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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Mar 17. 2020

난봉꾼의 행각

윌리엄 호가스에서 데이비드 호크니까지

루스카야 무지카: 가장 마지막에 오는 것을 알려면 앞선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스트라빈스키는 1947년 시카고 미술 재단을 찾았을 때 18세기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가 그린 <어느 난봉꾼의 행각A Rake’s Progress>이라는 연작을 보았다. 그림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1. 상속인: 구두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톰 레이크웰Tom Rakewell은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는다. 그가 장례에 참석할 옷을 맞추는 방안은 어느 곳이나 엄청난 재산을 보여준다. 젊은 새라 영과 어머니가 찾아왔다. 톰은 새라와 결혼하기로 했지만, 지금은 돈을 줘 내쫓으려 한다.

2. 접견: 탕아가 접견실에 나타난다. 그 주위에 춤, 펜싱, 음악, 격투기, 조경 등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몰려든다.

3. 주연(酒宴): 술에 취한 탕아는 코번트가든 장미 여관 매춘부들과 아침부터 놀아난다.

4. 체포: 재산을 탕진한 탕아는 빚에 쫓겨 성 제임스 거리에서 체포되기 직전이다. 새라 영은 뜻하지 않게 얼마 안 되는 자신의 저금으로 그를 돕는다.

5. 결혼: 탕아는 재산을 만회하고자 나이 많은 외눈 부자 과부와 결혼한다. 팔에 톰의 아이를 안은 새라 영이 결혼식을 막으려고 교회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6. 도박장(성 제임스 거리, 화이트 클럽): 톰은 도박으로 또 재산을 날린다.

7. 감옥: 탕아는 빚을 갚지 못해 플리트 교도소에 수감된다. 아내는 그를 조롱하지만, 아이를 데려온 새라 영은 기절한다.

8. 정신병원: 탕아는 베들램으로 이송된다. 아직도 그에게 충실한 새라 영이 찾아와 그를 위해 눈물 흘린다.  


나는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19세기 풍자화가 파벨 페도토프Pavel Fedotov의 그림을 보고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태생의 페도토프는 ‘러시아의 호가스’라 불린 사람이다. 사랑 없이 재산과 신분을 놓고 흥정하는 결혼 세태야말로 러시아의 뿌리 깊은 문젯거리였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바로 나이든 남편과 사이에 권태감 때문에 젊은 브론스키에게 끌린 전형이지 않은가! 스트라빈스키가 본 호가스는 다시 한번 그를 자연스럽게 가장 러시아다운 소재로 이끈 것이다. 

쉽지 않은 청혼

당연히 이 풍자적인 연작 회화가 마음에 든 스트라빈스키는 그것을 오페라 대본으로 옮겨 줄 작가를 찾았다. 그는 이웃 친구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에게 조언을 구했고, 헉슬리는 젊은 작가 위스턴 휴 오든Wystan Hugh Auden을 추천했다.


오든이 쓴 대본은 원작 그림 내용과는 다소 달랐다. 톰 레이크웰과 마찬가지로 다른 등장인물 이름도 모두 비유적으로 바꿨다.

1막
톰 레이크웰은 약혼녀 앤 트루러브를 집 밖으로 부른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결혼이 못 미더워 톰에게 일자리를 주선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거절하고 “기지로 살고 운을 믿겠다”라는 뜻을 노래한다. 톰이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하고 있을 때 닉 섀도가 나타나, 그가 모르고 있던 숙부가 죽으며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고 말한다. 섀도는 톰에게 자신을 하인으로 고용하고 함께 런던으로 가 유산을 상속받자고 제안한다. 그는 앤과 사랑을 약속하며 런던으로 향한다.

2장은 마더 구스의 사창가에서 시작한다. 이곳에서 섀도는 새 주인에게 런던 생활의 번지르르한 면을 보여 준다. 그리나 톰은 마음이 편치 않고 사랑을 배신한 자신을 한탄한다. 그런 그에게 마더 구스가 자기와 밤을 지내자고 유혹한다. 그 사이 고향의 앤은 톰의 소식이 궁금하다. 그녀는 그를 찾아 나선다.

