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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Mar 19. 2020

웃픈 귀향

스트라빈스키와 쇼스타코비치의 경우

루스카야 무지카: 가장 마지막에 오는 것을 알려면 앞선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소련 작곡가 연맹 사무총장 티혼 흐렌니코프Tikhon Khrennikov는 1961년 6월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열린 국제 음악제에 대표단을 이끌고 참가했다. 그는 이듬해 여든 살에 되는 스트라빈스키에게 모국을 방문해 자신의 음악을 직접 지휘해 달라고 얘기했다. 처음에 스트라빈스키는 곧이듣지 않았지만, 이들은 분장실까지 쫓아와서 초대 의사를 재차 확인했다. 스트라빈스키는 즉답을 피했고 내심 고민한다. 그의 친구 일부는 절대 가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또 다른 친구들은 소련의 정치적 자유화 분위기로 미루어 가도 좋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거짓말처럼 당시 소련에서는 그의 음악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마침내 스트라빈스키는 소련을 방문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그는 자신이 향수를 달래기 위해 고국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젊은 음악가들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기 위해 소련을 찾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스스로 소련에서 가장 매도된 작곡가라 생각했지만, 과거의 유감만 내세운다면 젊은 음악가들에게 희망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62년 9월 21일 파리를 출발한 투폴레프 여객기가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도착했다. 검은색 선글라스에 지팡이를 짚은 스트라빈스키가 승강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실로 48년 만에 다시 밟는 고향 땅이었다.

마리아 유디나가 연주하는 '라크리모사'. 소련식 발음은 동국대 연영과 교수님과 같은 유지나이다.

흐렌니코프와 카라예프, 그리고 저명한 피아니스트 마리아 유디나Maria Yudina가 영접 나왔다. 레닌그라드에서 온 유디나의 조카 크세니아 유리에브나Xenia Yurievna는 옛날 스트라빈스키 가족이 살던 아파트 옆집에 살았다. 시인 발몬트의 딸도 보였다. 소련 당국이 ‘돌아온 탕아’를 위해 준비한 세심한 배려였다. 스트라빈스키 내외와 로버트 크래프트는 내셔널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튿날 러시아 국립 오케스트라의 리허설이 있었다. 사실 그가 러시아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악단 스타일과 악기 음색은 익숙한 서방과 꽤 달랐다. 한마디로 열악했다.

발란신이 안무한 프로코피예프의 <돌아온 탕아> 중 1/4

리허설과 더불어 모스크바 시내 곳곳을 관광했다. 성 바실리 성당, 크렘린 궁전, 참새 언덕, 노보데비치 수도원을 다녔고, 9월 23일에는 볼쇼이에서 <보리스 고두노프>를, 다음날은 말리 극장Maly Theatre에서 미하일 레르몬토프Mikhail Lermontov의 <가면무도회Masquerade>를 관람했다.

마린스키 신관 개관 공연 가운데

9월 25일 크렘린에서 서기장 흐루쇼프를 비롯한 당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레닌그라드 말리 오페라 극장 발레단이 <페트루시카>, <오르페우스>, <불새>를 상연했다. 그 가운데 <불새>가 가장 뛰어났다. 이튿날 차이콥스키 홀에서 스트라빈스키가 <찬가Ode>와 <오르페우스>를, 로버트 크래프트가 <봄의 제전>을 지휘했다. 이때 앙코르로 스트라빈스키는 직접 편곡한 <볼가강 배 끄는 인부들의 노래>를 연주했다. 감동적인 무대였다.

