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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Dec 29. 2019

잃어버린 지평선 샹그릴라

베를린 옛 국립 미술관

표지: 베를린 옛 국립 박물관이 소장한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의 <암벽 아치, Felsentor>


함부르크를  떠나 1시간 반 남짓 남동쪽으로 내려가 독일 수도 베를린에 도착했다. 10월 3일은 우리에겐 개천절이지만 독일은 통일을 이룬  날로 기린다. 그러나 베를린 중앙역 안팎의 인파는 심상치 않았다. 안겔라 메르켈 총리의 친난민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모여 있다. 그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람들이 ‘관용’이라고 적힌 푯말을 들고 대치 중이다. 이들 사이사이 무장 경찰 몇 개  중대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베를린은  독일에서도 특히 이민자에 대한 관용을 상징하는 도시이다. 17세기 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받아들인 2만여  명의 프랑스 위그노 교도가 18세기 프로이센이 부국강병을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은 이민자들을 위해 프랑스 말로  예배를 드릴 교회까지 지어주었다. 젠다르멘마르크트 광장의 프랑스 돔이다.


그러나  프로이센에 온 사람들은 프랑스를 떠난 전체 위그노 20만 명 가운데 소수였고, 어디까지나 낙후된 북독일 작은 나라의 체질을  강화해줄 고급 인재가 대부분이었다. 현재 독일의 문제는 그와 반대이다. 유럽연합 가운데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난민을 받아들인  나라가 형편이 낫고 세계대전의 원죄가 있는 독일이다. 반면 들어온 사람들은 대개 독일보다 훨씬 못 사는 동유럽이나 아랍 출신이다.  이들에게 주는 보조금과 일자리는 결국 세금에서 나온다.

통일 독일의 상징이 된 브란덴부르크 문

통일이  되면서 동독을 끌어 앉은 지 30년, 그 핸디캡을 겨우 극복할 즈음에 독일은 다시 한번 몸살을 앓으며 스스로를 시험하는 것이다.  관용이 어디까지 인내할 수 있을지를 말이다. 남유럽에 비해 비교적 치안이 안전한 독일이었지만, 민심이 어수선하니 소매치기도 많고  거리도 전보다 지저분해 보인다. 그렇다고 마냥 움츠릴 수만은 없다. 마침 브란덴부르크 문 위에 뜬 무지개는 바라보는 사람  모두에게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박물관섬(Museumsinsel) 내의 옛 국립 미술관(Alte Nationalgalerie)이다. 베를린을 흐르는 강은 슈프레이다. 슈프레가 베를린 도심을 관통하며 만든 섬이 박물관섬이다. 여의도와 같은 형국이나 면적은 여의도 광장의 절반이 못 된다. 19세기 초부터 이곳에 박물관이 들어서기 시작해 지금은 여섯 곳이 운영 중이다. 그 가운데 독일 근현대 회화를 주로 소장한 옛 국립 미술관과 고대 중동의 유적을 옮겨놓은 페르가몬 박물관이 가장 유명하다.


파르테논 신전 모양의 옛 국립 미술관에 들어서면 전시실로 올라가는 계단부터 오토 가이어Otto Geyer가 만든 <역사와 문화 인물 부조상>과 마주한다. 계단을 따라 디귿자로 둘려진 조각 안에 독일 문화의 주인공들이 빼곡히 자리한다. 중세 음유시인들의 모습이 재미있다.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의 주인공들이다. 탄호이저 자신인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겐과 그의 친구 볼프람 폰 에셴바흐, 그들이 흠모했던 헤르만 영주와 엘리자베트 공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에 언급되는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 그리고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쓴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와 같은 실존인물 사이로 <파르지팔>에 나오는 악한 마법사 클링조르의 모습이 보인다. 

그 반대편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옥좌 주위로 바흐가 칸트를 곁에 세운 채 오르간을 연주하고, 레싱은 후배 괴테와 실러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다. 노래방에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알차게 때우기 위해 선곡하곤 했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독일판인 것이다. 허구의 인물 클링조르는 노래에 나오는 이수일과 심순애에 상응한다.

노래방에 안 가보신 분들을 위해

몇 명을 조각한 것인지 세어보려다 말고 걸음을 재촉한다. 아직 확인할 인물이 많기 때문이다. 먼저 아돌프 멘첼(Adolph Menzel, 1815-1905)이 그린 <상수시 프리드리히 대왕의 플루트 연주회>이다. 흔히 바흐의 <음악의 헌정> 작곡 배경으로 묘사되곤 한다. 

사발보다는 하르모니아 문디가 내놓은 모로니 음반을 더 좋아한다

중앙에 플루트를 부는 사람이 대왕이고 그 오른쪽에 등을 돌리고 건반을 연주하는 사람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둘째 아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라는 것은 널리 알려졌다. 만년의 바흐는 대왕의 음악가로 봉직하던 아들을 만나러 왔다가, 대왕에게 주제를 하사 받고 그것을 가지고 대위법 예술을 집약해 <음악의 헌정>을 지었다. 때문에 100년 뒤에 그려진 그림에서 맨 오른쪽 사색에 잠긴 듯한 노인이 아버지 바흐가 아닌가 추측하게 된다.

