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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May 17. 2019

샤넬과 스트라빈스키 그리고 프레디

스위스 몽트뢰 호숫가에서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라 스위스(라틴어로 헬베티아이다). 초콜릿과 하이디의 나라. 동화 같은 스위스에서 역사상 많은 위인이 중요한 시기를 보냈다. 그들이 알프스에서 받은 값진 영향과 도움을 살펴보기 위해 2017년 연말연시 열흘 동안의 꿈속으로 돌아간다. <보헤미안 랩소디>까지 돌아볼 줄이야!


브베와 몽트뢰 사이에 있는 클라렝스까지는 기차로 10분쯤 걸리려나? 걸어도 좋을 거리이지만 체력을 좀 아끼기로 했다. 클라렝스는 차이콥스키가 바이올린 협주곡을 쓴 곳이다.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였던 차이콥스키는 제자인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결혼 직후 그녀를 떠나 파트너였던 요시프 코테크와 이곳에 와서 그 유명한 곡을 작곡했다. 바로 저 산과 호수가 그 찬란하게 절규하는 음악에 들어있지 않은가 말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만 있는 게 아니다

그로부터 약 40년 뒤에 어려서부터 차이콥스키를 흠모했던 후배 스트라빈스키가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봄의 제전>을, 또 <풀치넬라>를 작곡한다. 클라렝스 역사 바로 뒤에 또 묘지가 있다.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만년을 몽트뢰  팰리스 호텔에서 살다가 이곳에 묻혔다.


나보코프는 폴란드 태생의 조지프 콘래드와 더불어 외국인이지만 영문학 작가로 인정하는 사람이다. 나보코프는 도스토옙스키를 추리소설 작가라고 평가절하했고 반면에 톨스토이를 높이 평가했다. 이런 비교가 참 좋다. 러시아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성신여대 A교수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같은 러시아 피아니스트라도 톨스토이처럼 선하게 연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스토옙스키처럼 마성이 깃들인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스트라빈스키가 이 두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라빈스키는 푸시킨과 안데르센의 영역에 산다고 할까. 그는 나보코프의 사촌동생인 작곡가 니콜라스 나보코프와 친했고, 할리우드에서 함께 어울렸다.

스트라빈스키가 비너스도 아니고, 파도에서 솟아나심

클라렝스에서 몽트뢰는 지척이다. 호수와 산이 이루는 능선을 잠시 걷자 몽트뢰 뮤직 앤 컨벤션 센터(2M2C: Montreux Music & Convention Centre)가 나온다. 몽트뢰 9월 음악제와 그보다 나중에 시작되었지만 더 유명한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는 곳이다. 2M2C의 음악당과 컨벤션 센터는 각각 스트라빈스키와 마일스 데이비스의 이름을 따서 부른다.

건물 주위를 그들의 동상이 감싸고 있다.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 내가 건져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이 스트라빈스키 동상 사진 아닐까? 2014년 러시아 조각가인 니콜라이 쿠즈네초프와 나탈리아 무롬스카야가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그리 유명한 사람들은 아닌지 자료를 찾기 힘들다. 키릴 알파벳으로 검색하니 이 동상은 러시아의 인민배우 나탈리아 셀레즈뇨바와 모스크바 국제 관계 연구소가 러시아-스위스 수교 200주년을 맞아 몽트뢰에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스트라빈스키에 날개를 달아준 샤넬이라는 설정

지휘하는 스트라빈스키 옆으로 날개 하나 뻗었다. 마치 불새가 비상하는 듯하다. 그러나 동상 뒤로 돌아가 보면 날개가 한쪽이 아니라 둘이며, 그 날개의 주인이 여성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스트라빈스키 뒤에서 묵묵히 그에게 날개가 되어 준 사람을 상징한다. 또 다른 러시아 블로그에 따르면 이 여성은 바로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 모델이라고 한다. 역시 2009년에 개봉한 영화 <코코 샤넬과 이고리 스트라빈스키>가 떠오른다. 덴마크의 스타 배우 마즈 미켈센과 프랑스의 카리스마 넘치는 안나 무굴랄리스가 주연한 영화는 당대를 대표하는 두 예술가의 숨은 관계를 대중에 알린 화제작이었다.