제정 러시아 최대의 가문 가운데 하나인 유수포프의 모스크바 영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전에선 라스푸틴이 살해되었다

9월 27일은 유수포프Yusupov 가문의 아르한겔스크 궁전Arkhangelskoye Palace을 구경했고, 저녁에는 프로코피예프의 <전쟁과 평화>를 보았다. 이튿날은 아르바트Arbat의 스크랴빈 박물관을 보았고, 저녁에는 이틀 전과 같은 프로그램의 음악회를 열었다. 휴식 시간에 스트라빈스키는 메스꺼움을 느껴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혈압이 떨어졌으니 지휘를 하지 말라고 했지만, 화가 난 스트라빈스키는 브랜디와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무대로 돌아가 공연을 마쳤다. 민간요법이 어설픈 소련 의학에 승리한 것처럼 비치지만, 크래프트가 말하는 실상은 이랬다. “스트라빈스키는 공연 전에 아편 진통제 열 방울을 삼킨 뒤 위스키 두 잔을 털어 넣었다.” 알코올은 혈압을 떨어트리고 카페인은 혈압을 올리는 것이 상식이다. 어쨌거나 브랜디까지 더했으니 스트라빈스키는 무소륵스키나 글라주노프처럼 거나한 채로 지휘한 것이다. 의술의 신 아폴론과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음악을 위해 절묘한 타협을 이룬 결과였다.


스트라빈스키의 건강 소식은 곧 세계로 알려졌지만, 이틀 뒤엔 정상을 회복했다. 10월 1일 미국 대사관 오찬에는 소련 문화부 장관 예카테리나 푸르체바Yekaterina Furtseva를 비롯해 흐렌니코프와 카라예프, 그리고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아람 하차투리안Aram Khachaturian이 참석했다.


10월 2일 모스크바 필하모닉은 크래프트의 지휘, 타티아나 니콜라예바Tatiana Nikolayeva의 피아노로 <카프리치오>를 연주했다. 4일에 일행은 드디어 레닌그라드, 곧 옛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날아갔다. 이곳의 환영식은 모스크바보다 훨씬 단출했다. 환영단 중에는 댜길레프의 조카, 리투아니아 대표 화가로 스트라빈스키가 좋아해 작품을 샀던 추를리오니스Mikalojus Konstantinas Čiurlionis의 딸, <나이팅게일>의 대본을 쓴 스테판 미투소프의 친척 등이 있었다.

리투아니아의 숨은 거장, 추를리오니스의 <천사>(1908)

그러나 가장 감격스러운 만남이 기다렸다.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던 블라디미르 림스키코르사코프였다. “이고르 표도로비치!” 하고 부르며 다가온 사람을 스트라빈스키는 알아보지 못했다. 원래 림스키코르사코프 집에서는 스트라빈스키를 ‘구이마’라는 별명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둘은 뜨겁게 포옹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블라디미르는 반세기 전 스트라빈스키가 <불새>를 쓰던 아파트에 살았다. 일행은 예브로파이스키 호텔Yevropaisky Hotel에 여장을 풀었고, 저녁에는 알렉산드린스키 극장Alexandrinsky Theatre에서 톨스토이의 <살아난 시체Zhivoi trup>를 관람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 가족과 함께 한 스트라빈스키

10월 5일 레닌그라드 작곡가 협회가 주최하는 리셉션에 참가한 뒤 에르미타주와 푸시킨 박물관 관광이 있었다. 로모노소프도 방문했다. 그가 태어난 오라니엔바움의 바뀐 이름이었다. 마리아 유디나가 주관한 스트라빈스키 전시회는 <8중주>와 <7중주> 같은 작품을 초연했고, 레닌그라드 라디오는 <병사 이야기>를 방송했다. 옛날 스트라빈스키의 아파트에 사는 크세니아 유리에브나는 일행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크래프트는 특히 그녀가 스트라빈스키 전시회에 내놓은 자료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많은 초상화 중에 스트라빈스키의 증조할아버지 이그나티에비치Ignatievich의 다게레오타이프Daguerreotype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111세를 살았는데, 집에 있으라는 의사의 말에 가족들이 대문을 잠그자 담장을 넘다가 넘어져 돌아갔다. 아버지 표도르 스트라빈스키가 홀로페르네스Holofernes나 스파라푸칠레Sparafucile로 분장한 사진도 있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스트라빈스키가 늙은 맹인 떠돌이 악사의 아코디언 연주를 받아 적는 모습의 사진이었다.

