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

단눈치오와 드뷔시의 신비극

by 정준호

후대 역사가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높이 사 그와 겨뤘던 막센티우스 황제를 보잘것 없이 그렸지만, 전차 경기장과 포로 로마노의 신전에서 비운의 황제를 기억할 수 있다. 특히 고대 시가지 포로 로마노의 바실리카는 막센티우스가 짓기 시작해 콘스탄티누스가 완성한 것이다. 전차장 풀밭에 누워 찬찬히 들어본다.

DSC01107.JPG 치르코 마시모 뒤로 포로 로마노의 막센티우스 바실리카가 보인다

레스피기가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배우고 온 것처럼 젊은 드뷔시도 러시아에 머물 당시 무소륵스키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드뷔시는 파리로 돌아와 <검투사Le Gladiateur>라는 제목의 칸타타를 써서 로마 대상 2위를 했고, 이듬해 다시 <돌아온 탕아L’Enfant Prodigue>로 1위를 해 로마 국비 장학생이 된다.

최고의 음반이다 (1-7 검투사 / 14-21 돌아온 탕아)

화살을 맞고도 죽지 않은 불굴의 세바스티아누스는 11세기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페스트를 이기는 수호성인으로 추앙되었다. 16세기 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가 병원으로 쓰던 알자스 성당 안에 세바스티아누스 상을 그린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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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 아니라 건장한 미남 장교가 헐벗은 채로 형을 당하는 모습은 그림 소재로 인기였다. 산드로 보티첼리와 일 소도마, 안드레아 만테냐의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가 특히 유명하다. 이 그림들은 동성애 욕망을 은밀히 내비친다.

Sodoma_003.jpg 이눔아가 소도마

19세기 말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시대에 세바스티아누스 성인의 순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이탈리아 데카당스 작가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였다. 파리에서 활동하던 단눈치오는 신비극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를 무대에 올릴 기획을 했다. 이다 루빈스타인이 주역 무용수를, 미하일 포킨이 안무를, 레온 박스트가 무대 디자인을 맡았다. 포킨과 박스트는 직전에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로 대성공을 거둔 러시아 발레단 콤비였다. 박스트는 그전에 러시아에서 루빈스타인과 <안티고네>와 <살로메>를 공연했다. 가장 중요한 작곡은 프랑스의 자존심 클로드 드뷔시 몫이었다. 이렇게 해서 오케스트라와 합창을 위한 드뷔시 음악에 낭송과 팬터마임, 무용을 곁들인 새 예술이 탄생했다. 다섯 악장의 부제와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05.jpg 마이클 빈이라고...

1. ‘백합의 정원’

기독교로 개종한 쌍둥이 형제 마르코와 마르첼리노는 체포되어 행정관 줄리오 안드로니코에게 끌려갔지만 이교도 신을 위해 제물 바치기를 거부한다. 기둥에 묶여 군중의 조롱을 받고 고문당했지만, 형제는 새로운 신앙의 이름으로 죽기를 원했다. 그때 황실 궁수 대장 세바스티아누스가 그들이 갈 천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순교가 얼마나 고귀한 행위인지 설교한다. 그의 손바닥에서 피가 그치지 않을 때 낯선 여인이 천으로 닦아주자 피가 멎는다. 형제의 부모가 호소했지만 형을 피할 수 없고, 부모도 자식을 따라 세례를 받는다. 세바스티아누스는 몇 가지 기적을 보인다. 눈먼 여인과 말 못 하는 여인을 고치고, 불에 달군 석탄 위를 상처 없이 걸으며 백합의 정원이라 말한다. 그가 하늘로 쏜 화살은 땅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천사들이 하느님을 찬양한다.


2. ‘마법의 방’

자신의 집에 온갖 우상을 모시던 행정관은 병이 낫지 않았다. 세바스티아누스는 모든 우상을 부숴야 한다고 말하고, 그리 했지만 여전히 주인의 병이 낫지 않았다. 집안에 별자리 점을 치는 내실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 방은 처녀자리를 상징하는 에리고네를 모셨다. 행정관은 방을 부수기를 주저했지만, 세바스티아누스는 단호했다. 노예들은 여전히 이교도적인 질문을 한다. 그리스도가 아름다운 모습인지, 어떤 제물을 좋아하는지, 어떤 기적을 행하는지 따위이다. 세바스티아누스는 죽음이야말로 새로운 삶의 전환점이며,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순교했음을 설교한다. 그때 한 여인이 타락천사로부터 받은 천이 가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1장에서 세바스티아누스를 닦아 주었던 천이다. 그녀가 천을 내놓고 쓰러지자, 별자리 내실 문이 열리고 에리고네가 성모 마리아로 변모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오이디푸스 왕>이나 미클로시 로자 <벤허>의 모델임에 분명하다