대개 스트라빈스키보다 샤넬 배우의 카리스마에 반했다는 영화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가 직접 제작을 도왔다는 영화는 1921년 ‘샤넬 넘버 5’를 내놓은 여장부와 <봄의 제전>으로 선풍을 몰고 온 작곡가 사이의 은밀한 관계를 보여준다. 스트라빈스키는 작곡가로 독립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했고,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샤넬이 파리 근교의 자기 빌라를 그의 가족을 위해 무상으로 제공했다는 것이다.


영화의 내용을 당시 상황에 맞춰 보자면, 샤넬은 1919년 12월 21일 연인 아서 카펠을 자동차 사고로 잃었다. 그녀는 1920년 3월 파리 근교 가르슈에 빌라를 구입하고 벨 레스피로라 이름 지었다. 칩거 중이던 샤넬을 실의에서 구한 사람은 사교계의 후원자였던 친구 미시아 고뎁스카였다. 그녀는 화가 호세프 마리아 세르트와 1920년 8월 2일 결혼하며, 이때 샤넬을 자신이 후원하던 댜길레프와 스트라빈스키에게 소개한다. 세르트 부부는 이탈리아 신혼여행까지 샤넬을 데리고 갔고, 베네치아에서 샤넬은 댜길레프가 니진스키 안무의 <봄의 제전>을 다시 공연하고 싶지만, 돈이 궁함을 알고 그를 찾아가 후원을 자청한다. 같은 시기 역시 살림이 쪼들리던 스트라빈스키 가족을 벨 레스피로에 기거하게 한다.

벨 레스피로와 벨 레스피로

스티븐 월시가 정리한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밀애는 양쪽의 의견이 약간 다르다. 샤넬의 전기를 쓴 에드몽드 샤를 루와 앙리 지델은 샤넬이 9월 둘째 주에 대서양 연안의 비아리츠로 떠나며 스트라빈스키와 짧은 사랑을 정리했다고 썼다. 두 사랑의 관계도 가정이 있는 스트라빈스키의 일방적인 구애를 그녀가 피한 것으로 묘사했다. 그런 샤넬이 비아리츠로 간 까닭은 젊은 러시아 귀족 드미트리 파블로비치에게 끌렸기 때문이다. 차르 알렉산드르 3세의 조카인 드미트리는 황후를 홀린 요승(妖僧) 라스푸틴을 살해한 일행 중 하나로 이름이 자자했다. 샤넬은 그와 1년 가까이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로버트 크래프트가 스트라빈스키의 둘째 아내 베라에게 들은 사실은 조금 다르다. 샤넬이 비아리츠로 간 때는 1920년 9월이 아니라 이듬해 1월이었고, 그 사이 그녀와 스트라빈스키는 뜨거운 관계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관계는 샤넬의 친구 폴 모랑이 쓴 대담집을 통해 다시 공개되었다. 그러나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인터뷰가 진행된 것은 1946년의 일인데, 책이 나온 것은 1976년의 일이다. 이때는 두 당사자는 물론 인터뷰를 한 저자도 막 사망한 뒤이다. 당사자들 외에 진실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스트라빈스키의 첫 아내 카차였을 것이다. 누가 더 적극적이었거나 적잖은 여성들과 염문이 있던 스트라빈스키가 2년 동안 샤넬의 집에 머물며 아무 일도 없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역시 어색하다. 그러니 영화는 충분히 개연성 있다.

만나자 이별

‘몽트뢰 리비에라’를 따라 이런 동상이 줄을 잇는다. 스트라빈스키 바로 앞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두상이 보인다. 그는 파울 자허의 위촉을 받고 <변용Metamorphosen>을 작곡했다. 베토벤의 <에로이카 교향곡>에 나오는 ‘장송 행진곡’을 바탕으로 스물세 명의 현악 주자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비망록을 쓰는 곡이다. 또 슈트라우스는 1947년 이곳  몽트뢰 팰리스 호텔에서 <네 개의 마지막 노래> 가운데 첫 곡인 ‘저녁 노을에Im Abendrot’를 작곡했다.

<네 개의 마지막 노래> 전곡 '저녁 노을에'

호텔 앞은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의 주인공들을 위한 공간이다. 엘라 피츠제럴드를 비롯해 레이 찰스, 카를로스 산타나, BB 킹과 같은 뮤지션의 흉상이 줄짓는다. 맨 오른쪽에 이 호텔에 살면서 만년을 보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앉아 있다.

