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세바스티아노 바실리카와 카타콤
‘진실의 입’ 바로 옆으로 난 클로아카 막시마 출구부터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까지는 대중교통으로 30분 정도 걸린다. 겉모습은 로마에서 가장 초라한 교회로 꼽힐 만하다. 교회 지하 카타콤은 정해진 시간마다 가이드 투어로만 입장할 수 있다. 모르고 시간을 놓쳤는데 다행히 앞 팀이 막 들어갔다고 따라가라 한다.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가운데 ‘카타콤 - 죽은 자의 언어로 말하는 죽은 자와 함께’를 떠올리며 지하묘지로 들어간다.
작곡가에게 영감을 준 화가 친구 하르트만이 바로 파리 카타콤을 보고 그림을 그렸다. 에드가 앨런 포와 가장 잘 어울리는 무소륵스키이니 으스스한 음악도 딱 그런 느낌이다. 몽파르나스 묘지 가까운 파리 카타콤이 어떤 종교적 또는 사회적 박해와 연관이 있을까? 왜 카타콤의 이미지는 하수도와 자꾸 연결되는 것일까?
서울에 지하철 2호선을 뚫을 때 보니 앞선 1호선 설계도가 없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 위에 아직까지 잘 버티고 사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상하수도, 전기통신, 여기에 지하철까지 얽히고설킨 지하 관계망은 생각만 해도 요지경이다. 저승의 신 하데스도 다스리기를 포기하고 떠나지 않았을까?
지하세계 설계가 바흐의 푸가처럼 질서 정연하고 흰개미 탑처럼 견고하다면 걱정할 것 없겠지만, 또 다른 바벨탑이 된다면 큰 걱정거리이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칸타타 <바벨>로 소통이 되지 않는 세상을 그렸다. 지구촌은 불경한 죄로 동맥이 경화되었다. 덕분에 걸핏하면 심혈관 질환에 시달린다. 갈등의 증폭으로 터지는 전쟁이 그것이다. 평소 약 먹다 급하면 스텐트로 막아보지만 모두 일시 방편이다. 역설적으로 코로나가 창궐한 뒤 전 지구 대기가 맑아졌다고 하니, 과연 지구에 인간은 암적인 존재이기만 한가?
그런 의미에서 무소륵스키나 스트라빈스키의 ‘그림자’보다는 ‘빛’을 들어야겠다. 바흐의 칸타타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을 부르나이다Aus der tiefe rufe ich, Herr, zu dir, BWV131> 가운데 ‘주님을 기다립니다Ich harre des Herrn’는 땅속 카타콤으로부터 호소하는 <쿠오 바디스> 주인공들의 목소리 같다. (산탄젤로에서도 이 곡을 들었다. 또 듣는다고 돈 내지 않는다.)
바흐에 화답하는 라흐마니노프가 다시 한번 지하묘지를 울린다. <저녁기도Vespers>(또는 철야기도All-Night Vigil) 가운데 ‘즐거운 빛Svete tikhiy’이다. <저녁기도>의 가장 큰 매력은 켜켜이 쌓인 합창의 짜임새이다. 초저음에서 시작해 소프라노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성악 스펙트럼이 어떤 악기의 도움도 받지 않고 펼쳐진다. 합창 지휘자 니콜라이 코르녜프는 “라흐마니노프는 무척 긴 호흡을 요구하는 음악을 썼다. 그렇다고 독창자나 합창단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렇더라도 “이 곡을 전부 부르는 것은 능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고 그래서 차르 시대에도 “철야 기도에서 노래한 합창단은 이틀 동안 휴식을 줄 정도였다”라고 한다.
라흐마니노프 음악 끝에 서서히 빛이 비칠 때, 카타콤에서 다시 산 세바스티아노 교회로 나가는 출구가 보인다. 눈이 부시다. 화살 맞은 세바스티아누스 조각이 제단 아래 누웠다.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맞은 그가 살아남았다니 이연걸은 왜 죽었나 싶다.
