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준호 Dec 31. 2019

기적 중의 기적

상수시; 페르가몬 박물관;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

이튿날 오전 베를린 바로 옆 포츠담의 상수시 궁전을 찾았다. 프리드리히 2세 대왕이 지은 궁전 상수시Sanssouci는 프랑스말로 ‘걱정 없는’ 이라는 뜻이다. 구궁전에서 신궁전까지 울창한 숲을 관통하는 산책로는 베르사유를 모델로 한 많은 유럽 궁전 가운데 으뜸이다. 공원 안팎을 보니 어제 옛 국립 미술관에서 만난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그림이 상상이 아니라 실경임을 확인하게 된다.

저 멀리 보이는 폐허가 상수도 시설이다

멀리 폐허가 된 유적은 바로 프리드리히의 컴컴한 그림 속, 프리메이슨 단원인 듯 보이는 사람들의 회합장소를 떠올리게 한다. 하이든도 모차르트도 베토벤도 모두 프리메이슨이었다. 당대에 보다 나은 세상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프리메이슨의 사명에 뜻을 보탰다. 보통 사람이 눈길을 주지 않는 흔한 모습으로부터 관념과 이상의 세상을 끌어낸 화가의 예리한 시선에 새삼 탄복한다. 네 박자의 단조로운 모티프로 운명의 모든 것을 지어낸 베토벤의 작업과 똑같은 것이지 않은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멀리 보이는 폐허가 인공건축이라는 점이다. ‘폐허언덕Ruinenberg’이라는 이름의 고지에는 상수시에 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저수조가 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저수조 주위에 ‘노르만 탑’이라 부르는 폐허를 짓게 해 성의 내력을 고대로 끌어올리고자 했다. 건축 내외장재로 파벽돌, 곧 허문 건물에서 나온 벽돌을 쓰는 것처럼 상수시의 상수시설을 일종의 ‘빈티지 에이징’한 셈이다. 서울 성곽을 봐도 오래된 돌일수록 뭔가 ‘있어’ 보이지 않는가! 인간의 허영심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양상이다.

보수를 거듭한 서울성곽이 조각보처럼 보인다
포츠담 페허 언덕이 노르만 탑과 저수조

그러고 보면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가 현실과 이상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창조한 폐허가 왠지 타락한 마법사의 정원처럼 보일 지경이다. 실제로 한스 위스겐 지버베르크 감독이 만든 <파르지팔> 가운데 ‘성찬의 예식’ 장면은 프리드리히가 그린 <아그리젠토의 주노 신전>을 배경으로 썼다. 폐허가 된 이교도의 신전과 상처받은 기독교 성찬의 전례가 무슨 상관인가? 그러니 니체가 <파르지팔>을 위선이라 한 것 아닌가!

지버베르크의 <파르지팔> 가운데: 멀리 선 폐허를 보라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가 그린 <아그리젠토의 주노 신전>
이것이 시칠리아의 진짜 준호 신전

인간이 만든 것 가운데 진실한 것이 있을까? 진실한 것이란 무엇일까? 결국에 인간이 믿을 것은 데카르트의 생각처럼 이성뿐이다. 괴테가 이탈리아 기행 전후에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Iphigenie auf Tauris>를 쓴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시칠리아 아그리젠토, 신전의 계곡에서 인간 이성의 한계를 시험한다. 같은 시기에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도 에우리피데스 원작의 <토리드의 이피제니Iphigénie en Tauride>를 오페라로 썼다. 

트로이 전쟁 이후 귀국한 그리스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집안 이야기이다. 아가멤논은 출전 전에 큰 딸 이피게니에를 승전의 제물로 바치려 한 탓에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와 사이가 벌어진다. 이피게니에의 순수한 마음을 높이 산 아르테미스 여신은 그녀를 사람들 몰래 피신시켜 자신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둔다. 트로이 전쟁 뒤 귀국한 아가멤논은 아내와 그의 정부에 의해 피살된다. 이에 분노한 엘렉트라와 오레스트 남매는 어머니를 죽인다. 여기까지가 앞 이야기이다. (앞도 끝이 없지만…)

친족살해 죄로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던 오레스테스와 친구 필라데스는 이피게니에가 제사장으로 있는 타우리스로 피신한다. 그런데 마침 이피게니에는 섬에 도달한 외지인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상황이다. 얘기를 주고 받다가 제물이 동생임을 안 그녀는 동생과 함께 탈출한다.

얘기를 느닷없이 탈출로 끝낸 이유는 괴테와 글루크의 결말이 다르기 때문이다. 에우리피데스에 충실한 글루크는 마침 도착한 그리스군이 타우리스왕을 물리치고 신들이 개입하여 남매가 탈출에 성공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반면 괴테는 이피게니에가 자신을 사랑하는 타우리스의 왕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도록 바꾸었다. 이성 만능에 대한 자아 비판이 뒤따르겠지만, 어쨌든 괴테는 신화의 세계로부터 인간의 세계로 성공적으로 진보했다.