"다들 내가 주인인 줄 아는데 뭐하러 돈 주고 사나"
"그 호텔 나한테 파시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몽트뢰를 찾는 관광객과 가장 많은 사진을 찍는 동상은 한 팔을 높이 쳐들고 있는 프레디 머큐리일 것이다.


교실에서 다른 친구들이 모두 퀸과 아바, 또는 특이하게 잉베이 말름스텐(당시는 잉위 맘스틴이라고 불렀다)과 같은 자극적인 음악에 열광하던 1980년대 말, 나는 보수적으로 클래식 음악에 몰두한 외톨이였다. 30년이 지난 지금, 흥행 기록을 써가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열풍에 힘입어 퀸의 팬이랄 수도 없는 나까지 이런 글을 쓰는 것을 보니 어느덧 그들도 클래식이 된 모양이다.

우리 반 송영규가 들어보라고 권했던 말름스텐

당시 친구가 귀에 꽂아준 ‘보헤미안 랩소디’(이하 프레디 머큐리와 브라이언 메이가 부른 대로 ‘보랩’이라 줄임)는 그에게는 경천동지 할 새로운 음악으로 비쳤을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이미 ‘클래식’한 곡이었다. 랩소디(광시곡)라는 제목 때문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여러 양식을 이어 붙인 악상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랩소디란 이런 것!

아마도 ‘보랩’을 좋아하는 복고 성향의 독자들은 6분이라는, 팝 음악으로는 무모할 만큼 긴 시간이 상대적으로 너무 짧게 느껴질 것이다. 1975년 프레디 머큐리가 ‘보랩’을 발표하기 150년 전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귀가 들리지 않는 쉰넷의 작곡가가 쓴 아홉 번째 교향곡은 마지막 악장의 길이만 ‘보랩’의 네 배 길이였다. 거기에 교향곡의 정형을 무시하고 네 독창자와 합창까지 가세했다. 아연실색할 일이었다. 어디서도 머큐리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모델로 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내가 보기에 둘 사이의 유사성은 너무도 자명했다.

안토니오 살리에리도 아니고

‘보랩’은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스 디스 더 리얼 라이프’라는 가사의 아카펠라(0:00)가 시작이다. 이어서 프레디가 ‘마마, 저스트 킬 더 맨’이라는 발라드(0:55)로 등장한다. 건반의 간주 뒤로 같은 곡조를 한 차례 더 부르고 나면, ‘가끔씩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는 절규와 함께 브라이언 메이가 기타 솔로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세 번째가 이른바 오페라(3:08)에 해당하는 앙상블이다. 모차르트 오페라의 주인공 피가로는 말할 것도 없고 스카라무슈나 갈릴레오 모두 오페라를 상징하는 후렴구들이다. 스카라무슈는 오페라의 뿌리인 이탈리아 광대극,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주인공이다. 갈릴레오는 ‘갈릴리 태생’이라는 말로, ‘보랩’보다 4년 전에 나온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록 오페라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떠올리게 한다. 문예사상 첫 번째 오페라를 창작한 피렌체의 음악 동호회, 카메라타의 멤버 중에 빈첸초 갈릴레이라는 음악가가 있었다. 바로 천문학자 갈릴레오의 아버지이다. 이런 상상의 나래가 ‘비스밀라’나 ‘바알제붑’과 같은 이교도의 가사를 타고 날아오를 때, 네 번째 짧고 강렬한 하드록(4:12)으로 넘어간다.


끝으로 다시 한번 발라드(5:15)가 돌아오는데 이때 곡을 마무리하는 가사는 맨 처음 아카펠라에 나왔던 ‘어쨌든 바람은 불고’이다.

니컬러스 맥기건이 지휘하는 필하모니아 바로크 악단의 그래픽 스코어

이에 비춰 베토벤 ‘합창 교향곡’의 드라마틱한 마지막 악장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0:00) 서주 - ‘환희’의 주제와 변주

(6:20) 바리톤 서창 - ‘환희의 송가’와 4중창의 변주 

(9:33) 행진곡과 테너 선창에 이은 변주

(13:47) 새로운 악상의 후속 합창 ‘백만인이여, 포옹하라’ 

(17:18) ‘환희의 송가’와  ‘포옹하라’의 푸가 - 코다


귀로 들을 것을 말로 하자니 복잡하지만 매년 연말이면 세계 도처에서 반복되는 제전의 음악이다. 나는 아직도 ‘보랩’이 ‘합창 교향곡’에 대한 오마주라고 굳게 생각한다.


