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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May 24. 2019

사람에게는 돈이 얼마나 필요한가?

바젤 파울 자허 재단과 바이엘러 미술관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라 스위스(라틴어로 헬베티아이다). 초콜릿과 하이디의 나라. 동화 같은 스위스에서 역사상 많은 위인이 중요한 시기를 보냈다. 그들이 알프스에서 받은 값진 영향과 도움을 살펴보기 위해 2017년 연말연시 열흘 동안의 꿈속으로 돌아간다. 폭풍우 엘리노어를 만난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바젤을 떠나기 전에 들를 곳이 있다. 북쪽으로 한 시간 남짓 가면 프랑스 알자스 지방에 콜마르라는 도시가 있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라는 르네상스 시대 화가가 그린 <이젠하임 재단화>가 있는 곳이다.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가 이 제단화의 영향을 받은 그림이다. 내 두 번째 에세이집 《이젠하임 가는 길》이 이 그림으로부터 제목을 따왔다. 사람들이 여행기냐고 물었던 그 책, 지금과 같은 식이라면 여행기로 다시 써도 되겠다.


<이젠하임 제단화>와 스트라빈스키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딱히 없다. 그러나 이 그림은 모든 시공을 초월해 예술가에게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그림을 그린 마티아스 그뤼네발트는 16세기 전반, 독일에서 활동한 화가이다. 스트라빈스키의 동료였던 독일의 파울 힌데미트라는 작곡가가 <화가 마티스>라는 오페라를 만들었다. 바로 20세기의 마티스가 아닌 16세기의 마티아스 그뤼네발트가 주인공이다. 오페라에서 화가는 종교개혁과 농민전쟁으로 백성이 신음하는 이때 자신같이 나약한 화가가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자문한다. 그는 우연찮게 백성에 삶에 뛰어들었다가 불의를 참지 못하고 그때마다 신분과 종파에 관계없이 약자의 편에 서게 된다. 결국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 곧 자기 일에 매진하는 것이야말로 소명을 다하는 것이라는 계시를 받는다. 그가 그린 제단화에서 십자가형을 받는 그리스도는 고통 속에 죽어가던 농민군의 대장 얼굴을 닮아 있었다.

사회 격변기에 예술가가 갖는 의미는 비단 창작자뿐만 아니라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에게도 중요한 문제이다. 이 어려운 시절에 이렇게 탐미적인 예술에 빠져 있어도 되는가라는 의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돌아 보아 어렵지 않던 시대가 있었을까? 그러나 그때마다 힘을 주는 선율과 위로하는 감동적인 화폭이 있다. 예술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작품을 만들 때 소명을 다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이젠하임 제단화>이다. 나는 그곳에서 스트라빈스키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를, 또 스트라빈스키와 힌데미트를 대비해 보려고 했다.


기차 시간에 맞춰 바젤 역에 갔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전광판이 온통 연착 연발 표시로 벌겋다. 아침 일기 예보에 강풍이 있다고 했는데 여름도 아니고 태풍이 있는 곳도 아닐 텐데 설마 했다. 수십 년 만에 맞는 기상이변이긴 했지만 유럽 겨울 폭풍이 이렇게 무서운 것일 줄은 미처 몰랐다. 1월 4일 불어닥친 폭풍 엘리노어는 대서양 연안과 알프스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내 남은 일정 닷새도 그로부터 심대한 영향을 받는다.

폭풍우를 맞은 바젤 뮌스터 광장

역무원은 콜마르로 가는 열차는 언제 재개될지 모른다고 했다. 취소라고 봐도 될 것이다. 아직 폭풍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나는 그동안 볼 기회가 없었던 바젤 뮌스터 광장으로 갔다. 길에는 아무도 없었고,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에서 떨어진 색구슬이 광장을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성당 바로 옆에는 내가 바젤에 왔던 이유 가운데 하나인 파울 자허 재단이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 이미 새해 첫 주는 쉬는 것을 알고 왔기에 들를 생각조차 안 했던 곳이다.

아무리 허세 없는 스위스이지만 파울 자허 재단의 외관은 정말 소박하다

마치 파울 자허 재단은 우르스 비트머의 《어머니의 연인》(아래 포스팅 참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확인해줄 수 없다는 듯한 을씨년스러운 느낌이었다. 머뭇거릴 새 없이 나는 바이엘러 재단 박물관을 다음 행선지로 택했다. 돈이 몰리는 곳, 재벌 놀이터라는 색안경도 있지만 바젤의 미술 사랑은 뿌리가 깊다.