3. ‘이교도의 종교 재판’

황제 앞에 끌려간 세바스티아누스는 신앙을 버리라는 추궁을 받지만 듣지 않는다. 성인은 황제가 가장 흠모하는 아폴론을 모욕한다. 황제가 사제들에게 아폴론을 달래는 노래를 부르라 명하자, 성인은 입을 다물라 일갈한다. 불 같이 화가 난 황제가 그를 참수하려다 마음을 바꿔 하프로 아폴론을 찬양하라 한다. 하프를 부순 성인은 대신 ‘춤’(Tomorrow my dancing Day?)을 추겠다며, 방안의 모든 사람을 개종시키려 한다. 세바스티아누스의 춤을 본 이교도들은 비너스의 연인 아도니스를 떠올리고, 그리스도의 순교와 아도니스의 죽음을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춤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황제가 옥좌에서 일어나 그를 궁수의 신으로 추대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성인은 도리어 황제의 나라가 끝났다고 응수한다. 황제는 그를 죽이라 명하고, 사람들은 아도니스를 추모하는 노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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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상처 입은 월계수’

황혼 녘 아폴론의 월계수에 묶인 세바스티아누스. 황제는 그의 동료들에게 활로 쏘아 죽이라 명한다. 동료들이 성인을 구출하려 하지만 그는 순교를 원한다. 그는 “나는 죽지만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두 개의 환영을 본다. 하나는 그의 숨을 거두기 위해 오는 로마의 전차이고, 다른 하나는 어깨에 새끼양을 짊어진 선악 양치기이다. 마침내 동료들도 그에게 활시위를 당긴다. 미소를 띠며 죽어가는 세바스티아누스를 위해 아도니스 숭배자들이 노래한다. 화살이 관통해 죽은 그의 시신이 나무에서 내려질 때 별 하나가 반짝인다. “천국의 문이 세바스티아누스의 영혼에 열렸네.”

히치콕의 영화에서 버너드 허만이 한 것을 떠올려보라

5. ‘천국’

에필로그. 천국에 들어가는 세바스티아누스를 찬양한다.


이 막장이 블루레이까지 나왔지만 유튜브에도 다 올라왔다

1976년 영국 영화감독 데릭 자먼이 만든 영화는 지나치게 동성애 코드이다. 내 경우에는 시간 낭비였지만,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영화를 라틴어로 찍었다는 점이다. 스트라빈스키의 <오이디푸스 왕>을 참고했는가 보다.

이게 유일하게 볼 방법이다

체코 영화감독 페트르 바이글은 일찍부터 오페라를 영화로 더빙하는 작업을 해왔다. 1984년 TV용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는 시작부터 흥미롭다. 주인공은 현대 양궁 선수이다. 현대를 사는 그가 고대의 세바스티아누스로 변모하는 설정은 줄리 테이머의 <타이투스>나 레이프 파인즈의 <코리올라누스>에게 영향을 줬을 법하다. 배역도 호화롭다. 타이틀롤은 <터미네이터>와 <에일리언>에서 활약할 마이클 빈이다. <엑스칼리버>의 랜슬롯 니컬러스 클레이는 황제로 나온다. 단눈치오의 텍스트를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지만, 드뷔시의 음악은 적절하게 영상이 된다. 성인이 춤을 추는 불길이 백합으로 바뀌는 장면(32:00)에 음악은 최고이다. 세바스티아누스가 아도니스로 추앙받지만 유혹을 거부하는 장면(50:00)도 제대로이다. 마지막 순교 장면(1:08:00)의 배경은 르네상스의 거장들이 꿈꿨을 법한 세트에서 찍었다. 인터넷에는 선명한 스틸 사진이 떠돌지만 유튜브 화질은 흐릿하다. 그나마 유일하게 볼 방법이니 소중하다. 영어 영상을, 불어 더빙에, 체코어 자막으로 보니 바벨탑에 온 듯하다.

역시 유일하게 볼 방법

1986년 모리스 베자르가 이끄는 20세기 발레단이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신비극을 공연했다. 공연 형태로는 이다 루빈스타인의 초연에 가장 가까웠을 듯하다. 세바스티아누스가 하늘로 활을 쏘는 장면(32:30), 이어 불판이 백합 밭으로 바뀌는 장면(40:30) 따위가 연극적으로 묘사되었다. 아도니스의 춤(1:28:00)은 어쩔 수 없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요제프 이야기>에 붙인 발레에서 요셉이 보티파르의 아내 앞에서 추는 춤을 떠오르게 한다. 드뷔시의 음악 가운데 어쩌면 가장 멜로디가 선명한 ‘천국’(2:08:40)에선 바이글의 영화 시작처럼 시점이 현대가 된다.

현대로 가져온 셰익스피어 로마 사극. 역시 캐스팅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다른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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