2막
톰은 방탕한 삶에 싫증을 느낀다. 그가 행복을 갈망하자 이번에도 닉이 제안한다. 수염 난 터키 여인 바바와 결혼하면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꾄다. 곧이어 앤은 톰의 런던 집을 찾아낸다. 그러나 그녀가 본 것은 막 결혼한 바바와 마차에서 내리려는 톰의 모습이었다. 톰은 앤에게 떠나 달라고 얘기하지만 돌이키지 못할 실수에 후회한다. 점차 톰은 자신의 괴상한 결혼 생활을 참을 수 없게 된다. 바바는 성질 더러운 수다쟁이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 얼굴에 가발을 씌워 입을 틀어막고는 잠에 빠진다. 괴상한 꿈에서 깨어난 그는 닉이 돌을 빵으로 만드는 획기적인 기계를 가지고, 꿈을 현실로 만드는 모습을 보게 된다. 닉은 이 기계가 대량 생산되면 톰이 인류의 구세주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톰은 그와 같은 선행으로 앤에게 사죄해야겠다고 생각한다.

3막
그러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3막은 파산한 톰의 재산을 경매 붙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경매 품목에는 가발로 침묵하게 된 이래 움직이지 않는 바바도 포함되어 있다. 가발을 벗기자 그녀는 자기 물건들이 팔려나가는 것을 보고 화를 내기 시작하나 앤이 들어오자 조용해진다. 바바는 생각과 달리 앤에게 톰을 찾아 제자리로 돌려놓으라고 충고하고는 자신이 원래 있던 시장 바닥으로 돌아간다.

공동묘지에서 닉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톰에게 1년하고 하루를 일한 대가로 그의 영혼을 요구한다. 자정이 되자 닉은 그에게 벗어날 기회를 주겠다며 카드놀이를 제안한다. 톰은 할 수 없이 응하나 앤을 생각한 덕에 승리한다. 패한 닉은 무덤으로 들어가며 톰이 미치광이가 되도록 저주를 한다.

미쳐 정신병원으로 간 톰은 자신이 아도니스라고 생각한다. 그가 비너스라 믿는 앤이 찾아와 자장가를 불러 주고는 조용히 떠난다. 그녀가 가버린 것을 안 그는 숨을 거둔다. 에필로그에서 다섯 등장인물은 각자의 교훈을 얘기한다. 일동이 악마는 아담과 이브 이래, 할 일을 해왔다고 노래하며 막이 내린다.

바이올리니스트 나탄 밀스타인은 그가 신뢰하는 지휘자 이자이 도브로벤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셈 빠른 스트라빈스키가 원래 라 스칼라를 위해 쓴 오페라를 라 페니체에 준 내력을 적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원래 라 스칼라에서 7천 달러를 받기로 하고 작곡을 시작했는데, 중간에 친구 니콜라스 나보코프가 끼어들어 베네치아와 재협상해 2만 달러를 받아냈다. 심지어 나보코프는 작곡료가 아닌 지휘자 출연료를 받도록 계약하게 해서 대본작가 오든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해묵은 스트라빈스키의 인색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공연에 라 페니체도, 라 스칼라도 모두 참여했고, 오든도 스트라빈스키를 계속 존경했으니 악마의 수완이지 않은가!

CIA를 위해 일했던 것으로 알려진 니콜라스 나보코프

내게 흥미로운 것은 니콜라스 나보코프라는 인물이다. 『롤리타』를 쓴 블라디미르의 사촌인 그 또한 작곡가였다. 오늘날 나보코프가 쓴 음악을 들을 방법은 없지만, 그는 1971년 셰익스피어 원작 『사랑의 헛수고Love’s Labour’s Lost』를 역시 오든과 콜먼 대본의 오페라로 작곡해 1972년 초연했다. 나보코프는 할리우드에서 스트라빈스키, 토마스 만과 어울렸고, 그 무렵 토마스 만은 대작 『파우스트 박사』를 통해 예술가와 마성의 교류를 소재로 삼았다. 소설에서 인간의 본성인 사랑에 냉담해 가는 주인공이 작곡하는 오페라가 <사랑의 헛수고>였다.