별로 공감하지 못하는 독자를 위해 그러면 엄연한 사실을 살펴보자. 프레디 머큐리의 어록을 정리한 그레그 브룩스와 사이먼 럽턴의 책 ‘퀸의 리드 싱어, 프레디 머큐리’(뮤진트리 출간)와 남아 있는 음악 자료들을 보면 프레디 머큐리가 평생 동경한 두 가지가 오페라와 발레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영화에서 프레디는 EMI 음반사의 매니저에게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부르는 카르멘의 아리아를 들려주며, 오페라의 영감을 받은 ‘보랩’을 싱글 앨범 수록곡으로 제시한다. 6분짜리 곡을 틀어줄 라디오 방송은 없다며 미친 짓이라는 매니저 역할은 오스틴 파워이자 슈렉의 목소리로 유명한 배우 마이크 마이어스가 맡았다. 그 또한 ‘보랩’을 삽입한 영화 ‘웨인스 월드’를 만들었을 만큼 퀸의 열광적인 팬이었다.

멋진 맛 간 친구들

‘보랩’은 결국 찬반의 격론을 불러온 문제작이 되었지만, 이 곡을 통해 분명해진 것은 누구도 퀸이 하려는 것을 말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프레디에게 오페라를 대표하는 인물은 그가 ‘수퍼 디바’라고 부른 스페인 소프라노 몬세라트 카바예였다(그녀의 모국 카탈루냐 발음으로는 몬세라트 카발례이다). 프레디는 방송을 통해 카바예를 존경한다는 인터뷰를 했고, 그것을 본 카바예가 직접 전화를 걸어 ‘콜라보’를 청했다.

프레디는 뛸 듯이 기뻤고, 꿈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그가 청바지나 쫄쫄이가 아닌 턱시도를 입고 수염까지 깔끔하게 민 것만 봐도 카바예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내가 본 프레디의 모습 가운데 가장 어색하지만 그래도 진심이 엿보여 귀엽기까지 하다.


이렇게 해서 1988년, 풍운의 락커 프레디 머큐리와 세기의 프리마돈나인 몬세라트 카바예의 합작 앨범 ‘바르셀로나’가 탄생했다. 그보다 7년 전에 나온 크로스오버의 효시 ‘퍼햅스 러브’에서 포크가수 존 덴버와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가 서로 따로 노래하고 나중에 합성한 것처럼 너무 이질적으로 들렸다면, 프레디와 카바예는 마치 오페라의 듀엣처럼 자연스럽고 환상적으로 디바의 고향 ‘바르셀로나’를 찬양했다. 그것은 마치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두 연인이 눈빛만으로 사랑을 나누는 데 아무런 장벽을 느끼지 않는 것과 같았다.

카페촐리 데 베네레가 생각나네

퀸의 팬이라면 프레디가 ‘바르셀로나’ 시작부터 ‘보랩’의 세 번째 부분 ‘오페라’의 멜로디 ‘아이 씨 어 리틀 실루에토 오브 어 맨’을 회고하는 것을 금방 알아챌 것이다. 프레디의 우상이던 그 카바예가 2018년 10월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영화 속에서 프레디가 길 건너편의 연인 메리를 향해 푸치니의 ‘투란도트’ 가운데 ‘왕자님 들어보세요’를 틀 때 레코드에서 자기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장면을 보았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Signore ascolta"

프레디에게 오페라가 곧 카바예였다면 루돌프 누레예프는 발레 그 자체였다. 위대한 러시아 발레 유산의 계승자인 이 발레리노는 몸짓과 의상, 무대 매너 모든 면에서 프레디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프레디가 무대에 즐겨 입고 등장한 쫄쫄이, 전문용어로 레오타드(그것을 처음 입은 곡예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가 발레를 동경한 데서 비롯된 것임은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글을 쓰기 전, 나에게 30년 전에 퀸을 처음 소개한 친구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도 금시초문이란다.


