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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Mar 18. 2020

시대의 소음 The Noise of Time

줄리언 반스의 소설을 읽고

2017년 6월에 쓴 글인데, 필요해서 다시 가져왔다

     

나는 소비에트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삶을 토대로 한 줄리언 반스의 신작 『시대의 소음』을 읽기 직전에 토마스 『마의 산』에 두 번째로 올랐다. 20대에 처음 읽었을 때 30퍼센트 정도 이해를 했다면 이번에는 70퍼센트, 후하게 주어 80퍼센트 정도 정상에 다가갔다고 생각한다. 알프스를 오른 듯한 기분으로 반스의 『시대의 소음』을 시작했지만 『마의 산』보다 더 읽기 어려웠다. 실존 인물들(종종 이름이나 성만으로 언급된다)에 대한 별다른 설명도 없이 그때그때의 단상을 마치 다큐멘터리 영상과 같이 ‘편집’했기 때문이다. 만일 솔로몬 볼코프의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을 전에 읽지 않았더라면 솔직히 따라가기 어려웠을 것이다(『증언』의 지난한 출판과정과 복잡한 수용사는 이 리뷰와 한 데에서 다루기엔 너무도 중요하고 방대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대의 소음』을 통해 쇼스타코비치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할 수 있었기에 완독한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주위에 이 책을 권해야 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하루아침에 좋아질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나 같은 음악 애호가보다는, 영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 반스의 전작을 읽은 문학 전문가의 시각이 궁금하다. 작가는 『시대의 소음』을 세 장으로 구성했다. 각 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가 아는 것은 그때가 최악의 시기였다는 것뿐이다.”
“그가 아는 것은 지금이 최악의 시기였다는 것뿐이다.”
“그가 아는 것은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나쁜 최악의 시기였다는 것뿐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옭맸던 최악의 시기를 차례로 요약한 것이다. 첫 번째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초연에 얽힌 이야기이다. 그는 30대에 쓴 이 야심 찬 오페라로 스탈린 정권의 뭇매를 맞는다.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는 《프라우다》의 비판은 단박에 그를 소련 최고의 작곡가에서 당장 숙청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사이비로 만들어 버렸다. 살기 위해 잔뜩 웅크릴 수밖에 없던 시절 이야기이다.


두 번째 최악의 시기는 체제 선전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이다. 그는 그곳에서 평생 존경하던 스트라빈스키를 ‘알현’했다. 그러나 혁명 이전에 고국을 등진 이 선배는 쇼스타코비치를 공산당 끄나풀 취급했다. 스트라빈스키가, 자신을 존경하는 후배의 고뇌를 조금이라도 헤아렸더라면 그런 태도는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쇼스타코비치 또한 KGB 눈치를 보며 스트라빈스키를 ‘인민의 적’이라 얘기하고 말았다.


역시 선전을 위해 흐루쇼프는 만년의 스트라빈스키를 고국에 초대했다. 자신의 영달 외에는 별 관심 없는 작곡가가 ‘옛 영지’를 돌아보고 간 것과 매한가지인 보여 주기 행사가 쇼스타코비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 것이다. 그가 사랑한 <페트루시카>와 <결혼>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였기에 상실감은 더욱 컸다.


마지막 ‘최악’은 쇼스타코비치의 공산당 입당이다. 흐루쇼프 시대가 스탈린 시대보다 나았을까? 쇼스타코비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소련이 가장 자랑하는 작곡가로 인정받았지만, 전체주의 국가에서 그런 대접을 받으려면 마땅한 자리가 필요했다. 작곡가 연맹 회장은 당적을 가져야만 했다. 작곡가가 음악으로 평가받으면 그만이지, 알량한 어용 직함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렵게 읽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세 가지 ‘최악의 시기’를 좀더 실감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해설을 더한다.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둘러싼 이야기를 알아야 첫 장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원작은 니콜라이 레스코프가 쓴 소설이다. 레스코프는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잇는 대가였다. 쇼스타코비치는 통렬하게 풍자적인 소설을 완벽하게 음악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이 오페라가 오랫동안 공산당의 표적이 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찍부터 쇼스타코비치를 장벽 내 반체제 인사로 추앙한 서방에서도 이 오페라를 본격적으로 상연한 것은 금세기에 들어서부터이다. 암스테르담, 바르셀로나, 뮌헨 등지의 격렬한 무대가 호평을 끌었다. 아래는 키릴 페트렌코의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하이라이트이다.

이 글을 쓰면서 레스코프의 원작이 얼마 전 영화로 나왔음을 알게 되었다. 소담 출판사가 번역한 유일한 국내 번역본(<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으로 출판)이 최근 복간될 때 표지에 넣은 사진이 바로 이 영화 포스터이다. 문학과 오페라, 영화, 이렇게 다양한 장르가 지속적으로 재해석되고 충돌할 때 작품은 빛을 얻는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현재 문화의 최첨단에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적어도 줄리언 반스가 뿌리내린 문화의 토양에서는 말이다. 오페라는커녕 영화라도 국내 개봉이 되었으면 좋겠다.

늦게나마 개봉했다

스트라빈스키의 삶과 음악을 모르고 『시대의 소음』의 두 번째 장을 읽는 것이 얼마나 피상적일까? 그러나 그의 음악이 쉽지 않다는 국내의 선입견은 정말이지 난공불락이다. 내가 쓴 그의 평전(을유문화사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 17)은 12년째 초판이 팔리고 있다. 스트라빈스키를 전혀 모르는, 또는 높은 진입장벽이 있을 거라 지레짐작하는 분에게 딱 45초짜리 음악을 하나 소개한다.

손씻을 때 1절만 들으면 되겠다

<축하 전주곡>은 친구인 지휘자 피에르 몽퇴의 80세를 기념해 쓴 곡이다. 이른바 ‘신고전주의’라 불리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대부분은 이런 식이다. 형식주의, 부르주아 음악,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라는 말들이 얼마나 공허한가. 음악은 말을 뛰어넘는다.


마지막으로, 쇼스타코비치의 공산당 입당을 다룬 세 번째 장은 내가 처한 지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이자 지구상에서 가장 양극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가 만년에 처한 사항을 우리 잣대로 재단한다면, 단지 음악으로 평가받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그에게 또 다른 상처를 입힐 위험이 짙다. 나는 지난 20여 년 동안 클래식 음악을 소개하는 일을 해왔지만 바로 그 때문에 제일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이 쇼스타코비치 음악이다.

쇼스타코비치의 굴곡 많은 삶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봐야 할 것은 역시 회고록 『증언』이다. 국내에 여러 차례 소개되었고, 이를 토대로 토니 파머 감독이 영화(1988)도 만들었다. 영화 <간디>와 <신들러 리스트>로 유명한 벤 킹슬리가 작곡가로 등장한다.

과문한 탓에 아직 줄리언 반스의 다른 작품을 읽지 못했다. 그러니 『시대의 소음』을 통해 그를 평가하는 것은 내게 주제넘은 일이다. 이런 음악 소설이 읽히는 탄탄한 저변이 부러울 뿐이다. 『증언』의 진위가 끝없이 논의되고, 레스코프가 영화로 나오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과 오페라가 시즌마다 연주되는 곳에서 가능한 문학이 아닐까? 아쉽게도 『시대의 소음』의 번역자나 출판사는 우리와 저쪽의 차이를 메우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만든 자료를 하나 링크한다. 쇼스타코비치가 자기 이름 머리글자로 만든 음악을 걸작 회화 속 화가 자신의 모습과 나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그를 이데올로기로부터 떼어놓는 것이다. 음악을 듣고 정치를 생각해도 늦지 않는다.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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