야코부스 보라기네의 <황금전설>에 묘사된 초기 기독교 성인의 삶은, 뒷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법을 제시한 성 프란체스코나 파도바의 성 안토니우스보다는 훨씬 맹목적이다. 그럼에도 만테냐와 일 소도마 이래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에 관심을 가졌다. 그 이유를 참된 신앙의 호소라고 생각하면 너무 순진하다. 예술가는 그렇게 순수하지 않다. 그들은 자신을 성 세바스티아누스라 생각한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자만심을 상징하는 존재인 것이다. 화살로 찔러도 안 들어갈 것 같은 토마스 만이 <베네치아에서 죽음>에 끌어들인 사람이 세바스티아누스이다.
“몸에 칼과 창이 꽂혀 들어오는 치욕적인 순간에도 이를 악물고 의연히, 그리고 조용히 서 있는 젊은이다운 지성적 청년”이 그의 전형적인 주인공... (안삼환 번역...)
그러나 이 교회에서 성 세바스티아누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구세주상Salvator mundi>이다. 거장이 82세에 완성한 그리스도상을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예술이 집약된 작품이라 말했다. 자신의 그림에 추남으로 등장하는 미켈란젤로와 달리 베르니니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모델이 될 만큼 수려했다. 그는 굳이 화살을 맞는 성인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 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물론 나사렛 예수가 이렇게 서구적인 미남은 아니었을 것이다.
헝가리 태생 미클로시 로자의 음악들이 마치 로마 시대에 쓴 듯, 사람들을 현혹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로자의 음악으로 완성되는 <벤허>의 전차 경주나 <쿠오 바디스>의 거룩함은 사실 당대와는 거리가 먼 레스피기 풍이다. 오래전 은하계 저편에 존 윌리엄스의 음악이 있다고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로자는 <쿠오 바디스>의 네로 황제로 열연한 피터 유스티노프에게 현악 사중주를 헌정했다. 그 밖에도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나 첼리스트 야노시 스타커를 위한 곡을 쓰기도 한 로자를 사람들은 거의 영화를 통해서만 기억한다.
흥미롭게도 클로아카 막시마와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 모두 바로 곁에 거대한 전차 경주장이 있다. 라틴어로 키르쿠스 막시무스, 이탈리아어로 치르코 마시모라 부르는 로마 시내 경주장이 유명하지만, 아피아 가도의 막센티우스 경기장(이탈리아어 치르코 마센치오)이 훨씬 멋지다. 치르코 마시모는 거의 흔적만 남아 쓸쓸하다. 그러나 막센티우스 경기장은 주변 건물과 녹음이 어우러져 산책과 휴식에 그만이다.
막센티우스라는 이름은 귀에 익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겨뤘던 황제이다. 별 설명이 없다면 황제끼리 싸웠다니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겠거니 하기 쉽다. 그러나 둘 다 로마 황제였다. 앞서 산 세바스티아누스를 박해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일이다. 비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고자 황제는 나라를 분할해 넷이 다스리도록 했다. ‘사두 정치Tetrarchia’라 불렀던 이 체제에 따라 제국을 동서로 나눠 각각 두 사람의 정제Augustus와 부제Caesar가 통치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동방정제, 길레리우스는 동방부제, 막시미아누스가 서방정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서방부제였다.
당연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퇴임 뒤 후계 문제가 복잡해졌다. 막센티우스는 서방정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이자 동방부제 길레리우스의 사위였다. 자신의 몫을 원했고 원로원도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하늘이 원한 것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1세였나 보다. 로마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던 둘은 312년에 로마 북쪽 밀비우스 다리에서 맞붙었다.
아레초의 유명한 벽화에서 보듯이 콘스탄티누스는 ‘십자가’의 도움으로 승리한다. 바로 그의 모후였던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찾아온 성스러운 상징이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정말 십자가 때문에 이겼다면, 세상에 전쟁에서 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는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업적을 보기 좋게 포장한 것이다. 실제로 막센티우스도 기독교를 박해하지 않고 허용했으며,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를 여러 로마 신의 우두머리쯤으로 여겼다.