나는 1951년에 작곡된 노래(아래 참고) 가운데 1막 1장 끝에 앤이 부르는 ‘I go to him’을 제일 좋아한다.

헛바람 난 애인을 꼭 되돌리고 말겠다는 시골 처녀의 당찬 출사표는 언제 들어도 열열한 응원을 보내게 한다. 가서 꼭 혼쭐을 내주라고! 그럴 자신이 없는 소프라노는 아예 시도를 말아야 한다. 슈트라우스 전문가인 슈바르츠코프가  베네치아 초연에서 이 노래를 어떻게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스트라빈스키가 지휘한 컬럼비아 음반에서 노래한 주디스 래스킨Judith Raskin은 그 뒤로 많은 후배 앤의 모범이 되었다. 바버라 해니건Barbara Hannigan은 오늘날 21세기 음악의 제사장처럼 군림한다. 그녀는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에서 루트비히 악단을 직접 지휘하며 이 곡을 노래했다. 슈바르츠코프는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5:20 정도부터 시작이다

오늘날 오페라 <난봉꾼의 행각>은 구할 수 있는 영상물이 대여섯 종에 이를 정도로 스트라빈스키의 여느 발레보다 훨씬 인기가 많다. 그 가운데 1975년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가 연출한 글라인드본Glyndebourne 공연이 가장 눈에 띈다.

펠리시티 롯이 앤을 불렀다

호크니는 2019년 서울 시립미술관 전시에 넉 달 동안 30만 명이 다녀갔을 정도로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영국 화가이다. 선명한 색채와 동화와 같은 이미지 덕분이다. 호크니의 글라인드본 무대는 정말 모차르트의 <코지 판 투테>에 한 번 더 쓰고 싶을 만큼 세련되었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Bernard Haitink가 지휘하고 소프라노 펠리시티 롯Feliscity Lott, 테너 리오 고키Leo Goeke, 베이스 새뮤얼 레이미Samuel Ramey가 열연한 이 공연의 유일한 아쉬움은 낡은 화질이었다. 


1996년에 잘츠부르크 축제 영상이 더해졌다. 역시 성악은 쟁쟁했다. 앤 트루러브를 던 업쇼Dawn Upshaw가, 톰 레이크웰은 제리 해들리Jerry Hadley가 불렀다. 두 사람 모두 번스타인으로 최적화되는 미국 명창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외르크 이멘도르프Jörg Immendorff의 무대 연출과 의상이었다. 이멘도르프는 백남준의 동료였던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의 제자이며, 독일 신표현주의 운동에 앞장선 젊은 야수들Junge Wilde의 일원이었다. 쉽게 말해 과격한 전위파였다.

유튜버 이름이 "앤 트루러브"이다 ㅋㅋ

그의 무대는 아방가르드 취향의 잘츠부르크 관계자들은 만족시켰을지 모르지만, 신고전주의자인 나는 짐짓 실망했다. 장담하건대 스트라빈스키나 초연에서 앤을 부른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같은 음악가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로베르 르파주 연출의 2007년 벨기에 라모네 극장 실황이 발매된 것이다. 태양의 서커스가 그를 초대한 직후였기에 더욱 화제를 모았다. 르파주는 스트라빈스키가 앙드레 지드와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를 공연할 때 가졌던 생각을 충실하게 계승했다. 곧 시대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얘기대로라면 라모네 극장의 배역은 스트라빈스키가 곡을 쓴 20세기 중반의 옷을 입는 것이 맞는다. 1990년대 옷을 입힌 잘츠부르크팀은 너무 멀리 간 것이다. 제임스 딘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자이언트Giant>와 같은 텍사스 무대와 의상은 제대로 먹혔다. 닉 셰도는 1막에선 유전(油田)을 뚫다가 등장하고, 당대 브로드웨이, 아니 할리우드 풍으로 꾸민 바바의 사창가 장면에서는 크레인에 앉아 영화를 찍는 감독이 된다.