보니파치우스 아머바흐(Bonifacius Amerbach, 1495-1562)는 바젤 명문가에서 태어나 바젤 대학에서 음악을 배웠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옮겨 법학을 전공한 그는 아비뇽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바젤로 돌아와 법학 교수가 되었다. 종교개혁의 소용돌이에서 에라스뮈스가 일으킨 인문주의 운동을 지지한 그는 바젤이 자랑하는 지성이었다. 특히 그는 음악적인 소양을 바탕으로 하인리히 이자크, 조스캥 데프레와 같은 르네상스 일급 음악가들의 작품을 모아 들였다. 친구였던 홀바인의 그림 또한 소중히 보관했다.

홀바인이 그린 친구 아머바흐의 초상. 바젤 쿤스트무제움

보니파치우스 사후 ‘아머바흐 캐비닛’이라고 부르는 수장고를 외아들 바질리우스(1533-1591)가 물려받았다. 아머바흐 가문의 예술 기질은 이번에는 음악이 아닌 미술로 옮겨갔다. 법학을 공부하다가 금세공장이 된 바질리우스는 아버지의 소장품을 더욱 확대했다. 1661년 바젤 시는 아머바흐 가문의 소장품 5천 점을 구입해 바젤 미술관(Kunstmuseum Basel)을 세웠다. 유럽의 첫 공공 박물관이다. 인구 20만 도시에 연간 그보다 많은 인원이 이 박물관을 찾는다.


에른스트 바이엘러(Ernst Beyeler, 1921-2010)는 그런 바젤의 전통이 낳은 20세기 최고의 화상이었다. 작은 서점에서 시작해 미술 갤러리로, 또 이것을 전 세계적인 미술 박람회 ‘아트 바젤’로 성장시킨 사람이다. 그는 한마디로 ‘미술의 댜길레프’였다. 댜길레프가 발레 뤼스라는 전위 예술가 집단을 만들어 당대 예술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것처럼, 바이엘러는 1970년에 시작한 ‘아트 바젤’을 통해 미술품 유통의 중심이 되었다. 저평가된 인상주의 화가와 20세기 신인 미술가들이 바이엘러의 안목으로 빛을 보았다. 피카소도 바이엘러의 컬렉션을 신뢰한 나머지 그가 자신의 그림을 골라 시장에 내놓을 수 있도록 허락했을 정도였다.


바이엘러는 앞서 1960년대에 화상 이력의 터닝포인트를 맞는다. 미국의 은행가 조지 데이비드 톰슨(George David Thompson, 1899-1965)은 평생 수집한 미술품 6백여 점을 피츠버그의 카네기 미술관(Carnegie Museum of Art)에 내놓았다. 자신의 이름을 딴 별도 건물에 전시해 달라는 조건이었다. 폴 세잔, 클로드 모네, 에드가 드가, 페르낭 레제, 앙리 마티스, 파울 클레,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걸작이 즐비했다. 카네기 미술관은 톰슨의 제안을 거부했다.

바이엘러 미술관에서 클레를 감상 중인 어린이

바젤에서 온 바이엘러가 작품의 대부분을 사들였다. 만일 카네기 재단이 톰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오늘날 ‘아트 바젤’이 아닌 ‘아트 피츠버그’라는 최대의 미술품 박람회가 ‘아트 바젤’이 아닌 피츠버그의 ‘데이비드 L. 로런스 컨벤션 센터’를 중심으로 열리고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바다 건너 낯선 신대륙으로 갔던 유럽 미술이 다시 자신이 탄생했던 곳으로 돌아왔다. 바이엘러와 아내 힐다는 1982년에 바이엘러 재단을 설립했고, 1997년 렌초 피아노가 설계한 건물에서 소장품을 공개했다. 2010년 바이엘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자산은 약 18억 5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2조 2천억 원이다.

