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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May 13. 2019

오 마이, 채플린을 만나다니...

요정의 입맞춤과 라임라이트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라 스위스(라틴어로 헬베티아이다). 초콜릿과 하이디의 나라. 동화 같은 스위스에서 역사상 많은 위인이 중요한 시기를 보냈다. 그들이 알프스에서 받은 값진 영향과 도움을 살펴보기 위해 2017년 연말연시 열흘 동안의 꿈속으로 돌아간다. 몽트뢰로 가는 길엔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요정의 입맞춤>은 안데르센의 「얼음 처녀」를 아주 축약한 것이다. 

45분가량의 발레는 너무 짧아서 안데르센의 마법과 같은 스토리텔링에 미치지 못한다. 다만 음악만큼은 정말 환상적이다. 나는 1기가 바이트 용량의 MP3 플레이어를 처음 샀을 때 그 안에 소니(옛 CBS)에서 나온 스트라빈스키 자작자연을 옮겨 담았다. 전체는 아니지만 주요 작품은 대부분 들어갔다. 출퇴근 때마다 꺼내 들었는데, 전체 가운데 <요정의 입맞춤>이 최고였다. 바딤 레핀과 보리스 베레좁스키가 연주한 이 곡의 실내악 편곡 <디베르티멘토>는 머리를 쭈뼛 서게 한다.

아우구스틴 하델리히의 연주로 <디베르티멘토> 전곡 감상

후배 N의 도움으로 구한 태러스킨의 《스트라빈스키와 러시아 전통》이 여기서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태러스킨은 동료 학자 로런스 모턴의 연구 결과를 일목요연하게 표로 정리했다.

<요정의 입맞춤>에 인용된 차이콥스키의 음악 열네 곡이다. 바로 스트라빈스키가 인터뷰에서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며 답변을 뭉갰던 오리지널이다.


차이콥스키의 <어린이를 위한 노래집, Op 54> 가운데 ‘폭풍우 속 자장가’를 가지고 만든 <요정의 입맞춤>의 도입부는 듣는 사람을 안데르센의 마법으로 안내한다. 

차이콥스키 가곡 '폭풍 속의 자장가'를 아르카디 볼로도스가 피아노 독주로 편곡했다

같은 가곡집에 나오는 ‘겨울 저녁’도 아이튠즈로 바로 들어본다. 똑같이 베꼈다. 

그러나 적재적소에 잘라 이어 붙인 스트라빈스키의 솜씨는 정교하기 그지없다. 차이콥스키가 <피아노 소품집,  Op 19>의 ‘스케르초 후모레스케’와 ‘야상곡’이, 자신이 여행했던 클라렝스의 풍경을 담게 될 줄 짐작이나 했을까?

지휘자 겐나디 로주데벤스키의 아내 빅토리아 포스트니코바
발렌티나 리시차가 연주하는 차이콥스키의 녹턴

파리에서 ‘무제타의 왈츠’를 불렀던 아이다 가리풀리나의 데카 데뷔 앨범에도 한 곡이 들어 있다. <여섯 개의 로망스, Op 63> 가운데 ‘세레나다’이다.

실황으로

이런 곡들은 아주 여러 번 반복해 들어야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그때의 심정은 지푸라기로 큰 일을 이룬 기분이다. <여섯 개의 피아노 소품,  Op 51>의 2번 ‘작은 폴카’를 다룬 스트라빈스키의 솜씨를 생각해 보면 그가 원본의 출처를 감추고 싶었던 심정을 알 것 같다.

작은 폴카, 11장의 CD에 차이콥스키의 전곡을 수록한 리시차

마지막에 <여섯 개의 로망스, Op 6>의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가 나오면 발레가 곧 끝날 것만 같아서 너무 아쉽다.

고인이 된 드미트리 흐보로스톱스키의 노래

그러나 <요정의 입맞춤>을 발레나 연주로 직접 보기는 매우 어렵다. 내가 아는 영상물은 딱 한 가지였다. 비디오 아티스츠 인터내셔널(VAI)이라는 회사는 잠자던 오래된 영상을 어디서 용케 구해 발매하곤 하는데, 대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만큼 화질과 음질이 열악한 경우가 많다. 다행히 1990년 러시아에서 만든 <요정의 입맞춤>은 보기 힘든 정도는 아니다. 다만 얘기했던 것처럼 발레로 안데르센의 동화와 세간티니의 그림 같은 풍경을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어 아쉬웠다. 

그러던 중 VAI와 경쟁하는 또 하나의 무대가 등장했다. 앨런 길버트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은 2013년에 ‘무용가의 꿈A Dancer’s Dream’이라는 공연을 기획했다. 스트라빈스키의 <요정의 입맞춤>과 <페트루시카>를 전후반에 연주한 것인데, 영상과 발레, 인형극을 종합적으로 엮었다.


그러나 이 또한 연주만으로 <요정의 입맞춤>을 처음 접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줄여줄 뿐이지 안데르센의 줄거리와는 무관한 내용이다. 루디는 나오지 않고 이름 모를 여주인공 홀로 마법의 세계를 경험한다. 스트라빈스키의 많은 발레가 무용가들의 영감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요정의 입맞춤>은 더욱 많이 연주되고 안무되어야 할 작품이다.


