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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Mar 03. 2020

뮤즈를 거느린 아폴론

스트라빈스키와 베토벤

가장 마지막에 오는 것을 알려면 앞선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조지 발란신이 안무한 <뮤즈를 거느린 아폴론>은 VAI가 내놓은 뉴욕 시티 발레단 몬트리올 공연 시리즈를 통해 전체를 볼 수 있다.

칼라도 많지만 이것으로 충분하다

콘서트홀 전성시대였던 20세기 전반까지, 피아노나 바이올린의 비르투오스 연주자들이 당대 협주곡을 들고 청중을 들었다 놨다 하던  시대가 저물고, 곧이어 막바지로 안무가가 역시 따끈따끈한 무용 음악을 처음 추어 보일 기회를 얻는 ‘극장의 황혼’이 도래한다.  발란신이나 스트라빈스키는 CBC TV가 방송한 이런 예술이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발란신은  행운아이다. 오늘날의 안무가는 노 저을 물(음악)이 없어 니진스키나 베자르가 이룬 업적과 힘겹게 경쟁하거나, 굳이 춤이 필요 없는 고전음악에 빌붙어 민폐를 끼치는 형국이다. 누구라고는 얘기하지 않고 그냥 보여주겠다.

독일 세금이지만 아깝다

발란신은 30여 분이나 되는 스트라빈스키의 긴 음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아폴론은 세 뮤즈에게 하프와 가면, 시를 주고 그녀들은 각자의 예술을 완성한다. 마침내 아폴론은 마치 트로이카처럼 그녀들을 몰고, 반대로 그녀들은 아폴론을 잡아끌어 ‘파르나소스 계단’을 오른다.                       

정지화면만 봐도 아름답다

이 줄거리는 낯설지 않다. 일찍이 30대 초의 베토벤은 발레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을 작곡했다.

오늘날은 거의 서곡만 연주되지만, 베토벤은 이 발레의 피날레를 <에로이카 교향곡> 마지막 악장으로 사용할 만큼 중요하게 생각했다.

프로메테우스와 만난 오르페우스

지나치게 학구적인 줄거리인 데다가 ‘춤을 추기에 너무 교향악적’(뒷날 <백조의 호수>를 작곡한 차이콥스키가 받게 되는 비판이다)인  탓에 19세기 초 빈의 사교계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무지를 몰아내고 예절과 풍습, 도덕을 전했다. 그의 힘으로 두 조각이 생명을 얻었고, 이들은 조화의 힘을 통해 생명에  대한 열망을 느꼈다. 프로메테우스는 이들을 파르나소스로 데려가 예술의 신 아폴론에게 가르침을 받게 한다. 아폴론은 이들에게 스승을  정해준다. 암피온, 아리온, 오르페우스는 음악을, 멜포메네는 비극을, 탈리아는 희극을, 테르프시코레와 판은 최신 목동의 춤을,  바쿠스는 그가 창시한 영웅의 춤을 가르쳤다.

스트라빈스키와 발란신이 그 일부만 가져다 쓰지 않았나! 내가 안무가라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놓고 발란신과 겨루느니, 당장 무주공산인 베토벤의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에 춤을 입히겠다.


그런데 벌써 있다! 프랑스 비아리츠의 티에리 말랑댕 발레단은 <창조물Les Créatures>이라는 발레에 이 음악과 베토벤 후기 걸작 합창곡 <고요한 바다와 행복한 항해Meeresstille und glückliche Fahrt>를 썼다.

비아리츠 발레단의 <창조>

최초의 인간을 무용수로 설정해 독무가 듀엣이 되고 다시 군무가 되며,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는 장면 등으로 형상화했다. 말랑댕의 피날레는 실망스럽다. 이것보다만 잘하면 내가 1등이다.

먼저 이 아름다운 음악에 춤이 필요한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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