특별전으로 도배된 클레 외에 거의 유일하게 전시되었던 작가 앙리 루소. <영양을 공격하는 굶주린 사자>

파울 자허와 에른스트 바이엘러. 두 사람 모두 바젤이 자랑하는 예술 후원자였다. 각각 음악과 미술 두 분야에서 이 도시를 돋보이게 한 영웅이다. 그러나 똑같지만은 않다. 자허가 당대 거장들에게 작품을 의뢰하고 초연하는 데에는, 그 자신의 능력 못지않게 묵묵히 희생한 스텝과 아내가 물려받은 전남편의 유산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제약회사 로슈에서 번 돈으로 파울 자허 재단이라는, 사설로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하고 중요한 자료를 소장한 기관을 설립했다. 여기까지는 바이엘러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자허는 1983년 스트라빈스키의 미망인이 죽고 경매에 나온 자필 악보와 사진 등 일체의 유물을 엄청난 값으로 사들였다. 입찰 경쟁자였던 뉴욕 공립 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의 예산으로는 상대가 안 되었다. 이 도서관 또한 피츠버그의 미술관처럼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후원으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곳이다. 카네기가 살았더라면 바이엘러나 자허에게 소장품이 돌아갈 수 있었을까? 바이엘러의 미술관에서 많은 사람이 현대 예술의 걸작을 볼 수 있다면, 자허 재단으로부터 일반인이 기대할 것은 없다.


파울 자허 재단의 인터넷 검색과 자료 공개 방식은 소장 자료 전체를 웹상에 공개하는 뉴욕 공공 도서관에 비할 바가 못된다. 무엇보다 자허 자신이 남긴 자료가 미미하다. 평생 지휘자로 활동했던 그이지만, 기억할 만한 음반은 앞서 본 안네 조피 무터의 스트라빈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집 정도이고, 그나마 그가 사망한 뒤 바젤 체임버 오케스트라도 해단했다. 억만장자였다면 그렇게 두지 말았어야 하지 않을까.

왼쪽부터 콘라트 베크, 이고리 스트라빈스키, 파울 자허

나는 여행에서 돌아와 재단에 이메일을 적었다. 한국 독자를 위한 선물로 받은 사진은 스트라빈스키가 파울 자허, 그리고 자허가 후원한 스위스 작곡가 콘라트 베크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자허 재단은 유물 구입 직후 바젤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했다. 세상에, 음악을 미술관에서 회고하다니! 만일 같은 시기에 공연이 함께 열렸더라면 응당 음반으로 남았을 것이다.

스위스 작곡가 콘라트 베크의 '가을Herbst'

내가 자허였다면 그 돈으로 극장을 지었거나 스트라빈스키 페스티벌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로시니의 <라 체네렌톨라>를 상연했던 그 허름한 바젤 극장이 아닌, 루체른의 KKL과 같은 초현대식 공연장에서 해마다 스트라빈스키의 걸작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스트라빈스키가 설마 바이로이트의 바그너처럼, 연고 없는 다른 곳에서 자신을 기리는 것을 싫어했을까.

내가 보기에 호프만 라 로슈의 유산을 값지게 쓴 쪽은 파울 자허보다는 미망인의 전 남편 소생인 한스 루카스 호프만(Hans Lukas "Luc" Hoffmann, 1923-2016)이다. 어머니가 의부와 결혼한 뒤에 그는 주로 새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역시 적잖은 상속 유산을 받은 그는 세계야생기금(WWF)의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고 늪과 습지 보호를 위한 람사르 협약이 맺어지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마지막으로 호프만이 한 일은 남프랑스 아를에 빈센트 판 고흐 기념 시설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유업은 그의 딸 마야가 이어받았다. 호프만이 러시아 백작 가문의 다리아 라주몹스키와 결혼해 낳은 둘째이다. 라주몹스키는 바로 베토벤이 자신의 중기 현악 사중주 세 곡을 헌정했던 빈 주재 러시아 대사 집안이다.

이렇게 또 베토벤을 듣네

세계 미술계의 거물로 광주비엔날레를 찾기도 한 마야 호프만은 두 자녀 루카스와 마리나의 이름 첫 자를 딴 루마 재단(LUMA Foundation)을 설립하고 고흐가 전성기를 보낸 아를에서 실험적인 공간을 만들고 있다.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루마 아를 센터는 2020년 완공 목표이다.

고흐의 땀이 송골송골한 아를에 예술복합센터라니, 얼마나 설레는가! 예술 작품이 어디에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화가가 활동한 지역이거나, 그것을 헌정받은 사람의 처소가 가장 의의 있다. 문제는 돈을 주고 샀거나 힘으로 빼앗은 경우이다. 돈이나 힘으로 얻은 물건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최소한 부가가치라도 내놓아야 한다. 프랑스가 강화도에서 약탈한 외규장각 도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아무런 정당성도 가치도 없다. 다만 고대 그리스나 이집트 유물이 각각 런던이나 베를린의 근대 예술 형성에 훌륭한 영향을 미쳤다면 그 나름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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