어머니 혼령의 저주와 더불어 동생의 생사를 결정해야 하는 이피게니에
멀리 보이는 중국식 정자. 나무는 프리드리히가 그렸던 고목들과 같다

신화 속 이방인은 현대의 난민과 같다. 프리드리히 대왕도 이 너른 상수시 숲을 거닐며 고민했을 것이다. 프로이센으로 피해온 외지인들를 어찌할 것인가를 말이다. 상수시 식물원 오랑주리에서 자코모 마이어베어의 <위그노 교도> 가운데 ‘꽃 틈에 나의 꿈은 되살아나고Parmi les pleurs mon reve se ranime’를 듣는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때 종교라는 광기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 뒤로 많은 프랑스 위그노 교도가 독일과 스위스로 터전을 옮겼다.

바그너가 증오했던 유대 작곡가 마이어베어의 아리아
상수시 식물원에 핀 기화요초들

오후에는 다시 박물관섬의 페르가몬 박물관(Pergamonmuseum)이다. 여기에도 이주된 폐허가 그득하다. 20세기 초 소아시아와 중동 식민지에서 모아온 유적과 유물을 한데 모은 것이다. 어마어마한 규모 덕에 독일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을 모으는 박물관이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소련이 많은 소장품을 가져갔고, 독일은 줄기차게 반환을 요청 중이다. 러시아는 고민할 것이다. 돌려줘야 한다면 독일이 아닌, 그리스나 중동 국가에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가장 압도적인 것은 제우스 제단이다. 페르가몬은 지금의 터키에 있는 고대 그리스 도시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곳에 있던 제단이 곧 박물관 명칭이 된 것이다. 제단의 규모도 압도적이지만 무너진 조각을 이어붙인 고고학자들의 상상력은 정말이지 ‘이성의 승리’라고 해야 하겠다.

이 폐허를 진짜라 할 수 있을까?
왼쪽 위의 손은 번개를 던지려는 제우스의 손이다! 믿거나 말거나...

페르가몬 박물관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유물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이슈타르 문이다. 오페라 <나부코>의 주인공인 네부카드네자르 왕이 세운 문은 신비로운 푸른 벽돌로 지었다. 이슈타르, 마르둑, 아다드 따위의 신들을 기린 문앞에 서니 자연 <길가메시>가 떠오른다. 길가메시는 기원전 6세기 네부카드네자르 왕의 시대보다 1500년 이상 더 거슬러 올라가는 수메르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이야기이다. 오늘날 고고학자들은 길가메시를 실존인물로 여긴다. 또한 설화에 나오는 지상낙원과 대홍수가 구약성서의 에덴동산이나 노아의 대홍수와 같은 뿌리라고 추측한다. 풍요의 여신 이슈타르는 영웅 길가메시를 유혹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체코 태생의 작곡가 보후슬라프 마르티누(Bohuslav Martinů, 1890-1959)는 신고전주의에 충실한 많은 곡을 썼다. 여섯 개의 교향곡을 포함한 작품 목록이 무려 384곡에 달하고 이는 현대 작곡가로는 매우 많은 수이다. 칸타타 <길가메시 서사시>도 만년 작품이다. 스트라빈스키의 <오이디푸스 왕>과 <페르세포네>, 아르튀르 오네게르의 <다윗 왕>을 잇는 고대 서사시인데, 선배들에 비해 길가메시라는 낯선 소재와 결합한 탓에 마르티누의 음악도 대중적인 호소력을 갖진 못했다.

정 듣고 싶다면 홍보 영상으로...
바빌로니아에서 뜯어온 이슈타르의 문

그러나 이 아름다운 문 앞에서 음악없이 나가긴 아쉽다. 문을 만든 네부카드네사르 왕은 이스라엘을 복속시키고 그곳으로부터 네 귀족 젊은이를 인질로 데려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뒷날 예언자로 불리는 다니엘이다. 어느날 이상한 꿈을 꾼 왕은 해몽할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요행으로 꿈풀이하는 것을 막기 위해 꿈의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다. 왕이 무엇을 꿈꿨는지 알 사람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다니엘뿐이었다. 그 내용은 대략 머리와 사지가 금과 은, 놋쇠와 철로 된 우상이 있었는데, 사람이 손대지 않은 돌이 그 우상을 깨부수고 세상을 가득 채웠다는 것이었다. 쇠붙이로 된 우상은 바빌로니아 이후에 올 여러 제국들을 뜻하고, 손대지 않은 돌은 메시아의 탄생과 부활, 재림을 상징한다는 것이 다니엘의 해몽이었다. 자신의 제국이 영속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아무도 맞히지 못한 꿈의 내용을 알아낸 다니엘이기에 왕도 그를 어쩌지 못했다.


네부카드네사르의 아들 벨샤자르가 뒤를 이었을 때도 다니엘은 뜻풀이에 불려갔다. 왕의 잔치 중 벽에 나타난 황금 글씨를 풀이하라는 것인데, 다니엘은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솔직히 답했고, 그날 밤 그리 되었다. 렘브란트의 그림으로 유명한 이 이야기는 헨델도 오라토리오 <벨샤자르>로 만들었다.

