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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Mar 15. 2020

옷이 매너를 만들다

스트라빈스키와 클레

루스카야 무지카: 가장 마지막에 오는 것을 알려면 앞선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피아노와 관악기를 위한 협주곡Concerto pour piano et instruments à vent>은 스트라빈스키의 서명과도 같은 곡이다. 첫 악장은 명백히 <풀치넬라>와 <병사 이야기>의 선율로 채웠다. 이탈리아와 러시아를 오간 자신의 이력을 요약한 듯하다.

보리스와 친구들

두 번째 악장의 전반부는 아마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후기 낭만주의를 동경하는 듯한 분위기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늪에 빠진 발을 끌어내려 안간힘 쓰다가 후반부엔 길 잃은 쓸쓸한 조성을 맴돌며 다음 악장으로 넘어간다.

맙소사, 폴리니의 2악장 연주

 3악장은 바흐를 연주하는 피아노와 그를 유혹하는 관악기 사이의 갈등이다.

아시케나지와 무스토넨의 3악장

이 모든 것이 대서양 횡단 여객선에서 태어나 배에서 생을 마친 피아니스트의 얘기를 그린 알레산드로 바리코Alessandro Baricco의 <노베첸토Novecento>와 같다.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Giuseppe Tornatore이 영화로도 만든 이 이야기에서 피아니스트는 공간으로나 시간으로나 어느 세상에도 속하지 못했기에 결국 폐선과 운명을 같이 하는 쪽을 택하지만, 스트라빈스키의 피아니스트는 아마도 장고 끝에, 어쩌면 마지못한 척 친구 따라 허둥지둥 하선하는 것처럼 들린다.

명화 <The Legend of 1900>

그런 면에서 스티븐 오스본Steven Osborne이 피아노를 치고, 일란 볼코프Ilan Volkov가 지휘하는 BBC 스코티시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하이피리언의 음반 커버는 최고의 선택이다.

유튜브는 스트라빈스키가 편곡한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로 시작한다

파울 클레가 그린 <세네치오Senecio>는 바젤 쿤스트 무제움이 소장 중이다. 그림에는 ‘초로初老baldgreis’라는 부제가 붙었다. 세네치오는 광대 아를레키노Arlecchino(영어로는 할리퀸Harlequin)의 이름이다. 풀치넬라의 친구인 늘그막 광대의 얼굴을 그리며, 클레는 그의 알록달록한 의상을 얼굴로까지 확대했다. 옷이 매너를 만든 것이다. 

덴마크 티볼리 극장의 아를레키노

스트라빈스키가 겪은 이력이 곧 그의 예술로 거듭났다고 해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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