로베르 르파주 연출을 공동 제작한 런던 로열 오페라의 예고편
악마의 인형극장

오픈카를 몰고 톰을 찾아가는 앤은, 톰과 바바가 주연한 영화가 개봉하는 극장에 들이닥친다. 돌을 빵으로 바꾸는 악마의 기계는 TV이다. 3막의 경매는 스트라빈스키 부부가 로버트 레드퍼드Robert Redford의 손님으로 등장할 것 같은 풀빌라에서 진행된다. 이렇게 <자이안트>에서 시작한 르파주의 공간은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를 지나 밀로시 포르만의 <뻐꾸기 둥지로 날아간 새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로 마무리된다. 르파주의 해석이 얼마나 절묘한지 때로는 이것이 정말 오든과 칼먼의 대본인가 생각이 들 정도이다. 다만 아쉽게도 라모네 극장 성악가들은 훨씬 생소한 이름이고, 일본 지휘자 오노 가주시(大野和士)도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다. 라모네와 공동제작한 런던 로열 오페라나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공연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돌아온 호크니

마침내 2010년 글라인드본 오페라가 호크니 연출을 리메이크했다. 1975년의 열악한 영상이 마치 먼지를 벗긴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처럼 선명하게 돌아온 것이다. 3막 경매장 장면이 압권이다. 톰의 재산 경매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얼굴에 회칠하고 흑백 의상을 입었다. 이때 금발의 앤이 파란색 드레스를 검은 망토로 가리고 등장한다. 붉은 머리 경매사는 연두색 스타킹을 신었고, 보라색 가발을 쓴 바바는 색동의상이다. 스트라빈스키의 총천연색 음악에 어울리는 무대이다. 호크니는 21세기의 박스트요, 피카소라 할 만했다. 글라인드본의 성악가 중에 특히 눈에 띄는 사람은 앤을 부른 미아 페르손Miah Persson이다. 내가 이 스웨덴 소프라노를 처음 만난 작품이 모차르트의 <코지 판 투테>였으니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뭣이 중헌지 아는 유튜버가 불법으로 올린 페르손의 노래: 안 나올지도 모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마치 댜길레프인 양 끌고 가는 지휘자는 모스크바 태생으로 런던에서 활동한 지 오래인 블라디미르 유롭스키Vladimir Jurowski이다. 더 이상의 참신한 무대를 기대할 수 있을까?

갑자기 미션 임파서블: 로그 네이션

사이먼과 제라드 맥버니Simon&Gerard McBurney 형제는 2017년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을 놀라운 상상력으로 채웠다. 제라드는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 최신편에 나오는 배우이지만, 그보다 콩플리시테Théâtre de Complicité라는 극단 감독으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콩플리시테는 셰익스피어, 미하일 불가코프, 브루노 슐츠,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이 시대와 나라를 가리지 않은 작가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왔다. 작곡가인 동생 제라드와 연출을 나눠 맡은 사이먼의 <난봉꾼의 행각>은 21세기를 무대로 한다.

프랑스 공영 방송국은 유튜브에 전막을 올렸다. 내 시청료는 이쪽으로..

그러나 잘츠부르크의 이멘도르프처럼 격한 주장을 하지 않고, 독창적인 이미지와 기발한 발상으로 청중을 한눈팔게 하지 않는다. 닉 섀도가 아이폰으로 톰의 사진을 찍어 주면 곧바로 뒷면 벽에 사진이 전송되는 식이다.

이곳은 신천지군!

이들은 확실히 오늘날 축제 관중이 스트라빈스키 애호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가장 중요한 에필로그가 나오기 전에, 지친 청중은 곡이 끝난 줄 알고 박수와 환호를 그치지 않는다. 차이콥스키의 <비창 교향곡> 3악장이 끝났을 때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들을 멈추고 곧바로 에필로그를 시작하는 대신 충분히 여유를 준 뒤에 앞쪽으로 걸어 나와 다시 노래를 시작한다.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키며 난봉꾼의 여정을 마치는 순간, 이들은 가장 중요한 부분을 들었음을 알아차린다.

모두 함께 노래하세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달과 태양 아래서는
이 격언이 사실이었지
아담과 이브 이래로    

손과 마음 생각이
게으름 피우고 있으면
악마는 할 일을 발견한다네
선생님, 사모님
여러분 그리고 여러분에게!
역시 중요한 뭣을 아는 네덜란드 국립 오페라, 엑상프로방스와 같은 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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