꽃길을 걷는 사자들

다니엘을 얻은 세 번째 이교도 왕은 메디아의 다리우스라 전한다. 이는 헤로도토스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을 설화화한 것이라 추측한다. 다리우스는 다니엘을 중용하지만 그를 시기하는 자들은 그가 왕이 아닌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섬긴다고 모함한다. 미리 정한 국법에 따라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진다. 다니엘을 아끼는 마음의 왕이 다음날 사자굴에 달려갔지만, 그는 하느님의 보살핌으로 멀쩡했다. 대신 사자들은 다니엘을 모함한 자들로 배를 채웠다.

방탕한 벨샤자르의 몰락을 예고하는 1막의 피날레. 중반 이후 헨델 특유의 푸가가 나오는데 윌리엄 크리스티는 템포를 느리게 가져간다

벨샤자르의 향연을 그린 헨델의 오라토리오도 좋지만 나를 가장 흥분시키는 다니엘 음악은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에 나오는 노래 ‘기적 중의 기적A Miracle of Miracles’이다. 여기서 많은 기적이 언급된다. 그 중 첫 번째가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살아난 것이다. 이어서 여리고의 성벽이 무너진 것, 모세가 파라오를 설득해 탈출하고 홍해를 가른 것,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 광야에 만나가 눈처럼 내린 것과 같은 이적과 기적이 이어지지만, 그 가운데 최고의 기적은 재봉사가 색시를 얻게 된 일이라는 것이다. 다니엘도 모세도 인정하고 축하해줬을 것이다.

원래는 자작나무가 가득한 숲을 깡총깡총 뛰면서 불러야 한다

카라얀과 <토스카>와 <파르지팔> 등을 녹음했던 옛 서독의 오페라단이다

이날 저녁 공연은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의 푸치니 <토스카>이다.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 코미셰 오페라와 더불어 독일 수도의 문화적 역량을 집약한 단체이다. 이번 시즌 이들이 공연하는 작품이 쉰 편이 넘는다. 매주 한 작품씩 올리는 셈이다. 그 중 열 편 가량은 새 연출이고, 나머지는 과거 연출작의 재연이다. 유럽의 오페라 극장은 이렇게 고정 레퍼토리에 계속해서 신작을 더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같은 프로덕션에서 불렀던 요나스 카우프만

이번 <토스카>도 1969년에 처음 제작된 프로덕션이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부르는 하르테로스나 역시 베토벤이나 프리드리히와 같은 시대 예술가를 연기한 테너 마르셀로 알바레스도 훌륭했지만, 청중의 압도적인 찬사는 악역 스카르피아를 부른 에르빈 슈로트에게 돌아갔다.

에르빈 슈로트가 부르는 <토스카> 1막 피날레 '크레도'

나는 극장에서 제안 받은 이튿날 공연,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를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보체크>야말로 베를린에서 초연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단을 여럿 가진 베를린이지만, 음악사에서 이 도시가 차지하는 비중은 사실 부끄러운 수준이다. 어떤 작품이 베를린에서, 베를린을 위해 작곡되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빈과 뮌헨, 밀라노나 상트페테르부르크 같은 경쟁 도시들에 비하면 언급할 것이 없다. 그러나 20세기 초, 표현주의 양식을 대표하는 오페라 <보체크>가 바로 베를린 국립 오페라에서 초연되었다. 베를린이야말로 거칠고 원색적인 현대의 모습을 투영한 표현주의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음악의 존재 이유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2018년 초연된 <보체크> 연출의 예고편

말러와 쇤베르크의 제자였던 알반 베르크는 19세기 전반을 살았던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의 <보이체크Woyzeck>를 대본으로 오페라를 썼다. 주인공의 이름이 보이체크에서 보체크로 바뀐 이유는 분명치 않다.

군인 보체크는 사회 밑바닥에서 허덕이는 인물이다. 그는 대위에게 멸시당하고 군의관의 실험 대상으로 이용당한다. 그와 아내 마리 사이에는 축복 받지 못한 아이가 있다. 그러나 허영심 많은 마리는 군대 고수장의 육체적인 매력에 끌려 아이와 보체크를 잊는다. 정신착란과 환영 속에 보체크는 자신을 희롱하는 마리를 칼로 찌른다. 홀로 남은 아이는 엄마가 죽었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채 다른 아이들과 함께 시신을 보러간다.

한해 뒤 쾰른에서 초연된 벨라 버르토크의 발레 <이상한 중국관리The Miraculous Mandarin>(여기서는 기적이라는 뜻이 아니다)처럼 현대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탐구한 베르크. 그 또한 그곳으로부터 희망이 솟아날 수 있다고 보았을까? 그렇다면 그 또한 ‘기적 중의 기적’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잃어버린 지평선 샹그릴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