그림은 등장인물을 하나하나 소개한다. 노인은 바흐가 아니라 대왕의 플루트 선생이었던 요한 요아힘 크반츠이다. 그 앞에 바이올린을 들고 선 이는 악장 프란츠 벤다이다. 대왕의 왼쪽 네 남자 가운데 음악가는 맨 오른쪽 카를 하인리히 그라운뿐이다. 이 그림은 고스란히 음반과 영상으로 거듭났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플루트 수석 에마뉘엘 파위는 2012년 대왕의 탄생 300주년을 기념해 상수시 궁전에서 공연을 가졌다.

독일 살롱 음악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비발디가 리코더를 위해 쓴 협주곡이 독일로 건너와 가로로 부는 플루트의 가능성을 확대해준 결과이다. 그런데 대왕을 둘러싼 여인들은 누구일까? 단순한 들러리일까?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자. 

가장 오른쪽 노파는 대왕을 보필했던 조피 카롤리네 폰 카마스 백작부인이다

먼저 가장 대왕 뒤편에 고개를 기울인 슬픈 표정의 여성은 대왕의 누나 빌헬미네이다. 그 왼쪽 방긋 웃는 사람은 누이동생 아말리에 공주이다. 맨 왼쪽 옆모습의 여인 또한 누이동생 필리피네 샤를로테로 보인다. 이들 남매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는 매우 엄한 군주였다. 남매는 어려서부터 매질을 당하기 일쑤였고, 특히 동성애 성향을 가진 왕자는 더욱 가혹한 훈육을 받았다. 왕자는 애인 한스 헤르만 폰 카테 중위와 궁을 탈출하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붙잡혔다. 노발대발한 프리드리히 1세는 아들이 보는 앞에서 카테 중위를 참수했다. 뒷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국강병의 국정 기조를 이어간 군인왕이었지만, 아버지 시대와 달리 학문과 음악을 숭상한 대왕의 모습이 그림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세 공주가 여기에 그려질 만할까? 정답은 ‘매우 그렇다’이다. 대왕이 플루트를 좋아한 만큼 누나 빌헬미네는 류트를 잘 연주했다. 당대 류트의 일인자이자 바흐의 친구였던 질비우스 레오폴트 바이스가 그의 스승이었다.

바이스는 바흐의 큰 아들 프리데만을 통해 아버지를 소개받았다

그 아래 필리피네 샤를로테는 브룬스비크 볼펜뷔텔의 카를 1세와 결혼해 안나 아말리에 공주를 낳았다. 그녀는 작센 바이마르 아이제나흐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와 결혼해 카를 아우구스트를 낳았는데, 남편이 요절하는 바람에 아들의 섭정이 되었다. 이들 모자가 바로 괴테를 품은 바이마르의 군주였다. 젊은 괴테가 이탈리아로 몰래 떠날 때 섬기던 군주가 바로 카를 아우구스트였던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예술을 중시했다.

대왕의 조카인 작센 바이마르 아이제나흐의 안나 아말리에와 그의 아들 카를 아우구스트

대왕의 막내 누이 이름 또한 안나 아말리에였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고 크베들린부르크 수녀원장으로 재임했다. 그녀에게 음악을 가르친 사람은 바흐의 제자 요한 필리프 키른베르거였다. 또한 안나 아말리에는 2천 권이 넘는 악보를 모았다. 

대왕과 같은 제복 스타일의 상의를 입은 누이 안나 아말리에

그녀의 음악 장서는 마침 베를린에 합스부르크 대사로 와 있던 고트프리트 판 스비텐 남작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뒤에 빈으로 돌아간 판 스비텐은 본 대로 따라 했다. 그의 악보는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이 차례로 열람하며 그들 음악의 양분으로 삼았다. 모차르트는 남작을 위해 헨델의 오라토리오를 편곡했고, 하이든은 그의 대본을 가지고 <천지창조>를 썼으며, 베토벤은 첫 교향곡을 판 스비텐에게 헌정한 것이다. 동서독으로 나뉘었던 안나 아말리에의 음악 장서는 통일 뒤 베를린 국립 도서관으로 합쳐졌다. 이쯤 되면 대왕 자신과 그가 중용한 이류 음악가들보다, 홀대받은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와 대왕의 누이들이 음악사에 기여한 바가 훨씬 큰 것이다.

멍 때리는 세 남매

멘첼의 그림도 중요하지만 옛 국립 미술관이 소장한 최고의 걸작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와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의 회화들이다. 함부르크에서도 보았듯이 프리드리히의 그림은 보는 사람을 그림 속 인물들의 시선으로 끌어들인다. ‘그리움으로의 초대’라고 해야 할까? 현실에서 바랄 수 없는 이상의 동경, 늘 그것이 주제이다. 그러니 낭만주의의 아이콘이 될 수밖에 없다.