베끼는 데는 선수

7일에는 키로프 극장(현재 마린스키 극장)을 찾았다. 곧 있을 발란신과 뉴욕 시티 발레단의 러시아 공연을 안내하는 포스터에는 <아곤>이 보였다. 스트라빈스키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보이지 않는 도시 키테주와 성녀 페브로브냐 이야기>를 보길 원했지만, 당국이 마련한 것은 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바그너의 <로엔그린>이었다. 참석자에게는 의미 없는 밤이었다.


<보이지 않는 도시 키테주와 성녀 페브로브냐 이야기> 가운데 '케르제네츠 전투'

10월 8일 첫 레닌그라드 콘서트에서 스트라빈스키는 청중 앞에 섰다.     

69년 전에 어머니를 따라 저 구석에 앉았습니다. 나프라브니크가 지휘하는 차이콥스키 추모 음악회였습니다. 이제 제가 같은 홀에서 지휘합니다. 무척 행복합니다!     
바로 그 구석에서 찍은 유리 테미르카노프

스트라빈스키는 이날 “반은 차이콥스키(<요정의 입맞춤>)이고 반은 림스키코르사코프(<불꽃놀이>와 <불새>)인 작품”을 연주했다. 크래프트는 그보다 짧은 연설이 훨씬 감동적이었다고 기억한다.


9일 연주가 끝나고 밤열차 편으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크래프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가 역을 출발할 때 댜길레프, 톨스토이, 림스키코르사코프, 발몬트가 잠시 기차를 따라 배웅하는 듯했다. 마치 또 다른 시대를 따라잡으려는 것처럼.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의 마지막 환송 파티에 이어, 11일 일행은 크렘린으로 흐루쇼프를 예방했다. 서기장은 다음번 방문 때는 꼭 크림반도의 다차로 초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일행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80세를 맞은 스트라빈스키에게 고국 방문은 무척 큰 감명을 주었다. 그에게 러시아의 대지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인정받고 환영받고 연주한 것은 그에게 다른 어떤 경험보다 큰 의미로 다가왔다.

     

방문 전 자신의 러시아행이 향수를 달래려는 것이 아니라, 젊은 소련 작곡가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라고 밝혔지만, 결과는 전자에 가까웠다. 쇼스타코비치를 둘러싼 많은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솔로몬 볼코프의 입을 빌렸을 때는 그나마 온건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트라빈스키를 너무도 존경해, <페트루시카> 공연을 빠트리지 않고 찾았고, <결혼>의 레닌그라드 초연 때 제2 피아노를 연주한 것을 뿌듯해한다. <마브라>와 <병사 이야기>, <난봉꾼의 행각>을 예찬하고, <시편 교향곡>을 피아노 연탄 편곡해 학생들에게 들려줬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스트라빈스키와 나는 아주 이질적인 사람이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행성 출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맨부커 수상자인 영국 작가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가 2016년에 쓴 『시대의 소음The Noise of time』은 『증언』을 더욱 내면화한다. 반스는 볼코프에 더해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이 쓴 전기로 무장해 일인칭과 삼인칭 시점을 오가며 쇼스타코비치로 빙의(憑依)한다. 그(반스이자 쇼스타코비치)는 스트라빈스키의 소련 방문을 회고하며 분을 참지 못한다.     

스트라빈스키는 미국이라는 올림포스 꼭대기에 홀로 고고히 앉아서 예술가와 작가와 그들의 가족이 고국에서 쫓기고, 투옥되고, 추방당하고, 살해당하고 있을 때에도 무심하고 초연하게 자기만 챙기며 수십 년을 보냈다. 자유의 공기를 숨 쉬면서 그가 단 한 번이라도 공개적으로 항의의 말을 한 적이 있던가? 경멸할 만한 침묵이었다. 그는 스트라빈스키를 작곡가로 존경하는 만큼 사상가로서의 스트라빈스키는 경멸했다.     