의심이 가는 사람은 당장 유튜브에 ‘Royal Ballet Bohemian Rhapsody’라고 쳐보기 바란다. 1979년 프레디가 런던 로열 발레단의 초청으로 발레리노가 된 공연을 볼 수 있다. 그것을 어찌 말로 옮길 수 있을까!

솔직히 지겨운 노래이다
그래도 전문가의 솜씨로 한 번 더

‘보랩’보다 흥미로운 것은 ‘목신’(목축의 신 ‘판’을 말한다)으로 변신한 프레디 머큐리이다. 만년의 히트곡 ‘아이 원 투 브레이크 프리’의 뮤직 비디오는 멤버들의 여장(女裝)으로 유명하지만, 실상 더 의미심장한 부분이 바로 후반부 ‘목신의 오후’ 장면이다. 발레 사상 가장 큰 스캔들을 불러왔던 20세기 초 니진스키의 무대를 프레디가 재현한 것이다.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 ‘목신의 오후’에 클로드 드뷔시가 붙인 ‘전주곡’은 벨 에포크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파리에 온 러시아 발레단은 그 곡으로 발레를 만들었고, 얼룩얼룩한 목신 레오타드를 입은 니진스키는 외설적인 몸짓으로 고상한 오페라 무대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목신 의상을 입고 나팔을 부는 프레디의 모습은 퀸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가 작곡한 ‘더 쇼 머스트 고 온’과 프레디 추모곡 ‘노 원 벗 유’에 다시 등장한다.

그룹 퀸은 1979년에 스위스 제네바 호숫가 몽트뢰에 자신들의 스튜디오를 마련한다. 카지노 내부의 스튜디오는 지금은 퀸 박물관이 되었다. 여기서 이들은 ‘돈 스탑 미 나우’, ‘언더 프레셔’ 그리고 ‘더 쇼 머스트 고 온’과 같은 히트송을 녹음했다.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가 프레디의 마지막 노래가 된 것도 드라마틱하다. 마치 레온카발로의 오페라 ‘팔리아치’에서 아내의 외도를 눈치챈 배우가 같은 상황을 무대 위에서 연기하다가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아내와 연적을 살해하는 내용을 떠올리게 한다. 희극 배역 팔리아치는 스카라무슈의 동료이다. 이렇게 푸치니 여주인공 토스카의 말마따나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산’ 프레디이다.


1991년 11월 24일 프레디의 때 이른 죽음에 뒤이어 1993년 1월 6일 그가 존경한 루돌프 누레예프가 세상을 떠났다. 그들 사이에는 몽트뢰 인근 로잔에 있는 베자르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호르헤 돈이 유명을 달리했다. 모두 사인은 에이즈였다.


20세기 최고의 안무가였던 모리스 베자르는 자신의 연인인 돈과 누레예프 그리고 발레를 사랑한 프레디의 잇따른 죽음을 예사롭지 않게 생각했고, 1996년 퀸과 모차르트의 음악을 엮어 ‘발레 포 라이프Ballet for Life’를 안무했다. 잔니 베르사체가 의상을 맡은 이 발레는 2001년 세종문화회관의 내한 공연에서도 많은 관객을 사로잡았다. 지금은 유튜브에서 누구나 만날 수 있다.

베자르의 ‘발레 포 라이프’가 춤을 통해 모든 사람이 퀸과 소통하기를 원한 작품이라면 그의 ‘9번 교향곡’은 만인을 베토벤과 만나게 하려는 시도였다. 1964년에 초연된 이 발레는 50년 뒤인 2014년 도쿄 발레단과 합작으로 일본에서 다시 공연되었다. 일본은 시큰둥한 미국보다 퀸에 훨씬 열광했고, 늘 쿨한 것을 좋아한 프레디도 게이샤나 다도와 같은 일본풍에 반했다. 그가 살아서 도쿄의 베자르 발레단의 ‘9번’ 공연에 초대받았다면 아마도 자리에 앉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고음불가가 되어 노래가 불가능하다면 마이크를 뽑아 들고 주빈 메타 대신 지휘를 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고적 대장이 악단과 무용수를 동시에 지휘하는 최초의 베토벤 ‘합창 교향곡’이 되었을 것이다. 몽트뢰 호숫가에 서 있는 프레디 머큐리 동상은 어쩌면 ‘환희의 송가’를 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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