남자는 편집된 재킷: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

인물의 뒷모습 못지않게 프리드리히 그림에서 주를 이루는 것은 폐허가 된 유적이다. 언뜻 스산한 비극을 떠올리게 하지만, 폐허는 오래된 영화(榮華)를 상징하기도 한다. 다시 일으켜 세울 의지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참나무 숲의 수도원Abtei im Eichwald>의 하단에 거뭇거뭇한 자취는 자세히 보면 모임을 갖는 사람들이다. 줄리엣 무덤 가의 모습을 떠올리면 죽음을 초월한 사랑에 이르고, 당대 참여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가입했던 프리메이슨 결사 같이 보이기도 한다. 뜻을 같이 하는 순례자의 행렬은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지나 월트 디즈니의 장편 애니메이션 <판타지아> 가운데 마지막 곡인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까지 이어진다. 가사는 스코틀랜드 작가 월터 스콧의 <호반의 여인>에서, 엘렌이 전장에 나가는 아버지의 안녕을 비는 기도이다.

우거에 포스터 소장

프리드리히의 그림은 동시대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Karl Friedrich Schinkel, 1781-1841)은 <안개 바다 위의 나그네>를 보고는 자신이 도저히 미치지 못할 경지라고 보고 건축가가 되는 것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때까지 그린 싱켈의 그림 다수가 옛 국립 미술관에 여럿 있다. 역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고딕 건축물이 앞으로 도래할 유토피아를 보여주는 듯하다. 싱켈의 그림들은 크리드가 지휘하는 리아스 실내 합창단의 브람스 세속 합창곡집과 훌륭한 화음을 이루었다. 이 베를린 소재 합창단이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음반이었다.

최고의 음악은 숨어 있게 마련

브람스까지 가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음악 애호가가 선명하게 기억하는 싱켈의 이미지가 있다. 바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무대 디자인이다. 밤의 여왕이 등장하는 별이 총총히 박힌 반구형의 무대가 1816년 싱켈이 구상한 것이다.

일명 '장모님 바가지' 장면

어쨌거나 싱켈은 이후 건축가로 변신한다. 그는 자신이 그림 속에 만들었던 이미지를 실제로 구축한다. 베를린 젠다르멘마르크트 광장에 있는 콘체르트하우스가 그의 대표작이다. 싱켈의 이상주의 건축은 강대국으로 부상한 프로이센의 골조를 이루었고, 그 기조는 제자 마르틴 그로피우스(Martin Gropius, 1824-1880)에게 이어졌다. 그의 설계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이름을 따서 부르는 마르틴 그로피우스 바우(Martin-Gropius-Bau)이다. 현재 기획전을 여는 미술관으로 사랑받고 있다. 그로피우스라면 익숙한 성이다. 20세기 바우하우스 운동을 주창하는 발터 그로피우스의 종조부가 마르틴 그로피우스였다.

마킹 테이프 두른 거 보소!

싱켈에서 그로피우스 가문으로 이어진 독일 건축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사회를 변혁하고자 했다는 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발터 그로피우스의 동료였던 브루노 타우트이다. 타우트는 <알프스 건축Alpine Architektur>이라는 책을 통해 알프스 산맥을 인위적으로 개조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단순히 미적인 만족을 위한 허영이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으로 벼랑에 도달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는 파편화되고 병든 대도시를 떠나 알프스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유토피아를 제시한 것이다. 똑같은 시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동료들이 알프스 자락에서 음악제를 통해 병든 문명을 치유하고자 했던 것과 같은 시도이다. 베를린에 있는 타우트의 말굽형 공동주택을 보면 그의 생각이 망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우주 공간에 띄운 것이 고리형의 우주 정거장이지 않은가!

양계장 스타일

싱켈의 반구형 천체, 아니 그 이전에 프리드리히의 산꼭대기부터 타우트의 알프스 건축에 이르기까지 이상주의는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보금자리이기도 했지만, 그들보다 훨씬 ‘나이브’하게 이를 받아들인 작곡가가 ‘러시아의 인상주의자’라고 하는 알렉산드르 스크랴빈(1872-1915)이다. 신비주의에 바탕을 둔 그의 음악이 타우트의 알프스 공동체에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욱일기 나오기 전임
무슨 이미지인지는 모르나, 음악은 제대로임

실제로 스크랴빈은 소리와 빛, 향기가 총동원된 멀티미디어 음악을 히말라야에서 공연할 계획을 세웠다. 그의 때 이른 죽음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세상에 이루어지지 못할 일은 없다.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은 제임스 힐턴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것이다. 로널드 콜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고전 영화는 히말라야의 끝자락 티베트에 있는 ‘샹그릴라Shangri-La’라는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작곡가는 흑백 시대 거장 드미트리 티옴킨이다. 스필버그와 존 윌리엄스처럼 프랭크 카프라의 음악은 티옴킨이 도맡았다. 티옴킨은 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글라주노프에게 배웠으니 스크랴빈과도 멀지 않다.


이밖에 베를린 옛 국립 박물관의 그림을 더 소개하려면 별책을 내야 한다. 저녁에 필하르모니에 가기 위해 정말 꾹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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