두 사람의 어정쩡한 만남은 냉랭함 그 자체였다. 이쯤 되면 반스의 팬이나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은 선입견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쇼스타코비치가 자초한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1949년 소련의 체제 선전을 위해 뉴욕을 찾은 사절단의 대표였다. 그는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회견에서 소련 예술의 우월성을 찬양했고 스트라빈스키를 구제 불능의 탕아로 깎아내렸다. CIA와 줄이 닿은 니콜라스 나보코프는 매카시 청문회처럼 쇼스타코비치를 궁지에 몰았다. 볼코프나 반스가 보기에 나보코프는 빌라도였고, 쇼스타코비치는 순교한 것이었다. 쇼스타코비치가 뒷날 소련을 찾은 스트라빈스키로부터 따뜻한 화해의 손길을 원했다면 그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다. 우리는 그가 니진스키나 오든에게 한 태도를 봤지 않은가! 

니콜라이 게 <진실이 뭐냐?>

그러나 반스의 다른 책은 몰라도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아는 나로서는 스트라빈스키거나 쇼스타코비치거나 전혀 비난할 것이 없다. 쇼스타코비치의 열렬한 팬임을 자처하는 학구파 피아니스트 제러미 뎅크Jeremy Denk는 《뉴욕 타임스》 서평에서 정확히 지적했다.     

반스가 쇼스타코비치의 특별한 음악 업적에 관해 쓰는 어려운 일에서 한 발짝 비켜섰다. 응당 이해는 되지만 애석한 일이다.     

반면, 반스는 작가 후기를 이렇게 맺었다.     

내 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녀(엘리자베스 윌슨)의 책을 읽어주기 바란다.     

소설에 후기가 붙는 것도 낯설지만, 마지막 말은 치명적이다. 스스로 소설가임을 망각한 것인가? 나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 책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스트라빈스키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들어주기 바란다.     

음악이 없이 음악가와 그의 삶을 어디에 쓸 것인가? 석 달 뒤 《뉴욕 타임스》는 더욱 신랄한 비판을 실었다. 이번에는 『증언』부터 매우 회의적이었고, 최고의 스트라빈스키 권위자인 리처드 태러스킨이다.     

그는 소설가의 자유와 역사학자의 권위를 원했다. 그러나 둘 다 얻으려다 하나도 얻지 못 했다.     

이 글을 보고 스트라빈스키의 됨됨이를 저울질한 끝에 그래도 음악을 들어보기로 한 독자에게 도움이 될 얘기를 해야겠다. 많은 쇼스타코비치 팬이 그를 베토벤에 비유한다. 구태에 맞선 인간 승리의 표본이라는 것이다. 그 비유가 맞는다면 스트라빈스키는 모차르트에 가깝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베토벤은 말과 음악이 하나라고 말했지만, 분명 모차르트의 음악은 말을 넘어선다.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우열을 가리긴 힘들지만, 쇼스타코비치와 스트라빈스키 중에 택하라면 고민 없이 후자를 고르겠다.

제러미 뎅크가 연주하는 16세기 작곡가 질 뱅슈아의 <슬픈 기쁨>

마지막으로 ‘시대의 소음’은 반스가 처음 쓴 말이 아니라 쇼스타코비치가 존경했던 시인 오시프 만델스탐Osip Mandelstam의 산문집 제목이다. <난봉꾼의 행각>을 연출한 사이먼 맥버니는 2000년 자신의 극단 콩플리시테, 그리고 에머슨 사중주단과 함께 쇼스타코비치의 마지막 사중주과 만델스탐의 시를 가지고 <시대의 소음>을 공연했다. 반스의 책이 나오기 16년 전의 일이다. 

잘 보면 흘러감. 맥버니의 아내는 일본계 피아니스트 캐시 유가와이다. 맥버니는 줄리 테이머와 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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