라스 포에버>의 타이틀롤을 맡았던 파니 아르당이 등장했다. 베를린에서는 스위스 명배우 브루노 간츠의 음성이 폐부를 찌른다. 특히 베를린 공연에서 라디오 합창단은 얼굴에 회분을 바르고 등장해 마스크를 쓴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고음악 전문가였던 가드너에게 스트라빈스키가 뜻밖의 외도일까? 그는 스물한 살 때 처음 <오이디푸스 왕>의 악보를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것을 연주하기까지 50년이 걸린 셈이다.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극장의 공연에는 역시 프랑스 인기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이미 <병사 이야기>의 내레이션으로 화제를 모은 적 있는 드파르디외가 다시 한번 장 콕토의 역할에 도전한 것이다.
라틴어로 부르는 <오이디푸스 왕> 가운데 귓전을 반복해 때리는 두 단어가 있다. ‘트리비움Trivium’과 ‘오라쿨라Oracula’이다. 트리비움은 ‘삼거리’라는 뜻이다. 오이디푸스가 길에서 만난 노인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가 아버지인 줄 모르고 때려죽였던 기억을 긴박하게 회고하는 것이다. 사건이 비극으로 치달아 왕비가 모두 ‘오라클’, 곧 신탁대로 한 일이라고 주문처럼 외운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그 오라클 맞는다.
트리비움이라는 라틴어를 현대 구어로는 ‘십자로’(Kreuzweg, Crossway)라고 옮긴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러면 삼거리가 아니라 네거리가 아니냐고? 엄밀하게 말해 교차로라는 뜻이니, 오히려 그것을 십자로라고 옮긴 것이 오류이다. 이런 언어 간 뉘앙스 차이를 떠나 오이디푸스가 ‘트리비움’을 외칠 때마다 ‘십자로’라는 자막을 보는 현대인은 자연히 그리스도의 수난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가장 최근에 관심을 끈 <오이디푸스 왕>은 2016-17 시즌 에사 페카 살로넨이 지휘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피터 셀라스의 연출로 무대에 올린 공연이다.
프랑스 엑상 프로방스 축제에서 공연된 이 <오이디푸스 왕>은 스트라빈스키와 콕토를 넘어선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다른 공연에서 변사는 사건을 라틴어가 아닌 관객의 언어로 들려주는 정적인 역할이다. 연출자 셀라스는 그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했다. 원작에는 없는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를 등장시켜 해설을 맡긴 것이다. 안티고네 역의 프랑스 배우 폴린 슈비에는 채 서른이 안 되었다. 그러나 국립 예술원에서 메테를링크, 아르토, 카뮈와 같은 현대 연극 거장의 작품들을 익혔고, 직접 노래도 부르며 뛰어난 승마 실력을 갖춘 재원이다. 앞으로 그녀가 사라 베르나르나 쥘리에트 비노슈와 같은 세계적인 프랑스 배우로 성장할지 지켜보아야겠다.
1927년 스트라빈스키에게 대본을 준 장 콕토는 5년 뒤인 1932년에 《지옥의 기계La Machine infernale》라는 희곡을 발표했다. 전 네 막의 제목은 ‘유령’,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의 만남’, ‘신혼 초야’, ‘오이디푸스 왕(17년 뒤)’이다. ‘유령’은 셰익스피어 《햄릿》의 첫 장면을 끌어온 것이다. 보초를 서던 병사들이 억울하게 죽은 선왕의 망령을 만나는 곳이 북해를 바라보는 덴마크의 크론보르가 아니라 지중해 연안 그리스의 테베라니, 무릎을 치게 만드는 설정이다. 이 부분에는 차이콥스키의 잘 알려지지 않은 환상서곡 <햄릿>을 쓰고 싶다. 바로 비아리츠 발랑댕 발레단이 <미녀와 야수>에 썼던 곡이다.
선왕의 유령이 테베에게 경고하는 것과 같은 시간에, 아비를 죽인 아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를 만나 그 유명한 수수께끼를 푼다는 것이 2막의 내용이다. 나일 살인 사건을 밝히는 에르퀼 포아로를 떠올리는 것은 어떠한가?
《지옥의 기계》 3막에서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와 결혼한다. 스트라빈스키의 <결혼>이라도 연주해야 할까? <결혼>에는 없는 신혼 초야 장면이니 베르디 오텔로의 1막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오텔로와 데스데모나가 부르는 야상곡에 샤갈이 무대 배경을 그린다면 푸른색이 아니라 핏빛으로 바꿔야 하리라.
마지막 4막이 바로 우리가 아는 스트라빈스키의 오페라 <오이디푸스 왕>이다. 그보다 강렬한 음악을 쓰긴 어려울 것이다.
나는 콕토가 스트라빈스키와 함께 할리우드에 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괜히 프랑스에 남았다가 나치에 협력하는 바람에, 더 좋은 환경에서 더 큰 시장을 위해 천재적인 영화를 만들 기회를 놓친 것이다. 만일 그랬더라면 콕토가 만든 오르페우스 3부작 <시인의 피>, <오르페우스>, <오르페우스의 유언>에 버금가는 ‘오이디푸스 4부작’이 나오지 않았을까? 스트라빈스키가 디즈니나 채플린과 뜻이 안 맞아 실망하는 일도 없었을 터이다.
1927년 <오이디푸스 왕>이 초연되기 직전 25세의 미국 청년 찰스 린드버그가 비행으로 대서양 양안을 연결했다. 그해 여름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은 격화되었고, 이사도라 덩컨이 비운에 세상을 떴다. 10월에는 첫 유성영화 <재즈싱어>가 개봉했다. 그러나 앞으로도 찰리 채플린은 한동안 계속해서 무성의 길을 갈 것이다. <위대한 독재자>로 돌아오기까지.
어느덧 망통, 그리고 코트다쥐르, 아니 프랑스를 떠나야 할 시간이다. 다시 올 날이 언제인지 당장은 알 수 없지만 스트라빈스키 또한 늘 그랬다. 요양을 위해 스위스로 갈 때도, 공연을 위해 미국으로 갈 때도 곧 다시 프랑스로 돌아올 줄 알았지만, 전쟁이 앞을 가로막았다. 열전 못잖은 냉전은 그가 러시아 땅을 다시 밟는 데도 반 세기가 걸리게 했다. 1962년 초 워싱턴에서 <오이디푸스 왕>을 세 번 공연하고 녹음에 들어갔다. 그해 9월 마침내 48년 만의 고향 방문이 성사된다. 약 20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소련을 나오자마자 케네디는 기다렸다는 듯이 쿠바를 봉쇄한다.
보름 만에 끝난 쿠바 미사일 위기였지만, 만일 장기화되었다면 스트라빈스키는 고국에서 세상을 떠났을지 모른다. 내가 유럽을 기행 하던 무렵, 한반도도 그 못지않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더욱이 전 세계 어디에서 테러가 일어나도 놀랍지 않을 만큼 광기로 얼룩진 시대이다.
거의 바홈과 같은 최후를 맞을 정도로 달리다시피 망통 역에 돌아왔다. 다행히 제네바행 비행기도 놓치지 않았다. 여행은 스위스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