브베와 콩코드를 비교하다가 천재의 ‘초월’이라는 이야기가 나왔고 차이콥스키의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를 인용한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러는 사이 바젤에서 출발한 열차는 로잔에 도착했다. 몽트뢰로 가는 지선으로 갈아타, 브베에 가장 먼저 내렸다. 브베에는 2016년에 채플린 월드라는 박물관이 개관했다.

호수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배기에 채플린의 장원이 있다

찰리 채플린은 많은 면에서 스트라빈스키와 비교된다. 나이는 스트라빈스키가 일곱 살 많고, 채플린이 그보다 5년을 더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각각 최악의 흙수저와 부러울 것 없는 금수저이다. 그런데 스트라빈스키가 젊어서 러시아를 떠났다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이 나는 바람에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던 것처럼 런던 태생인 채플린도 미국 순회공연을 갔다가 전쟁이 터져 돌아가지 못하고 미국에 눌러앉았다. 스트라빈스키가 세계대전 이후 계속 서유럽에 머물면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면, 미국에서 영화 산업에 발을 들여놓은 채플린은 더 이상 많은 곳을 떠돌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는 오직 영화 속에서만 ‘떠돌이Tramp’였다. 그는 전후 영국에 갔다가, 전쟁을 피해 달아나 호의호식했다는 비난을 받은 뒤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스트라빈스키가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미국으로 잠시 왔다가 발이 묶여 아예 눌러앉았다면, 채플린은 미국의 참전을 주장하며 소련을 옹호한 것 때문에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혔다. 영화 홍보를 위해 잠시 미국을 떠난 동안 FBI 국장 J. 에드거 후버는 그의 영주권을 박탈했다. 이때부터 채플린은 이곳 스위스 브베에 정착하는 것이다.

브베의 채플린 하우스는 현재 룩셈부르크의 개발회사가 유족의 동의를 얻어 박물관으로 꾸며 일반에 공개했다. 집안 구석구석을 그의 숨결이 깃들인 유물로 장식했다. 친분을 맺었던 동료들의 사진과 캐리커처가 채플린의 휴머니즘을 엿보게 한다.

제일 앞 사진에 파블로 카살스와 클라라 하스킬이 보인다

특히 그가 천재라 극찬했던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의 사진이 여럿 놓여 있다. 하스킬과 단짝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아르튀르 그뤼미오는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하스킬이 자기 바이올린으로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는 것을 보고는 그녀 앞에서 연주했던 것이 부끄러웠다고 회고했다. 천재란 그렇게 드러나지 않는 번뜩임을 가진 존재 아닐까? 잠깐 특별한 능력을 엿보일 때 스스로도, 보는 사람도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

벽에 걸린 바이올린이 평생의 애장품

벽 한쪽에는 채플린이 16세에 구입해 평생 어디를 가나 가지고 다녔던 바이올린이 걸려 있다. 자전적인 영화 <라임라이트>의 사운드트랙이 바로 들려온다. 그가 직접 쓴 멜로디이다. 

이것은 걸작

찰리 채플린은 평생 네 차례 결혼했는데, 이곳 브베에 왔을 때 그의 곁에 있던 사람은 마지막 아내 우나 오닐이다. <밤으로의 긴 여로>를 쓴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이었는데, 유진 오닐과 찰리의 나이 차는 겨우 한 살이었다. 어린 딸이 자기 또래 노인과 결혼하면서 부녀는 의절하고 만다. 찰리와 우나의 첫 딸이 바로 <닥터 지바고>와 <사랑의 슬픔의 볼레로>에 나왔던 제럴딘이다.

<라임라이트>로 데뷔
혼자서 밀랍 박물관을 장식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방을 옮길 때마다 채플린의 밀랍 인형이 불쑥불쑥 등장한다. 정겨운 모습에 사진을 찍으려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채플린 뒤에서 자리를 비키지 않고 계속 서 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눈치를 주려고 쳐다보았더니 웃는다. 채플린의 넷째 아내 우나의 밀랍인형이다. 나 스스로 그의 영화 속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아주머니 잠시 사진 좀 찍을게요

박물관 앞 정원은 채플린이 늘 산책하던 곳이었다. 테니스를 치고 아이들이 풀에서 노는 것을 보고 바비큐를 굽던 잔디밭. 눈이 많이 온 날은 아이들에게 하얀 카펫이 망가지지 않도록 뛰어다니지 말라고 했다는 뜰이다. 아름드리 고목은 수백 살은 족히 되어 보였고, 그 가운데는 겨우살이의 숙주가 된 녀석도 있었다. ‘황금가지’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겨울 생명의 원천이자 베르길리우스를 저승으로 인도했던 열쇠인 영물이다.

<반지의 제왕>에 나와야 할 듯
진주 같은 겨우살이 열매

나는 평소 신뢰하는 박물관 레스토랑에 갔다. 정오도 되지 않았는데 만석이다. 허세 가득한 매니저 말로는 1년 전에 예약해야 한다나? 덕분에 나는 다닥다닥한 실내가 아니라 호수와 알프스를 바라보는 더 근사한 야외에서 맥주와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었다. 1월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따뜻하고 화창한 날씨이다. 꼭 다시 오기를 꿈꾸며 발걸음을 뗀다. 브베 역으로 돌아와 다음 기차 시간까지 호숫가를 산책했다. 장엄함에 말문이 막힌다.

샌드위치가 목에 메인다. 논 밧 다 론니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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